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
1) 시문학과 음악의 결합
앞에서 건축과 음악이 공통적으로 수학적 비례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고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을 시문학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시문학과 음악은 공통적으로 소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리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시문학에서 소리는 관념을 담지하는 상징적 기호, ‘독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관념의 표시자’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와 변별성을 지니므로, 언어 기호로 사용될 수 있다. 반면 음악에서 소리는 그 자체가 질료 즉 형상화의 수단이다. 음악의 질료인 음은 양적 크기를 지닌 것이며, 이런 양적 크기 자체가 주관의 시간적 평면 위에서 일정한 청각적 인상을 남기면서 음악이 탄생한다.
시문학과 음악 사이의 비교는 정신과 관계해서 볼 수 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이미지와 상상, 환상 등과 같은 감각적 관념이다. 이런 감각적 관념은 사유의 추상적 관념을 비유적으로 즉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은 선율을 통해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이런 감정은 정신을 ‘에워싸는 옷’에 불과하니, 음악을 통해서 정신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음악은 정신에 대해 ‘무규정적인 공감’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예술의 목표가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다면 이런 점에서 내밀한 감정의 표현에 머무르는 음악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음악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이 감정의 내밀성을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를 위해 음악의 도움을 빌리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그 결과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인 합창이나 악극이 출현한다.
그러나 음악과 시문학은 질료의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충돌은 시문학과 음악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오페라가 다시 내부에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분열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양자의 결합은 완전한 통일보다는 서로에 대해 종속적인 결과가 된다.
비극에서 합창, 악극에서 음악이 끌어들여질 때, 음악은 시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부수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음악은 차라리 낭송에 가까워진다. 반면 노래에서 시문학이 끌어들여질 때 사실 가사는 음악에서 표현 불가능한 정신을 표현하여 내밀한 감정을 더 강화하려는 종속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된다.
2) 음악의 두 유형
헤겔은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서술했으나, 음악 장르에서는 그런 역사적 서술을 생략한다. 대신 그는 음악적 표현 수단과 정신적 내용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절(음악 장 3절)에서 그는 음악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수반적 음악이며 다른 하나는 자립적 음악이다. 이런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시문학적 가사 즉 텍스트와 어떻게 관계하느냐이다. 한편으로 음악은 가사를 넘어서려 하며, 다른 한편으로 가사는 음악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니, 음악은 가사를 버리고 싶으나 버릴 수도 없다.
수반적 음악은 정신적 내용을 강조하면서 시문학과 관련을 가지는 음악이다. 헤겔은 이를 세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서정적 노래와 찬송의 노래 마지막으로 악극이다. 서정적 노래가 그 출발점을 이루며, 찬송의 노래(칸타타, 오라토리오 등)는 바로크 시대 정점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악극(오페라)은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 반면 자립적 음악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강조되는 음악이다. 여기서 음악은 시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형식적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설명 속에서 어느 정도 음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도 헤겔은 음악의 역사가 전 근대적 수반적 음악에서 근대적 자립적 음악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적 수반적 음악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음악을 과연 엄격하게 역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음악을 다만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는 헤겔의 입장에 따라서 종류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3) 수반적 음악
수반적 음악은 음악이 시문학과 관련하는 것이어서 수반적 음악이라 한다. 수반적 음악의 효시는 개인의 사랑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노래하는 서정시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시문학을 통해 완결된 내용에 내밀한 감정을 입히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고 이미 단순한 낭송적인 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음악은 화성보다는 선율을 따르며, 기악보다는 성악이 위주였다.
음악적 표현방식이 발전하면서 음악적 감정은 강화되며 순화된다. 이제 감정은 그 토대가 되는 자연적 감정 수준을 떠나서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울려 퍼지게 된다. 영혼은 음악을 통해서 “열정의 도취한 광란과 소용돌이치는 소란으로 찢기지 않으며” “기쁨의 환호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움을”[1] 느낀다.
음악이 더욱 자유롭게 되면서 이제 음악은 정신에 봉사하는 음악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처럼 텍스트에 맞추어 무한한 숭배나 경배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음악에서 그 단초가 보이며 바로크 시대 교회음악에서 발전하였다.[2] 여기서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은 상호 균형과 통일을 이룬다.
음악의 내용과 형식 역시 하나로 통일된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형식적 측면에서 “일체의 것은 제어된 형식 속에서 굳게 서로 결속하며” 내용적으로는 무한히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니, ‘정신의 고요’ 와 ‘지복의 평온’이 흐른다.
“고통이 영혼을 아무리 깊숙이 엄습할 경우라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음악들 자체의 향유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복, 판타지의 단순한 위대함과 형상화를 발견한다.”[3]
여기서 음악은 “예술로서 예술의 향유, 자기 만족하는 영혼의 선율적 소리”[4]에 이른다.
“가슴은 … 자기 자신의 청취에 몰입하며 또한 오로지 그럼으로써 마치 순수한 빛이 자기 자신을 보듯이 지복의 내면성과 화해한다는 것에 관한 최고의 표상을 제공한다.“[5]
수반적 음악의 마지막은 오페라와 같은 악극의 형식이다. 이 유형은 근대에 음악이 자립적인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정신적 의미를 벗어나 형식적 아름다움에 심취해 들어간 경향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근대의 절대음악의 출현과 동시에 오페라, 오페레타가 발전한다.
오페라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서창: 敍唱)로 이루어지는데, 아리아는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므로 선율적인 것이며, 음악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서창은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므로, 음악은 낭송에서처럼 텍스트에 대해 종속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말의 특수한 내용이 음의 특정한 길이와 강약 고저에 각인된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이 떠 있는 선율적인 것”과 “말에 대해 최대한 가깝게 맞닿고자 하는 서창적인 것”[6] 사이에서 매개를 달성하고자 한다. 헤겔은 이 매개 과정에서 서창은 분산적이니, 통일성으로서 선율이 항상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그리고 각각의 내용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내밀성에 몰두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통일 속에서 정신화되어 있는 심정의 정조이다. 그런 정조의 자기 표현은 선율 자체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선율적인 것은 … [심정의 정조와] 동일한 통일성이며, 자기 내로 완결된 복귀이기 때문이다.”[7]
4) 자립적 음악
바로크 시대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통일 상태를 지나게 되면, 음악은 정신에서 풀려 나와서 거침 없는 자유 속에서 자립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성악보다는 기악이 중심이 되며, 음악적 선율은 화성의 법칙을 통해 화려하고 풍부하게 전개된다. 이제 음악적 향유는 음악이 담지하는 정신적 의미에서보다 오히려 음들이 자체 내에서 전개하는 어울림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음악의 고유한 형식의 측면은 완성에 이른다. 그 이전 음악은 시문학 텍스트의 강제적 지배 아래 있었고 종교음악에서 제의나 악극의 경우 다양한 연극적 요소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만다. 이제 음악은 이런 비음악적 요소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절대음악, 순수음악이라 불리는 자립적 음악을 추구한 모차르트는 베토벤 등 고전음악을 음악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은 자립적 음악을 완성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이 단순한 기교로 전락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수 음악 또는 절대 음악에서는 음악적 정신적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 되고 심지어 전적으로 결여될 수도 있다. 이런 음악은 정신의 표현으로서 예술을 벗어나게 된다.
음악이 정신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이제 음악은 전문가의 것이 되며 작곡가는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작곡의 재능이 아주 어린 나이에 발전할 수 있거나, 풍부한 재능의 작곡가가 의식 없는 빈곤한 인간의 상태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은 이런 형식적 향유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음악도 예술이기 위해서는 정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 속에 정신적 내용을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출현하게 된다.
“한층 깊은 음악은 기악음악에서조차 내용의 표현과 음악의 구조라는 두 측면에 같은 주의를 기울일 때 성립한다.”[8]
5) 음악에 대한 구체적 평가
헤겔은 음악의 유형을 서술하면서 틈틈이 여러 음악에 대해 평가했다. 헤겔은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관현악의 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모차르트는 예로서만 언급하며, 베토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수반음악 가운데서도 내밀함 감정을 표현하는 종교음악이 최고인데, 그는 마태수난곡과 같이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통해 한편으로 화성악적인 완성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텍스트에 봉사하는 음악을 높이 예찬했다.
같은 수반음악이라도 이탈리아에서 주로 발전한 오페라나 오페레타의 형식에 대해서는 은근히 비판적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앞으로 전개되는 방향은 그런 오페라적 형식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란 장르 자체로만 본다면 이런 기악, 관현악, 절대음악이 가장 순수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헤겔이 절대음악을 최고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 장르의 자체 내 한계 때문에 시문학과 결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헤겔이 예술의 목표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한 불가피했을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서 예술 장르론과 예술 형식론 사이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헤겔에서 음악의 미래는 오페라다. 헤겔이 바그너의 음악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헤겔은 화성악을 넘어서서 시문학에 다가가는 바그너의 음악을 바흐처럼 높이 평가했을까?
[1] 미학강의 3권, 202쪽
[2] 헤겔은 이 시기 바흐를 대표적 작가로 거론한다. 미학강의 3권, 217쪽
[3] 미학강의 3권, 203쪽
[4] 미학강의 3권, 204쪽
[5] 미학강의 3권, 204쪽
[6] 미학강의 3권, 208쪽
[7] 미학강의 3권, 209쪽
[8] 미학강의 3권,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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