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여전히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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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원(부산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구보씨가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때였다. 항상 재기가 넘치던 한 선배로부터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할까를 짚어보기 마련이다. 모든 걸 둘로 나누어본다는 건, 얼핏 생각하기에도 단순하고 마땅찮은 특성이다. 양분법이나 흑백논리처럼 좋지 못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나는 둘로 나누어 보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즉시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나는 둘로 나누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을 양분하여 보는 사고방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실 이건 배중률(排中律)이라는 논리적 법칙을 활용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지 이도저도 아닌 그 중간은 없다는 게 배중률이다. 이 A의 자리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도 괜찮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쥐를 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해 보자. 이것 역시 참인 진술이 되지 않는가.

물론, 쥐를 닮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 있는 한에서 그렇다. 또 모든 사람이 쥐를 닮은 사람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사람은 모든 걸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 가지로 나누어 보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모든 사람이 다 사물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는 말에는 그런 단서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미 사람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으로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반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런 말은 자기 배반적이 된다. 말한 사람도 사람이고 그래서 거짓말쟁이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됨으로써 적어도 반쯤은 자기 말을 확증하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이 말은 거짓이 된다. 그런 경우엔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리야 있겠는가?

사실, 이 말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은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나머지 한 종류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 다음, 자신이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양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서 듣는 사람에게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게 이 말의 전략이고 재미다. 배중률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 말이 숨겨 놓은 함정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에 익숙하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아닌 것도 내게 좋은 것과 내게 나쁜 것, 내게 유리할 것과 내게 불리한 것으로 나눠진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흐리멍덩한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집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그렇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면 도리 없이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한쪽에 속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는 내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두 가지로 나눠지기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방식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해 바로 나쁜 것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함정에 걸려든다. 그런 대답 자체가 이미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보는 ‘나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경우도 있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양분하여 보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적응의 산물이다. 자연적 삶 속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위험한 것인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재빨리 판단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새로 나타난 놈이 먹이인지 천적인지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당해서 거꾸러지기 십상이다.

세상에 어디 나쁘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또 어디 좋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는 상황에서나 부릴 수 있는 사치다. 야생의 삶에서는 빠른 판단과 빠른 대처가 생존을 좌우한다. 인류는 그 진화적 됨됨이가 형성되는 긴 시간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야생이 아닌 문명 세계다. 여기서는 원초적인 이분법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에 걸쳐 마련된 우리의 성향은 쉽게 지워지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번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은 보통 미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아,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고, 실은 저 사람에게도 괜찮은 면이 많아.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한번 구겨진 감정과 마음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마음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과 닮거나 유사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건, 어떤 면에선 유용한 반응 양태다. 솥뚜껑을 자라로 오인한 건 우스운 꼴일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그게 솥뚜껑이 아니라 자라였다면 어찌 하겠는가. 일단 경계하고 주의해서 열 번 오인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해 한 번 물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단, 이건 솥뚜껑처럼 숨어 있는 자라가 그렇게 드물지 않은 환경에서의 얘기다.

자라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둥그런 물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이런 증상이 심할 경우엔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심각한 충격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은 그런 일이 마음에 남긴 상흔을, 이른바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픈 기억과 관련된 즉각적인 반응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직접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감정적으로는 아직 개운치 않은 상대에게도 짐짓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고 심정의 쏠림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평가하려고 자세를 다잡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의 본능적인 양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분법이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목도하곤 한다. 인터넷만 열어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사안에는 대개 호오(好惡)의 입장이 선명한 댓글들이 달린다. 소위 악플들에는 노골적인 혐오나 증오의 감정들이 드러나고, 내편과 상대편이 전쟁터에서처럼 갈린다.

이것은 진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찍이 초기 포유류에서 물려받은 변연계(邊緣系)의 감정 회로를 신피질(新皮質)의 이성적 계산이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용선, TV토론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구보씨는 어제 TV에서 본 토론을 생각해 본다. 으레 그렇듯 그 토론에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고 대부분이 대학 교수다. 대뇌 전두엽의 잘 발달된 신피질을 훌륭히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의견이 선명하게 갈린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상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투박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 도대체 왜일까?

“구보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물어볼 만한 걸 물어보는 사람과 물어볼 만하지 않은 걸 물어보는 사람. 너 같은 철학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안 물어봐도 잘 알겠지?”

드디어 Y가 이죽거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손톱으로 할퀴는 여자와 말로 할퀴는 여자. 아니, 한 종류가 더 있다. 손톱으로도 할퀴고 말로도 할퀴는 여자. Y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Y야, 그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야. 또 철학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데, 마치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식으로 그렇게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구.”

“엥, 진지하게 묻는 거라구? 설마… 나도 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을 많이 만나 봐서 알지만, 그네들이라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건 전혀 아니거든.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맑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길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구보 너처럼 스스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하지만 봐.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말을 바꾸고 논리를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쫓아갔는지를.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쫓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쫓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어, Y야, 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네 말 하는 폼새가 좀 이상하잖아. 지식인 나부랭이라니…”

“그럼, 아니야?”

“Y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대화하자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거라구. 감정이 실려 있는 말이잖아. 그래가지구는 소통이 안 돼.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화풀이인 거지. 거기서 어떤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겠어?”

“에그, 또 소통이야? 구보야, 너야말로 참 이상하다. 소통을 내세우는 게 무슨 만병통친 줄 아니? 고상하게 웃는 낯으로 얘기해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침묵하거나 화내는 게 소통의 효과적인 방편일 때도 있어.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정해진 틀에 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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