[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9회|4. 선택과 탐색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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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글

  1. 선택과 탐색 (1)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경험한 지난 한 달은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신이 무너진 후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결심은 그냥 물 건너 가버렸다. 5.17 이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마자 법대 고시원도 폐쇄되었다. 덕분에 법학이나 고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벗어 버렸다. 고시를 하겠다고 하고서 기숙사에 입소했는데, 사회 분위기가 바뀐 탓에 내 마음도 완전히 바뀐 것이다. 2학기에 등록할 때는 법대 과목이 아니라 문과대의 사회학과나 영문과 그리고 사학과에서 과목을 선택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과목들이 훨씬 흥미로웠고, 시험을 봐도 성적이 훨씬 잘 나왔다. 사실 나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직해야 하는 데 나는 그런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의 방랑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마음을 주었던 여성과의 만남도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유치장에서 사귄 몇몇 사람들과는 따로 세미나를 계속했다. 이 세미나는 단순히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데모를 시도하기 위한 학습으로 시작했다. 정치 상황은 여전히 살벌했다.

세미나를 하던 멤버 중의 한 명은 S 대 사회학과 4학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대학의 체육학과 4학년이었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데모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결심이 서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경험도 있고 해서 다시 시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한 명도 참석했는데, 그녀는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보다는 가끔씩 참석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세미나는 각자 집을 돌아가면서 했지만 주로 우리 집과 사회학과 신모 군의 집에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주로 정세 분석과 향후 정국의 방향에 관한 이론서들을 많이 다루었다. 『전환 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 교수의 책들과 한국 경제를 다룬 최호진 교수의 책, 한국 근대사에 관한 김용섭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다. 사회 이론에 관해서는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학자인 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파워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당시 우리들의 지적 관심은 상당해서 그 당시 막 소개가 되기 시작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헤겔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H.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원서를 열심히 탐독했다. 사회 이론서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지만 처음 접한 헤겔 철학을 소개한 『이성과 혁명』은 개론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특히 법(Recht)을 Right로 번역해 놓았는데, 왜 이런 개념이 법철학을 다루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 아마도 이때 부딪힌 어려움이 나중에 헤겔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책들이 법대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편이었지만 사회학도인 신모 군이 과 내에서 도는 독서 목록과 동향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체육학과 생인 복기호 군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 운동에 보다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는 실제로 대림동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시위 현장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편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관심사와 편차는 있어도 거의 1년 이상을 꾸준히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세미나가 끝나면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그 당시는 정말로 술과 담배를 억수로 많이 마시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와 대학가의 현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형, 오늘 인문대 쪽에 삐라가 뿌려졌어요. 시위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복기호군의 말이다. S대생들하고 세미나를 하는 덕분에 S대 동향을 많이 듣는 편이다.

“Y대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검색도 더 심해진 것 같아.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과거보다 훨씬 격렬해진 것 같아. 아마도 광주의 경험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

“그렇지요. 광주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겁니다. 이제는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운동사가 나뉘어 질 거에요.” 신모군이 예리하게 당시 정세를 분석한다.

“독재자들은 늘 국민과 국가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일 뿐이지요. 그들을 권좌에서 쫒아내지 않는 한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복모군이 오른손을 살짝 들고 ‘투쟁, 투쟁!’을 외치는 흉내를 낸다.

“일단 혁명의 견인차는 젊은 엘리트 혁명가들이 되어야 할 겁니다. 과거의 모든 혁명 운동사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학가의 운동을 좀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이런 세미나를 하는 이유도 그 일을 선도적으로 하기 위해서이지요.” 신모 군이 세미나의 목적이 시위 주도에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 엘리트 중심으로 나가다 보면 일반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위험도 크다고 뵵니다. 엘리트주의는 철저히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 운동은 결코 결정적 시기를 앞 당길 수 없어요.” 늘 체험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복모 군의 말이다.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는 우리들에게 늘 고민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몸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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