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천 하룻밤 이야기]
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 2024 05 20 소만(小滿):
— 모내기철에 들판에는 사람이 없고, 너른 들에는 기계들이 듬성듬성 있다.
류종렬(한철연 회원)
인간이 상상하기도 버거운 기나긴 우주의 역사, 그 속에 지구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생명체로서 35억 년 전부터 시작하여, 원숭이 류를 떠난 700만 년 전을 거쳐, 목소리로를 내기 시작하는 경추가 바로 선 200만 년 전을 지나, 불을 보관하여 사용하는 50만 년 전 이후에, 동굴을 벗어나는 10만년전과 슬기를 갖춘 6만 년 전쯤을 지나, 돌을 정교하게 다룬 후기구석기로서 3만 년 전, 활과 화살을 사용한 2만 년 전, 농경과 목축의 시작으로 1만2천 년 전, 그리고 기원전 7000년경에 구리, 기원전 3,500년에 청동(구리+주석), 기원전1200년 전에 철을 다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철기시대 3천 년이 지나, 1953년에 규소(디지털)와 유전자 서열(DNA)의 시대로 들어섰고, 21세기 들어와 최근 몇 년 사이에 문자와 이미지가 전지구화하며, 그 속도가 너무나 발전하여, 같은 세기 안에서도 세대들 사이의 간격을 느끼고 산다. 세기 단위의 구분에서 19세기와 철기문명의 전성기, 20세기 철의 시대에서 규소의 시대의 전환은 세대 구분의 시대를 열었고, 21세기에서 세시 풍습과 의례의 변화를 보면 세대구분을 넘어서 10여 년의 단위로 변화를 맞이하는 것 같다. 다음 10년은 더욱 빨라질 것인가?
먼 과거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 시대의 변화과정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인다.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흔들리며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멀미하는 광경이 다반사였는데, 300킬로미터 속도의 기차에서도 그런 광경이 안 보이는 것처럼, 요즘 어린 세대는 손가락으로 테블릿 pc의 그림을 밀면서 잘도 적응하고 있으니, 현 세상이 역동적인 것 같다. 곧 이어, 손가락이 아니라 입말로 화면 조정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입말의 문자화가 다시 문제거리로 떠오를까?
세대의 구분이라기보다 10년 또는 5년 사이의 변화가, 과거에 세기의 변화나 50년의 변화와 같이 가는 듯하다. 인공지능기술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은, 다음 새로운 인간형이 아닐까? 그래도 인간이 먹고 자고(식주, 食住) 하는 것은 누구나 여전히 하루의 일상이고, 그리고 이 시대나 새로 태어난 이들은 편리를 위한 인공기술이든, 삶의 공동체에서 상부상조이든,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하고, 생명체인 한에서 질병과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필요는 여전하며). 이런 기술의 혁신은 잉여생산을 기계시대와 또 다르게 초과 잉여를 극대화할 것이다. – 돈에 미친 인간들만이 살아갈까? – 그럼에도 태어나_살다_떠난다는 간단한 생명과정은 여전할 것이고, 생명체로서 “살다”에서 상부상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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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여 년 전에 이야기를 나누던 한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상황이 매우 역동적(다이나믹)이라고 감탄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렇다, 그는 광주항쟁을 잘 몰랐지만, 87년 민주화와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장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일본은 그런 것이 없이 상부와 국민 사이가 분리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가 우리나라의 그 다음도 알았더라면 아마도 ‘매우’ 역동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전공하였는데,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유럽사에서 르네상스가 매우 역동적이라고 한다.
유럽의 사상사에서 역동적인 시대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네 시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동방의 황제제도가 들어오고 아테네가 제국주의로 향하는 시절에, 이런 참주(황제)제에 저항하며, 동방과 전쟁에서 시민이 목숨을 걸고서 지킨 나라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는 직접 민주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탐구하는 ‘이뭣꼬’를 데모스인(시민)들에게 또는 젊은이에게 탐색의 여정과 노력의 필요성을 심으려고 했으나, 우파인 참주파와 좌파인 민주파 양쪽에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플라톤에게 전수되었고, 플라톤은 스승의 추구를 따라, 사태, 상황, 사건, 자연 등을 총체적으로 즉 모든 ‘뭣’을 다루고자 노력 하였다. 각 영역과 삶의 터전들에 따라, 각 위상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려했다.
아테네 시대는 사회적으로 역동적인 만큼이나 사상적으로 발산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계보의 분류에서 상층에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표면에서 메라가학파의 에우클리데스, 심층의 깊이에서 퀴니코스학파와 퀴레네 학파가 있다고 분류할 수 있다. 상층을 우파로 심층을 좌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사상들이 학파들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거듭했을 때까지도 아테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동적이었다. 이로부터 4세기를 지나, 로마가 동방의 황제제도를 받아들이고, 또 1세기정도를 지나면서 셈계의 (유일)신관과 겹치면서, 마치 중국의 한나라가 진시황제의 다음으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듯이, 로마도 제도와 종교가 상층의 체계를 만들며 지배적이 된다. 벩송은 상층의 지배시대를 상식(오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일본 친구가 자신의 공부를 강조하듯이 르네상스도 역동적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바로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사상의 다시 태어남(르-네상스)이다. 로마 사상의 재탄생이 아니다. 고전 그리스문학의 새로운 판본들, 물리학의 발달, 그리스철학의 재조명, 그리고 종교개혁을 보태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 역사에서, 자신들의 문자로 된 기원전 역사가 없다고 한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라틴어를 문자화하여 기록되어 있으며(우리의 역사에서 한자로 기록되듯이), 프랑스인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즉 자기 입말을 문자화하여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라 한다. 자각하는 시기이며 철학사에서 주체 또는 자아의 등장시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역동적 변화의 문을 연 사상사들은 라블레(Rabelais, 1483-1553), 몽테뉴(Montaigne, 1533-1592),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라 한다. 이들이 프랑스어(자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가 입말을 문자화하려는 노력은 훈민정음(1446)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역동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의 라틴어로 문자화한 학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고, 제도로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그래도 데카르트에서야 신학에서 벗어난 인간의 주체의 사유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학의 틀과 교회제도가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있었고, 심하게 말하면 종교재판과 마남사냥의 계속된 관습과 의례는 인민의 사유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존속해왔다.
내가 이 시대를 주목했던 것은 “주체”라는 개념의 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각국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국어로 입말을 하고, 그리고 그 입말을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입말의 중요성을 훈민정음에서 표현하고자 했지만, 사대부는 상층의 유지를 위해 한자를 고집하였고, 백성들은 상부상조할 정도로 입말을 문자화하거나 사회화하지 못하였다. 그 억압과 위협의 시대가 너무 길었다. 그나마 일제 강점기에서 선각자들이 다시 입말을 가다듬기 시작하였지만, 입말이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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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고전의 이해를 넘어서, 프랑스가 역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산업사회의 진입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는 “빛들 세기”(계몽기, 누가 누구를 계몽하는가?)라 불린다. 그런데 한편으로 카톨릭의 견고함과 절대왕정이 있었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은 상층의 자기 놀음(유희, 동굴의 극장)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진자의 동시성을 발견한 갈릴레이 이후 물리학의 발전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빛은 광원에서 사방팔당으로 빛살을 펼치고, 모든 곳에 퍼진다. 신학에서 신이 빛이고 생명이라고 설법하였을 때, 과학자들에게서 자연에서 그 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비추는 것이고, 게다가 방향은 얼마나 다른가? 누구나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쓸 수 있다면, 여러 학문들의 지적 종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에서 상식(sens commun)에서 이‘뭣’꼬의 뭣을 다루는 것이 한 방향도, 한 체계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빛의 세기(les Lumières)” 당대의 지식인들을 백과전서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연과 빛을 – 또는 유물론을 – 깨달았다. 이들 학자들은 대학에 속하는 교수들도 아니었고, 왕정의 복속된 지식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합작품, 상부상조의 지적 체계가 백과사전인 셈이다. 왕정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교황청은 금서목록에 올렸다. 그런데, 시민들은 정규학교(주로 신학교이지만)에 가지 않고서도 입말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그 말을 그대로 문자화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소(Rousseau, 1712-1778)는 거의 고아로서, 정규 교육을 받음 없이도, 르네상스 이래로 200여년 동안 프랑스어로 번역된 그리스-라틴 사상들과 자연법사상의 저술들을 읽었다. 그는 입말의 문자화를 통한 자신의 저술들을 냈으며, 이 저술들은 프랑스 대혁명(1789)의 불꽃(이스크라)이 되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에 의한 사유의 지속은, 우선은 자기들의 입말의 문자화이며, 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육에 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교육체계를 개편하면서 무상교육 보통교육(남녀 모두), 세속교육(종교에서 탈피)을 내걸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에서 철학을 필수로 만들었으며, 그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규정하기 위해, 교수자격시험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통과자는 23세에 교수가 되며, 정년까지 교수직을 유지한다. 23세에 연구할 수 있는 생활조건을 갖추어, 자기 입말과 자기 사상을 전개한다. – 프랑스 사상이 반짝이는 빛과 같다고 할 때, 그 빛의 발산이 이전 시대와 이전 학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 교육이며, 열여덟이면 누구나 고등학교 4학년에서 철학을 배운다. 이들은 균형 저울의 양쪽을 분담하는, 자연의 이법과 종교의 신앙, 이치와 논리, 자연론과 이상론, 유물론과 관념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의 좌우를 함께 다루어서 자신들의 위상을 정립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좌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우편에 상품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문화의 창달과 문명의 발달을 조화롭게 엮어야 한다는 것도 배우고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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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거 역사에서 향가 또는 구결(口訣: 또는 이두, 吏讀)과 비슷한 우리 입말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나,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삼국시대는 입말과 문자 사이의 간극이 생겼고, 즉 백성과 상층(지배자)이 서로 사맛디 아니함이 깊어져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시대에 불교의 도래 이래로, 고려 시대에는 불교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국의 변화에 따라가면서 조선시대는 유교로 전향하였으나, 불교는 백성들 속에 남아 우리의 심정적 토양을 가꾸었고, 제도적으로 성내에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유교가 갖추어졌다. 불교가 인성에 미친 영향은 자연의 이법에 맞게 사는 것과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을 위해 미륵세상을 꿈꾸게 했으며, 유교는 현실에서 삶의 터전을 조직화하면서, 마치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에 보태어 보신각 이름에서 보듯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백성에게 심었다. 조선의 과정에서 두 시기의 조선이라고 할 때, 임란과 호란을 경계로 할 수 있다.
이 두 차례 외적들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왕조에서 상층의 사대부가 지위 보존을 위해 관념(이데올로기)을 강화하였고, 사문난적이니 문체반정이니 하면서 상층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백성들은 이 터전에서 자기 보존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중국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청나라를 통한 서구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 것인데, 그 서구지식에는 겉으로는 기술문명이 전달되고, 속으로는 내밀하게는 유일 신앙의 신학이 스며들게 된다. 이 변혁기에 이 터전의 지식인들은 상층과 더불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서구에서 온 문명과 신학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제3신분과 같은 이들이. 서학에 대해 동학을 일으켰다. 그 동학이 아직은 인민들 속에서라기보다 인민들의 표면에서, 입말과 문자의 일치보다는 습관적으로 내려온 중국 문자에 의존하였다. 상층에 대한, 심층에서 흐르는 인민의 저항은 여전히 표면에 닿에 있을 정도 같았다. 19시기 후반에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에 의한 지배 방식이, 유럽이 중국을 덮치듯이, 미국에게 당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폭력과 위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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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글다’고 고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학문적으로 계산해 보았으나, 인간의 상식(오관을 통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게다가 그 다음으로 닥친 유일신앙의 독단과 억압은 인간의 오관(상식)을 넘어서는 사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마남사냥을 했었던가. 그럼에도 인간은 달리 사유하는 방식을 개발하였고, 흥미롭게도 수학에서 대수와 좌표 기하학은 상식을 넘어서 양식(bon sens)의 시대를 열었다. – 그 대립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비상식(넌센스, non sens)이 있었다. – 그 양식은 지구가 둥글다고, 인간은 종교의 경전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에 의해 산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그리스 아테네의 사유를 다시 생각한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둥글고 ‘하나’라는 것은 지리상의 발견을 지나서야 느낀다. 동양의 백성들이 실감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중국이 서구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몰락한 지식인층에서부터 일반 백성이 깨닫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한 나라가 자주적이고 자치적인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자각하는 것이며, 그 토지에 사는 입말이 문자화되고 지식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중의 입말에 대한 새로운 생성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하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저항은 기존 질서의 유지자들의 저항을 뚫고 저항해야하는 ‘저항의 저항’이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체제에 대한 항쟁과 달리, 중생 또는 인민의 저항이 표면 위로 오르면서 그 속도는 문명의 발달의 속도에 발맞추듯이 발전하고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후반에 이 땅에서 자주와 자치를 위한 노력은 여전히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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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Columbus, 1450-1506)가 황금과 향료를 찾아 서부 항로를 개척(1492)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의 탐욕의 발톱은 드러났다. 이어서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ándo Cortés, 1485-1547)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 정복(1519-1521), 피사로(Pizarro, 1471-1541)가 페루에서 잉카 제국의 정복(1532년)하기 까지는 몇 십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즈텍의 마야문명과 페루의 잉카문명의 말살을 자행하는 것은 스페인 군대이라 하지만, 이런 문화적 터전을 하나의 지배 아래로 두고자하는 유일신앙 종교가 그 뒤에(메타피직처럼)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빠르게 정복한 것은 기술문명의 차이였지, 종교나 삶의 태도의 우월성이 아니었으며, 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다음으로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유럽의 정복이 이루어질까? 유럽에서 서쪽 통로이든 동쪽 통로이든, 당시의 이들의 항해 기술과 문명으로 인도와 중국을 지배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앞의 아메리카 정복에서 30여년에 비해, 거대 문화를 유지하던 인도와 중국에서는 16세기에서 19세기로 3세기가 걸렸다.
중국에서 두 차례 아편전쟁(1840년과 1856년)으로 서구의 정복야욕을 드러내고 식민지 지배를 하려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서구와 오랫동안 가늘고 긴 소통이 있어서 만만하지 않았다. 청나라 자체에서는 이즈음에 태평천국의 항쟁(1850년-1864년)이 중국 지식층을 일깨웠고, 인민이 자각하기에 시작하였다. 중국이 중남미와 달리 오랜 문화의 전통과 나름의 기술이 있었지만, 서구의 기술문명과 무기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었다. 중국은 자존심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인민이 성장하며 사회주의 사상이 스며든다.
조선에서 19세기 전반부터 상층에 저항하는 백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봉기는 잦았으나 사회적 연대와 인민의 자각은 아직 미흡하였다. 1859년에 서학에 대해 동학을 창안하였으나, 몰락한 상층의 지식인들의 연대였으며, 백성들과 상호소통에는 아직도 입말보다 한문을 통한 문자화였다. 아직도 이 시기에 인민과 더불어 사회의 변혁을 실행하려는 노력은 모자랐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평민화된 귀족들이 제3신분의 역할을 하듯이, 조선에서 제3신분의 역할을 하는 세대는 1919년 삼일 운동 이후에야 인민의 자각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그나마도 선구자들이 인민과 함께 라는 의식은 부족했다.
이 시기에도 입말과 문자화 사이에 국한문 혼용체가 있었지, 인민의 입말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인민 속에서 자각하려는 운동은 여러 방식이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과 문자화 방식은 다양하게 표면으로 올라왔다. 그 표면의 양면성에서 상층의 한자화의 문화가 입말에 밀리면서, 또 다른 한편 미군 통치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 미국의 제국주의 방식에 예속되어 갔다. 입말의 문자화는 단절된 문화 형식에서도 꾸준히 연속성을 찾으려 했으나, 시간이 필요했다. 입말과 문자화가 1987년 한겨레신문의 등장으로 입말의 일반화를 촉진하였다.
입말을 8천 만이 공유하지 못한 가운데 5천 만 속에서라도 발전과 확장은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유일신앙의 경전의 한글화에 자극을 받아, 유교 경전의 한글화, 불교 대장경들의 한글화, 조선 실록의 한글화는 묻혀있던 전통 문화를 되새기며 인민들의 자각을 부추겨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리의 긴 문화의 창달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한반도도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전지구적으로 일반화(보편화는 아니라)길을 가면서 세계와 우리나라도 함께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가 하나로 통일화되기보다, 세계는 각 터전에 맞게 고유한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발판으로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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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변화과정에서 역동성보다, 입말의 문자화에 이어서, 어쩌면 우리나라는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후반에는 대학교육의 확장으로, 물론 영어를 통해 배우고 익히지만, 그보다 더 우리 입말의 사용에는 강도와 속도가 붙어 있다. 입말의 일반화가 해방 후 겨우 79년이지만, 일제의 잔재와 미국의 제국 강압을 넘어서려는 힘과 노력은 현상적으로 또는 내밀하게 축적되고 확장되고 있다.
1980년대 대학의 확장은 지식인들을 양산하였고, 이들은 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며 우리 민중을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서구철학이든 많은 학자들이 자기 방식으로 연구하여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런데, 서구철학의 수용은 아직도 인민과 더불어 나간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한 가지, 우리철학이든 중국철학이든 박사학위가 거의 우리 입말에 맞추고 있는데 비해, 많은 서양학문의 수용자들은 유학 중에 논문을 그 나라의 입말로 썼다. 우리 인민들이 읽을 수 있는 학위 논문이 아니었다. 이제 외국 유학자들이 그들의 학위논문을 우리 문자로 번역하고 쓰고 나야지만, 대학에 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풍토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에서 교수직은 일반화된 자격시험이 없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미국식 학위 제도로 교수자격에 상응하는 것으로 익숙하여있지만, 프랑스 제도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대학 제도의 맹점은 대학교육에서부터 민중 또는 인민으로부터가 아니라, 인민에 저항하는 상층의 지배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젊은이가 다양한 학문들로 나아가가는 길목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좌든 우든, 심층이든 상층이든,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자료를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하며,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자신의 자주와 자치를 이룰 수 있는 분야가 이 총체적 자료들 속에서 ‘뭣’을 자료로 삼고 있는지를 성찰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대학 1학년에, 총체적 자료들에 대한 예비적 섭렵으로 철학교육을 필수화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70년대는 철학이 교양 필수과목이었고, 80년대 중반에 선택과목으로 바뀌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나중에서 철학과목 자체가 무용하다고들 하기에 이르렀고, 겉치레로 사람들은 이제 인문학의 필요성을 말하곤 한다.
먹고 자고(식주)의 기본 위에 두 가지 즉 교육과 의료의 무상화가 근본적 토대이다.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까지의 생산능력의 발달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며, 이를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살아 간다는 것, 그 과정의 필수적 토대를 공유하는 것은 양식을 넘어서 고등양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리라. ‘식주교의(食住敎醫)’를 이루는 변역에서, 또한 우리 삶의 필수적인 토대로서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5:15, 57PLI) (6:19, 57PLJ) (6:25, 57P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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