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이 최종심급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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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인민이 최종심급

..2024 03 20. – 춘분(春分): 올해 윤년이라 춘분이 3월 20일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보는 역사적 흐름은 사뭇 다르다. 들뢰즈 이야기하기 이전에, 서양에서 역사를 이야기한 이들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있었지만 이들은 역사의 긴 과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당대와 연관에서 교훈 또는 의미를 찾고자 했었다. 그리고 서양의 사상사에 아직도 난점으로 남아있는 크리스토스(메시아)란 용어의 유입은 사유의 역사를 뒤집어 놓았다. 인간의 사유가 유한하다는 것은 어떤 현자나 지식인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원의 역사는 예언자(점쟁이)의 것으로 여겼다. 45억 년의 역사를 지닌 지구가 45억 년 이후에도 영원할 거라는 말은 불경스러운가? 그래서, 백성을 자기들이 가르쳐 놓고는 백성의 편을 든다는 명목으로, 멍청하게도 성직자들은 역사가 신의 뜻에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역사가 자연의 흐름과 같은 방향에서 전개된다고 여기는 것은 드물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신화를 배격하면서 또는 어린이 교육과 같은 훈육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있어왔다. 상식을 벗어나 양식으로, 양식의 한 길과 다른 길이 있다는 다음 측정의 길도 제시되었다. 자연의 이법(la raison)과 흐름에 신의 통일성과 영원성과는 다른 길이 있다고 여긴 것은 오래되었지만, 과학과 실험을 통해 증거를 제시한 것은 “빛의 세기(les lumières 18세기)” 이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파라노이아에 갇힌 완고한 성직자는 – 세계는 6천4백 년 전에 신이 창조했다고 믿지는 않더라도 – 자기의 이익과 지위를 위해 신도들에게 온갖 등록된 문자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증거하면서 설교하고 있다. 신천지도 그렇고 전광훈은 또 어떤가?

자연의 이법조차 신의 의지인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린 그 종교의 성직자들의 완고함 때문에, 과거의 현자들도 상식(오관을 통한 인식)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서 오래 살아온 농민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경우에 떠돌이 현자(유목인)는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대부들과 논쟁한들, 그 사대부 또는 지배층은 백성이 믿는 대로 따라야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고, 지배와 사적 이익 유지에 골몰한다. 그런 가운데 몇몇 현자들과 지자들은 변증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야기했지만 19세기 중반의 생물학과 열역학 이전에는 선방에서 선문답을 하듯이, 그저 유머나 풍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모한다.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적으로 솟아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양사상사를 생각해보면, 하늘이 열리고(부르노의 무한), 또한 바다의 길이 열리면서(갈릴레이의 동시성과 진자),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빛”이었다. 빛이라는 광원은 경험적으로 분명히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멀어지면 어두워지는데, 어째서 태양에서 오는 빛은 지구 전체에 평행으로 올까? 그리고 거리와 관계없이 동일한(동등한) 방식으로 비출까? 신의 의지가 보편이고 전지전능이라고 하면서 빛도 신의 것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미 자연의 이법은 신과 별개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 신은 실재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겁주기 위한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진실로 빛은 생명을 살리는 원인에 속한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식물도 죽고, 동물도 병들다가 간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빛이 만물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빛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누구의 신앙의 주장으로 자기의 것(전유)으로 전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모든 지역에 골고루 비춘다(물론 북극과 적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증거에서 밝혀야 한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널리 알려졌다.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은,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경험적 증거여야 한다. 그 증거의 가장 큰 난점이 성령의 육신화였다(부활이니, 재림은 육신화가 가능해야 나올 수 있다).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기적과 은총으로, 그런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현자가 그러면 너가 한번 해보라고 한다.

마치 화두를 지닌 선승이 선문답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해보라고 하듯이, 그리스 철학에서, ‘그래 여기 지금 뛰어보라’고 하듯이, ‘다음 섬에 가는지를 보자’ 이런 이야기에 대해 현실과 세상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움직이는 과정이 필요한데도, 과정을 제거하고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달나라의 토끼와 계수나무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자가 기적과 은총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 기적과 은총을 한번 맛본 자가 경험적으로 다시 구현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는 것, 죽어서 기적처럼 살았다는 것을 긍정하는 현자가 성직자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라고 하면 아무도 실행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그 성직자의 증거는 본인의 증거인지는 몰라도 세상사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예를 들어 당나라 6조 선사 혜능 주변과 그 이후로도 너무나 많다. 서양에서도 보나벤투라와 아퀴나스의 변증법적 논쟁과 중국 선종들의 그 많은 논쟁들과 맞대응 시켜서 생각해보시라. 우리 시대에 공부가 적어서 그렇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박홍규(1919~1994) 선생의 말씀처럼 이 나라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난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를 핑계 삼아 자기를 제외하고 그 약점을 꼬집는 이들이 황제와 그 주구들이다. 이미 12세기에 생긴 대학에서 교수들은, 이런 등록된 문자를 근거로 하는 학설들이 자연이 지구상에 새겨 놓은 이야기에 비하면 하찮은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미니크파에 반대하는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들(불교의 이판 선사들 비슷한데)은 학설이 문자와 그 철학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면서 과정을 거쳐온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인간은 여전히 신의 역사 속에 있었다.

표면의 밑에서는 자연의 이법과 인간의 인식이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감지하고 있으나, 만약 발설하면, 마남 사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수도사들은 그들 속에서만 문헌에서 문헌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쯤에 ‘역사’는 신의 역사든, 신화의 역사든, 문자로 등록된 서사의 역사 등과는 다른 기나긴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깊이 과거로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 없기도 했지만, 감히 신의 역사를 벗어나 자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브루노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겁을 먹고 있었다. 18세기 빛의 시기에, 대학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자연의 이법을 생각하고 기록한다. 백과전서파들이 대학교수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장소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즉 같은 해에 태어난 린네와 뷔퐁은 과거에 벗어나서 자연의 모습을 달리 기록했다. 린네는 오랜 관습대로 형상(꽃모양과 열매)을 중요시 했고, 뷔퐁은 생명체가 자라는 과정을 중요시 했다. 이는 자연을 서술하는 다른 방식이었다. 자연은 어쩌면 빛처럼 여러 갈래로 생명체와 삶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나 쥐시외에서 뷔퐁으로 이어지는 자연에서 생명의 생성과 형성 과정의 이야기도 신의 말씀(명령)에 어긋나면 표면 밑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의 생물학과 진화론이 표면 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 생물학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지구도 자연 속에 등록된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층이든 유전자든. 어느 성직자가 인류 역사 6,400년이라고 기록된(문자로 등기 된 경전) 것으로 증거 했다고 한들 –

서구에서는 지구가 둥글다고 바다로 나간 자들이 중국의 문화를 알면서 놀랐다고 한다. 공자라는 인물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서 놀라, 독일의 볼프나 이탈리아의 비코는 달리 사유를 했다. 신이 없는 지역에서 신을 믿는 유럽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보았던 것이다. 유럽은 같은 크리스토스를 믿는데도 엄청난 전쟁과 혼란을 겪는데 비해, 중국은 신 없이도 매우 높은 도덕과 제도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데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비코가 물론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흘러간 역사의 큰 줄기들이 있다고 달리 생각했다.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 즉 신정체, 귀족정체, 인간적 정부가 있다고 생각했다. 후대의 사학자들 중에서 미슐레 같은 사학자는 비코(Vico, 1668-1744)를 역사학의 창시자로 꼽는다. 비코의 활동 시기도 자연의 이법(la raison)인 빛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확장은 프랑스 사회학의 창시자인 꽁트(Comte, 1798-1857)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인간의 진보에서 있어서 우선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서 실증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런 진보의 사유는 신의 명령(계율)과는 다른 시대에서 달리 사유하기에 여기에 들어섰음을 알린 것이다. 이 계보에는 맑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프랑스 사상가들은 인류가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실천해 봤다. 이런 노력의 일부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도, 소련의 콜호스, 이스라엘 초기의 기부츠에도 있었고 쿠바의 자생적 경제에도 있다. 농본 사회인 프랑스와 달리 산업사회의 산업가가 주도세력인 영국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산업과 상업이 국가의 부와 인민의 안녕과 편리(유용성)를 가져다준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상층의 사고논리의 허구를 뚫어본 맑스는 과학적 공산사회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발전은 원시공산사회, 고대 황제(참주)제의 노예제, 중세 영주의 봉건제, 근대 산업사회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그리고 플롤레타리아(인민)가 산업도구를 지배하는 공산사회로 나갈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발전적 역사관은, 역사는 흐른다는 관점을 통해 어떤 진보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발설하고 정리해 나간 비코의 『새로운 과학』(1725)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까지 겨우 300여 년이 지났다. 맑스로부터 150년 정도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인간의 역사를 신석기 시대가 시작이라 치더라도 만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비해, 길게 잡아도 300여 년 사이에 인간의 역사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생겨났다. 서양사상사에서 달리 생각하기란, 어찌 되었건 문자의 등록, 청동기든 철기든 간에, 도구의 활용과 전유, 통치의 체제, 정치제도 등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가타리인가? 바로 인류 삶의 과정은 자연의 입법(la raison)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흥미롭게도 만년 전부터 하나의 사물이 도구와 무기라는 양면성을 지녔다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생성체는 양면성(다양체)이상 일 것이다, 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스키조가 기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도구 사용이든 무기 사용이든, 자연(지구 위에서)에서 토지와 토지 위에 식물과 동물, 즉 재배와 사냥에 연관된 것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류에게서 도구/무기라는 과정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고, 그리고 도구/무기를 통한 생산력의 발달은 제도 또는 체제를 갖추어 집단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 집단에 우두머리 또는 참주의 등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두머리든 참주(황제)든 어떻게 있어 온 것인지는 역사 이전에는 유적이 말할 것이나, 도구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철기문화가 인민들에까지 통용되기 전까지는 참주의 시대가 지배적이라고들 한다. 참주제에서도 인간이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런 감성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와 물(강)을 통한 생산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토지 생산에서 철기는 생산력을 높여주었고, 참주는 무기의 사용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참주에 맞는 제도를 만들었다. 들뢰즈는 참주가 – 아마도 무기 생산을 쥐고 있는 대장장이와 우두머리의 결탁이라 여긴다 – 갑자기 도래했다고 한다. 그 참주(황제)의 시대에 인민은 제도와 관습을 몸에 각인하고 살아야 했다. 문자가 지배적이 되면서 상층은 각인된 문자에 의해, 모르는 인민을 제도하고 명령하면서 터전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또는 욕망하는 존재자들인) 인민은 삶에서 토지의 능력과 배려(기후이지만)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제도로서 참주제는 성의 높이와 넓이로서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인민은 그 지배력의 바깥에서 삶과 활동을 이어갔다. 토지의 시대에서 참주는 자연의 변화와 인민의 흐름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단지 강압적으로 몰살하는 것을 규준(코드)으로 삼았다(얼마나 많은 참주가 도시를 불 싸지르고 멸망시켰던가?). 참주제가 세습을 한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참주제는 제도의 확장과 균형을 맞추어, 상부층(행정력)을 구성하는 군주제로 변환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이런 군주제에서, 18세기 절대 왕정에 이르기까지 또는 19세기 짜르(또는 영국의 빅토리아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이르기까지 전제정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토지의 지배력 때문일 것이다.

토지의 산물과 교환의 한계를 넘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의 생산물들은 노동력의 투여 이상의 것을 생산하였다. 이것을 잉여라고 부른다. 잉여생산을 소비하는 대상을 찾는 것이 식민지 개척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사회의 100여 년은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며, 참주제의 변형으로 국가의 등장 시기이며, 국가의 군대를 통하여 식민지를 수탈하였던 것이다. 토지의 기나긴 시대를 지나, 군주제(참주제가 아니라)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제도 시대로 전환하였다. 서양 사상가들 중 일부는 인간의 행복과 자유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선전하였지만, 그것은 상층부의 상업과 수탈의 자유이며, 식민지 인민에 대한 억압이었다. 참주의 폭력과 달리 국가의 억압은 산업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과 의료, 군대와 감옥이라는 훈육제도를 체계화 하였다. 이로부터 인민에게 억제를 심었다. (니체는 긴 종교사의 분석에서, 참주시대의 원한을, 크리스트교의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서는 신자들에게 원죄를 심었다. 전기의 억압에서 후기의 억제로 바꾸었다. 국가는 억압에서 억제로 바꿀 것이고, 억제에서 프로이트가 등장할 것이다).

서유럽은 이런 과정을 여러 세대를 거쳐서 조금씩 변화하였고, 두 차례 대전쟁 과정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의 재패로서 “제국”을 형성한다. 달러라는 제국을. 양차 대전이 이후 질서의 재편에서 과거의 생산도구의 장악(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지배(제국의 탈코드화)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설명을 간단히 보면, 토지의 시대, 국가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요약된다. 서양이야 이런 시대를 오랜 역사, 몇 세기, 몇 세대를 거치면서, 과정의 과거와 현재라는 단계들이 있는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묘하게도 토지의 시대에서 중국의 참주제와 연관 속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다가, 19세기 말에 갑자기 산업사회가 일제로부터 들이닥쳤다. 마치 토지 제도 위에 참주가 침입하듯이, 제국주의가 지배하였다. 이런 역사적 비극이, 특히 남녘의 120년 굴곡의 역사 속에 있다. 일제 참주제의 식민지 총독이 나가고, 미국이란 제국이 들이닥쳤다. 인민이 스스로 흐르는 과정 안에서 세대를 거쳐서 삶의 터전을 각인하고 제도로서 등록하기도 이전에, 참주와 같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군대가 상부에 자리를 차지하고 명령과 억압을 한 것이다. 인민이 일제의 각인에서 제도 방식을 우리 입말로 등록할 수 없었지만, 이 다음에 우리 입말을 세우기도 전에 상층에서 영어가 지배하고 명령하는 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인민이 스스로 등록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미군정은 일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입말과 등록을 허용해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영어 규준과 코드에 맞게 정리하고 적용하게 만들었고, 자본의 전유처럼 사고에서도 전유하게 되었다. 즉 우리 입말은 영어의 하부로서 토지에 사는 인민의 보조물일 뿐이었고, 요상하게도 외래 종교의 경전이 이런 지배방식의 중심을 이루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보다 더 많이 교회를 세웠다.

들뢰즈가 말한다. 참주는 하나(지배방식)가 오고 그리고 갑자기 모든 분야에서 참주파들이 들어와서 장악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골짜기에도 교회가 생기는 것으로 보아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제국은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토지체에서 산업화로 전향시켰는데, 산업화의 방식이 일제의 잔재와 같은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참주는 일제 제국주의 시대에 인민을 전쟁물자 생산의 도구에서, 미제 제국의 산업화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토지의 인구를 산업화의 도시로 몰아가면서 제국의 식민체제는 제도상으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관점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 곤륜산맥에서 환시대로부터 단군세기라는 고조선의 시대는 토지의 시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좋은 토지를 찾아 온 종족들은 동쪽의 땅이 살만하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적어도 삼국의 시대에는 철기를 잘 다루는 쪽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고, 산맥들로 분리되어 있는 토지에서 황제제가 아니라 서양의 영주들과 군주제에 맞닿아 있는 고려시대의 군주제에서, 유학의 제도와 상층의 사대부 무리들이 형성되면서 조선시대의 군주제를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이런 군주제는 토지를 토대로 하였기에 인민의 소중함도 그나마 느꼈을 것인데, 말기에 상층의 주도세력(majeur)이 인민의 흐름에서 벗어나 일제에 협력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부역하기에 이르면서, 우리 스스로 근대화와 부르주아 형성의 길을 놓쳤다고들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라 한다. 그래도 상층의 일부와 인민들도 일제에 부역하지 않아서 입말과 삶의 등록방식이 그나마도 남아있었고 해방되었다.

미제에 부역하는 자들이 입말을 영어로 바꾸기 위해 우리 입말을 살려두는 척하면서 제도를 제국의 하부제도로 변형하였다. 일제와 미제의 방식을 우리 스스로 수용하거나 또는 우리 방식으로 변형할 시간과 노력을 갖기도 전에, 이미 일제에서 익숙했던 상층의 부역자들이 미제로 사고방식으로 갈아탔다. 이 갈아타기는 기독교를 이용했다. 영어란 곧 크리스트교 경전의 영어가 언어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말도 그 번역어가 주인이 되었다. 지식인들은 우리식(?)으로 진리와 학문의 발전을 위한다고 일본에서 서양으로 갈아탔지만, 자기 터전 없는 지식은 독일식에서 미국식으로 바꾸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미국은 독일지식인을 수용하여 만든 도구주의 입장을 미국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독일식에다가 영국 공리주의를 보탠 미국식 철학을 만들었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서울대가 렘프레이트의 “철학사”를 번역한 것도 같은 일방향(bon sens, 양식)이다. 이런 제국으로서 미국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일제와 미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우리는 자연의 이법 속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뭣”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환과 단의 나라, 고조선의 이야기기를 지층을 통하여 창안하고, 불교 천 년과 유교 오백 년의 이야기도 우리 토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을 이어가면서, 새로이 전개되었던 20세기의 근대화를 넘어서 21세기 규소의 시대에 맞는 입말과 문화, 여러 학문들을 흥미진진하게 혼성(조성, la composition))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과정에서 행복도 찾을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훌륭한 인물들과 호걸과 군자들도 만날 수 있으며, 현자와 선인도 배출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것이다. 그런 시기가 도래했다. 과거의 한문으로 된 우리 이야기를 더 많이 번역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또 생산하고 창조하여, 흐름들을 연결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무능하고 사적 이익만 챙기고, 강압적인 윤석열이라는 인간이 얼치기 참주 짓을 하고 있다. 뭐, 세상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윤석열은 박근혜의 무지하고 무능함, 이명박의 이기적이고 사악함, 전두환의 기괴함과 요사함을 겹쳐 놓은 인물이라 한다. 이를 퇴진시켜야 한다. 선거라는 소환권을 가지고 끌어낼 수 있는 기회이지 않는가? 인민은 언제나 토대이며 최종심급이다. 항상 소환권이 있어야, 참주가 아닌 착한 위정자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데 소환권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력인가? 그래도 지금까지 120여 년 동안에 우리에게 각인된 것과 등록된 것을 많이도 메꾸었다. 이것들을 엮어서 혼성하면서(composer), 우리 스스로 제도 상 필요한 인물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인민은 토지와 같은 토대이기도 하고, 인민이 산업과 기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도 하고, 산업사회와 제도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든 공산사회든 이루어질 것이며, 이런 노력으로 만든 체제에서, 프랑스 혁명가인 루이 블랑이 말했듯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서, “필요에 따라” 필수품을 받는 즐겁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학습 수준과 노력하는 활동은 이런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누가 이 나라에 눈 먼 돈이 많다고 했는가? 그 말하는 자가 도둑이며 악마이다. 우리 전통에는 청백리가 있고, 서양에서 귀족의 의무(노블레스 노블리제)가 있다는 것은 신의 세계 또는 신앙과 무관하다. 제국의 원리가 있다고 가르치는 크리스토스 신앙은 서양에서도 서서히 물러나고, 세계사의 부분으로서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가 바뀌고 있듯이, 규소의 시대에 걸 맞는 삶의 터전과 체제를 새로이 혼성(다양한 분야의 조화로운 협약과 연대)해서 만들 능력과 재원이 인민들에게 충분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권능으로 상층의 억압 된 표면을 뚫고 솟아나는 용출선, 곧 저항이다. 이런 저항들이 용출선을 변곡점으로 만드는 것도 인민이다. 인민이 스스로 변곡점의 마루를 만드는 것이 혁명이며 최종심급이다. 혁명의 미래를 성취한다고 말하는 자는 사기꾼에 가깝고, 들뢰즈가 보듯이, 혁명은 과정이며 변화이다. 어쩌면 조국혁신당이 이 시대의 용출선처럼 표면 위로 솟아났다. 문화에서도 삶의 터전에서도 용출선이 도처에서 솟아나고,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변곡점을 거치는 과정이 변혁(變革)이며, 이 변역(變易)에 수적으로 다수이나 권력 상으로는 소수자가 인민이 있다. 벩송은 자유가 간헐적으로 솟아난다고 했는데, 들뢰즈 식으로 보면 혁명은 간헐적으로 솟아나 표면을 매끄럽게 흐른다.

인민이 스스로 일어나는 저항, 항거, 봉기, 혁명은 인민의 미덕이다. 이를 혼란, 소요, 사태, 반역이라고 강압하고 억압하는 체제는 사악한 체제이다. 현대에서 이런 못된 말을 하는 자들은 마남사냥의 시대에서 교황청보다 사악하고 기괴한 악마들이다. (5:25, 57NLIJ: 6:36NLJ)

***덧글 ***

# 달리 사유하기.

오늘 점심시간에 언론을 보니, 도주 이종섭의 귀국과 회칼 황상무의 사퇴를 건의한 것이 한동훈이라 한다. 그리고 한동훈은 민심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인민이 최종결제권자임을 무시하고는 민심을 반영했다고 한다. 인민은 토대(심층)이자, 최종심급이면서도, 심급의 과정에서 범위를 확대해가는 결재권자이다.

윤석열은 참주행세를 한다. 참주도 아니면서 말이다. 참주(황제)는 제국을 가진 쪽에서 참주이지, 결제 받고 지배 받는 나라에 참주란 없다. 그는 참주의 지시에 따른 식민지 지배의 총독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 총독이 자기 나라를 제국에 맡기려는 점에서 부역자이고, 이 나라를 제국에 넘겨주는 자들은 매국노들이다. 윤석열은 부역자 또는 매국노의 길을 갈 것인가? 인민이 이를 소환하고 심판하는 최종심급에서 그의 지위를 박탈할 것인가? 박탈과 더불어 친인척의 부정 취득의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인민의 손에 달려 있다. 극우들은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제국의 부역자이기에, 심판대 위에 세워야 한다.

반영이란 중국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뜻으로 물 그릇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監)이라 하고, 역사를 통시태로서 흐름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거울을 보는 감(鑑)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이 관리 등용의 과목으로 나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유럽의 중세에서 비추어 보는 것을 스뻭뀔라시옹(speculation)이라 하는데, 사변(思辨)이라 번역했다. 스뻭뀔라시옹은 라틴어 스펙쿨라시오(speculatio)에서 온 (크리스트교 지배하의) 중세의 용어이며, 관찰하다 또는 거울에 비추어보다는 의미라 한다. 상층(재배층)이 심층(인민)을 내려다보는 것이 관찰과 거울 비추어보기인 셈이다. 한동훈도 그 용어를 썼다는 의미에서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 지배 하의 방식을 드러낸 것이다. 인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겸허히 그에 따르겠다고 해야지. 조선시대 용어로 이종섭을 압송하고 황상무 파직해야지.

인민이란 용어는 로마시대 네 구역 중의 하나에서 생긴 용어라고 하는데, 다수의 인민(권력의 소수자)은 황제(참주)제에 묻히어 표면 밑으로 침잠하여 흘렀다. 성직자들이 인민을 졸로 보고 십자군을 독려하던 시대에, 프랑스에서 알비파의 거센 저항에서 있었으나 도시 자체가 몰살당했다(19세기의 중국에서 마치 태평천국의 항쟁처럼). 표면으로 저항과 항거는 르네상스의 지식인들, 브르노와 갈릴레이에게도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인민이 표면 위로 오른 것은 “빛의 시대(Les Lumières)”(계몽으로 번역한 것은 인민을 교화의 또는 훈육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이다. 즉 빛이 신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의 보편편재라는 실재성을 깨닫는 시대에서야 가능했다. 사회에서 또는 제도에서 보편편재는 인민에서부터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인민이 수적으로 다수이지만 폴리스(성내에서)의 사대부 또는 부르주와에 비해 힘이 없었기에 소수자(mineur)라 불렸다. 통시적으로 인민이 인구 수에서 소수인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역사적으로 그 인민이 빛의 보편편재의 실재성을 드러낸 것은, 지식분자들이 제3신분임을 자처하였고,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키면서 가능했다. 이 혁명의 4년을 지속하고, 다수자(majeur, 귀족층)에 의해 역전 당하고 난 뒤, 인민은 또 다시 표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4년 이후 표면의 균열을 내고 나온 용출선이 있었으니, 바뵈프(Babeuf, 1760-1797) 등이 결성한 “평등당”이었다. 이들도 혁명파들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후로 소위 말하는 저항운동의 조직체(여러 계절사)들이 있어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극우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인민(소수자, 인구의 다수)의 흐름은 계속해서 흘러, 프랑스 19세기는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이 과정들은 인민의 ‘반영’이 아니라, 인민의 저항, 분출, 항쟁, 발산, 혁명이었다. 프랑스에서 누가 감히 소요니 사태니, 반역이라 말하겠는가?

여전히 구체제 또는 참주제의 잔당에게는 인민의 발산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정지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인민은 빛처럼 움직이며 펼치고 퍼져간다. 그 인민은 심급의 과정이기도 하고, 결국에는 최종심급이다. 이번 총선에서 인민의 결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인민의 역사적 과정은 계속 중일 것이기에, 5년의 권력 윤석열과 그 하수인들이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안다. 인민의 결제가 대선, 총선, 지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재권뿐만 아니라 소환권, 헌법 제정의 발의권까지 인민이 언젠가는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인민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며, 빛의 보편편재처럼 인민의 권능 발현은 인간이 각성해 감에 따라 이루어지리라. 그 각성 속에 자유가 있다. (8:09, 57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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