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8-니체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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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58-니체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1)

앞에서 그리스 비극을 둘러싼 아리스토텔레스의 헤겔의 논점을 파악해 보았다. 그 논점은 비극의 효과와 그 전개 과정의 관계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기꺼이 우연성을 용인했으나 헤겔은 비극의 필연적 전개를 강조하면서 파토스적 성격과 실체적 분열을 강조했다.

그리스 비극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논의는 니체에 의해 제기되었다. 니체에 따르면 초기에 비극은 극적 전개가 없었고 다만 합창단만이 존재했다. 이 합창단은 음악과 춤, 그리고 서정적인 노래를 통해 극을 전개했는데, 니체는 이 가운데 특히 음악의 차원을 분석하는데 주력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단순히 비극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두 종류 즉 조형 예술과 음악 예술을 낳는 예술적 충동 자체를 다루는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그 핵심 문제는 음악이 이미지를 낳는 과정인데, 니체는 이 문제를 비극의 합창단을 분석하는 가운데 던지고 있다.

 

2)

비극을 미학적으로 분석하기 전 니체는 예술의 자연적인 두 충동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폴론적 충동인데, 이것은 흔히 그리스 고전적 미학이라고 지칭되는 사물의 이상적 비례, 상호 조화로운 세계를 낳는 예술적 충동이다. 이는 주로 조형예술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형상의 원천이다.

그리스에서 아폴로적 예술 충동에서 서사시가 발전된다. 원초적 일자 속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인간은 예술적 충동을 통해 아름다운 이미지의 세계를 꿈꾼다. 그 꿈의 형상이 곧 호머의 서사시인데, 그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부동 불변의 세계이지만, 부조리와 모순이 지배하는 바다인 삶의 세계에서 일시적인 위안의 섬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위협적인 파도는 곧 섬의 해안을 침식해 버린다.

이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충동이 있으니, 그것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이 충동은 사물의 근원적 일자,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하며 파괴하는, 자기 모순적이며 동시에 자기 창조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충동이다. 이것은 개인이 자기의 자아를 넘어 근원적 일자와 합일하는 도취의 상태이며 원초적 환희의 세계이다. 이런 합일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디오니소스적 음악가는 어떤 이미지도 갖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근원적 고통이며, 이것의 근원적 반향일 뿐이다.” [1]

 

이 충동은 조형예술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예술적 형상을 낳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의 형상 즉 선율이다. 여기서 음악적 선율을 근원적 일자에 대한 직접적인 반향이며, 그 자체로는 이미지나 개념을 갖지 않는다.

니체가 음악적 선율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나온다고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비극의 탄생 후반부에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예로서 끌어들이는데, 바그너의 음악이 고전 음악의 화성을 넘어서 고대 음악이 지닌 선율이 강조되며 그 속에 특히 불협화음이 지속된다는 것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선율은 협화음으로 이루어진 화성의 규칙을 지니지만 그 내부에 이미 불협화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치 불협화음의 바다 위에 화성의 음들이 포말처럼 떠있는 듯하다. 니체는 이런 선율이 지닌 이중성을 가리켜 음악을 디오니소스적 형상화라고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파악하기 어려운 이 근원적 현상은 그러나 오직 직접적인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이라는 경이로운 의의를 갖는 것에서 직접 파악된다. “[2]

 

3)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나온 음악적 선율은 비극으로 전개되기 전 우선 서정시가 된다. 음악적 선율이 디오니소스적 의지의 직접적 반향으로서 감정적 상태에 머무른다면, 서정시에서는 그런 음악적 반향이 이미지와 개념을 통해 다시 형상화된다. 니체는 그리스 서정시의 선구자 아르킬리코스에서 서정시가 솟아나오는 과정을 아름답게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도취한 열광자 아르킬로코스가 쓰러져 잠들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고산의 초원에서 정오의 태양 아래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이제 아폴론이 다가와 월계수로 그를 만진다. 잘들어 있는 자를 사로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마력이 자신의 주위에 형상의 불꽃을 발산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발전했을 때 비극과 주신찬가로 불리게 되는 서정시인 것이다.”[3]

 

근원적 일자가 곧 생성하는 의지라면 음악적 감정은 그 본질적 의지의 현상이다. 이 감정이라는 음악적 마력이 자신의 주위에 만들어낸 형상의 불꽃 즉 직관과 개념이 곧 서정시인데, 이런 형상의 불꽃은 아폴로의 월계수가 신비하게 시인을 건드리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음악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상 즉 아폴론적인 것은 그 이전 삶과 서사시에서처럼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로적 형상 속에서 내부에서 그것을 생성하는 힘이며, 여기서 나온 형상은 상호 침투하면서 다시 근원적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되돌아 간다. 니체는 그 관계를 약간 신비하게 아폴로의 월계수 잎이 건드리는 것으로 같이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서정시를 형상과 개념을 통해 음악을 모방하는 불꽃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에 어떠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라고. 음악은 의지로 나타난다.”[4]

 

4)

음악과 서정시에 관한 이런 설명 끝에 마침내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설명한다. 비극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최초에 비극은 인물의 연기 없이 합창단의 노래로만 이루어졌다.

니체는 이 합창단을 이상적 관객을 표현한다고 보는 윌리엄 슐레겔의 주장을 비판한다. 아직 비극의 구체적 내용이 전개되기 전에 이미 합창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합창단이 현실과 꿈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에 있으면서 현실의 침입을 막아주는 성벽이라는 쉴러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본다. 그런 관계는 삶과 아폴론의 관계이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상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 위에 니체는 이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의 신도들이 빠져들었던 도취 상태 즉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 상태로 규정하며, 합창단의 주된 역할은 관객을 자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연의 심장으로 되돌려지게” 하는 것이다.[5]

비극의 구체적 내용은 이런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떠오르는 형상이다. 그것은 마치 음악적 선율에서 서정시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떠오르는데, 비극에서 그 형상은 단순한 직관과 이미지가 아닐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며 삶의 지혜가 된다. 즉 그것은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지혜”[6]를 고지한다.

관객은 합창단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면서 그 스스로 근원적 일자와 합일한다. 그런 상태에서 비극의 시인이 표현한 삶의 지혜를 마치 그 스스로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체험한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이 떠올리는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사티로스 합창단이 떠올리는 환영이다.”[7]

 

이런 환영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서사적 음유시인이 보는 것은 아니다. 그 환영은 무대 위에 재연된 삶을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체험함을 통해 그가 직접 겪는 삶이다. 이제 무대 위에 나타난 비극의 구체적 내용은 아폴론적 형상이며, 그 자체 정확성과 명쾌성을 지닌다.

 

“디오니소스 신은 아폴론적인 현상 속에 객관화는 것이지만, 이 아폴론적 현상은 더 이상 합창단의 음악처럼 영원한 바다, 종횡으로 얽힌 삶, 불타는 생명이 아니며…. 이제 무대로부터 명료하고 확고한 서사적 형상이 디오니소스 시종에게 말을 한다.”[8]

 

하지만 그것은 삶과 떨어진 환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출현한 환상이니 “마치 어두운 벽에 던져진 빛의 형상”과 같다. 니체는 이를 다시 설명하면서, 마치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잠시 후 눈에 검은 반점이 생기듯 무대 위의 형상은 “자연 내부의 가공스런 것을 들여다 본 눈이 만들어낸” “빛나는 반점”[9]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구체적 내용 속에는 아폴론적 명확성과 명랑성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비애의 검은 호수에 비치는 밝은 구름과 하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10]고 한다.

 

5)

니체의 논의는 음악적 예술, 또는 서정시를 설명하는 미학적 이론으로서는 흥미롭고도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비극을 실제로 파악하는 문제에서는 니체의 논의는 비판 받는다. 특히 니체의 논의는 비극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이며 또한 니체의 논의는 주로 합창단의 성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과연 합창단의 성격이 니체가 가정하듯이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상태인지가 문제 된다.

헤겔 역시 그리스 고전 비극을 논하면서 합창단의 성격을 분석한 바 있다. 헤겔은 합창에 서정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니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합창이 마치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겔은 합창은 관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는 이상적 관객, 평가하는 관객이라는 슐레겔의 관점과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입장은 슐레겔의 관점과 구분된다. 왜냐하면, 헤겔은 합창단이 관객을 대변하면서 극중 인물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평가하는 의식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니체도 비판했던 윌리엄 슐레겔의 입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슐레겔과 헤겔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헤겔은 비극이 실체적 분열의 상태에서 전개되는 충돌과 대립을 다룬다는 것에서 합창단의 성격을 규명한다. 헤겔에 따르면 합창단은 아직 분열되기 이전의 민족적 실체를 대변한다. 합창단은 분열된 민족적 실체를 다시 본래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관객의 소망을 대변한다. 비극의 관객은 더 이상 행동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실체적 통일성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합창단이 대변하는 관객이 이처럼 복고적 소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슐레겔이 말한 이상적 관객처럼 평가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합창단은 극중 인물의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인물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지도 경고하지도 않는다. 다만 합창단은 인물의 행위를 관조적으로 지켜보면서 그에 대해서 감정적 반응에 머무른다. 즉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서는 경악하거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처벌에 대해서는 탄식한다.

헤겔은 이런 합창은 그리스 비극이 일어나는 일종의 배경이라고 한다. 마치 신이 신전 안에 있듯이, 극장이 대지 위에 있듯이 극의 인물은 이런 민족적 실체를 대변하는 합창을 배경에 두고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합창은 근본적으로 서정적이다. 헤겔은 이 서정성은 합창이 사용하는 언어의 운율이 서정시의 형식인 패안과 디티람보스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합창단의 성격은 서정적이라 하더라도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 상태는 아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이상적 관객도 아니며 오히려 어쩔 줄 모르고 다만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관객일 뿐이다.

실제로 이는 헤겔이 그리스 비극의 대표로 삼는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에서 합창단의 노래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6)

오이디푸스에서 마지막 합창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조국, 테바이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 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이야 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에 이를 데 없는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했건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부르지는 마라.”

 

합창은 영웅의 몰락을 한탄한다. 이번에는 안티고네의 마지막 합창을 보자. 합창은 안티고네가 죽는 장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렇게 오래 지닌 다나에의 아름다움도

하늘의 빛을 버리고

청동의 벽으로 싸인 방에

무덤처럼 으슥한 그 방에 갇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오오 내 딸이여 그도 고귀한 혈통으로서

그러나 운명의 신비로운 힘은 두렵기도 하고나

거기서는 부도 아레스도 성벽도

바다를 때리는 검은 배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번에는 클레온의 몰락 앞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지혜야 말로 으뜸가는 행복,

신들께 향한 공경은 굳게 지켜져야 한다.

교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언제나 큰 천벌을 받고

늙어서나 지혜를 배우게 된다.

 

합창단은 그 누구나 동정하며 그 누구에 대해서도 공감할 뿐, 적극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거나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감정적인 반응인데, 그런 점에서 이상적 관객도 디오니소스적 상태라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1] 비극의 탄생, 95쪽

[2] 비극의 탄생, 286-287쪽

[3] 비극의 탄생, 94쪽

[4] 비극의 탄생, 106쪽

[5] 비극의 탄생, 115쪽

[6] 비극의 탄생, 119쪽

[7] 비극의 탄생, 121쪽

[8] 비극의 탄생, 128-129쪽

[9] 비극의 탄생, 130쪽

[10] 비극의 탄생,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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