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Spread the love

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

 

1)

헤겔은 예술 장르를 질료의 특성으로부터 도출한다.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조각의 질료에 관해서 앞에서 건축과 비교하면서 간단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덩어리[Mass]이며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이었다.

반면 조각의 질료는 질적이고 규정적인 물질성[Materialitaet]이다. 조각은 덩어리가 지닌 물질적 특성을 이용해 정신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돌과 나무와 같은 사물이 지닌 자연적 특성 자체가 그 형상화의 수단이 되고 있으니, 헤겔은 조각의 질료를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조각] 예술은 질료 속에서, 그것도 그야말로 직접적인 질료 속에서 정신적 개별성의 현상을 형상화하도록 요구 받는다.”[1]

 

물질성과 덩어리는 동전의 이면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떼어낼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건축적 질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듯이 조각적 형상은 일정한 연장성과 공간성 안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건축적 공간이 그 외면적 형태에 상응하듯이, 조각 작품은 그것의 질료인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이 공간은 주변의 환경 즉 조각이 세워져 있는 주변 공간으로까지 확장되며, 주변 환경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헤겔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조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해야할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미학강의 2, 380쪽)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원래(1546년경) 피렌체 대성당에 세워지는 12개 성서 인물상 중의 하나로 아고스티노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 후(1501-1504) 미켈란젤로가 이를 다시 다듬어 완성했다. 완성 후 세워질 장소에 관해 원래 장소로 가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가 피렌체 시청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 피렌체 도시 내 벌어진 메디치 가문과 공화파 시민 사이의 갈등에서 민주파의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주파는 다비드 상을 시청 앞에 세움으로써 독재에 대항하는 시민 정신을 상징하게 만들었다. 만일 다비드 상이 원래 인물군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아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2]

 

2)

조각의 질료가 지닌 성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각의 질료를 다시 회화적 질료와 비교해 보자. 조각의 질료가 구체적 물질성이고 이 물질성은 입체적 공간 속에 들어 있다면 회화의 질료는 단적으로 평면 위에 출현하는 색채이다.

색채는 빛에서 나오는데, 헤겔에서 빛은 물질이면서도 자기 내로 복귀한 물질적 중심, 자아이다. 이런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되어 나온 것이 색채이다. 색채가 존재하는 평면은 입체적 공간을 추상화한 공간이며, 조각에서 공간과 물질성은 상호 무차별한 것이지만 색채는 그 평면과 내적으로 합일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조각이 구체적 물질성을 질료로 하므로 더 구체적 형상화가 가능하니, 정신을 더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헤겔은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사물인 한 그만큼 다루기 힘들며 실체적 정신의 일반적 측면을 표현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따라서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주관적 정신, 개인마다 특칭적인 정신을 표현하기 힘들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는 회화가 조각보다 더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조각의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자기 내로 복귀한 빛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으로 다양한 색으로 분화되고 다시 하나의 빛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색은 분화와 통합을 통해 다양한 조합을 형성하면서 형상화를 이루니 여기서 색채의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개인의 주관적이며 구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헤겔은 조각의 질료와 회화의 질료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각의 대상은 형상이지만 이 형상은 사실상 구체적 인간 신체의 추상적 측면에 불과하다. 그 형식들은 특칭화된 색채와 행동들의 다양성을 갖지 못한다.” “조각은 이 점에서 회화에 뒤쳐진다. 왜냐하면 회화에서는 정신의 표현이 안색과 그 명암을 통해 한층 규정된 압도적인 정확성과 생동성을 얻기 때문이다.”[3]

 

3)

눈의 시선과 색채

조각의 질료가 건축적 질료와 회화적 질료가 구분되는 구체적 물질성[Materialitaet]에 있으므로, 이런 질료적 특성으로부터 조각적 형상화의 독특한 가능성이 제시된다.

조각적 질료는 그 자체 구체성을 지닌 것이므로 건축과 달리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이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는 것과 달리 그 의미를 자기 속에 지니게 되며 조각적 형상은 정신의 현상 즉 닮은 꼴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건축은 상징적 예술이라면 조각은 고전적 예술이라고 한다.

조각적 형상화는 회화에서 나타나는 형상화와 구분된다. 회화적 형상화에서 형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반면 조각적 형상화는 형상은 정신의 닮은 꼴 즉 현상이므로 그 자체가 정신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조각적 표현은 외면적이라고 말한다. 즉 “정신에 속하고 동시에 정신을 표현하는 신체 속에 정신이 고유하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조각 작품 속에서 정신의 외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지, 조각 작품을 통해 정신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반면 회화의 경우 감상자는 작품을 넘어서 그 정신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

 

[조각에서] “정신은 그 속[외면성]에 주입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면성에서 자기 안으로 철수하여 내면으로 현상하는 것은 아니다.”[4]

 

이런 차이점 때문에 헤겔은 조각에는 눈의 시선이 결여된다고 말한다. 조각에서 눈은 영웅의 눈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뿐이니 굳이 눈동자를 그릴 필요는 없다. 눈동자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로이며 내면이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각의 눈은 닫혀 있고 시선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회화에 이르게 되면 눈동자는 모든 나머지 신체가 자기를 넘어 복귀하는 지점이며, 그것을 통해 정신이 쏟아져 나오므로 눈동자는 열려 있고 시선이 빛을 뿜는다.

 

“조각의 형상에는 … 눈의 시선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조각 형상이 가시화하는 정신은 신체에 잠긴, 그리하여 전체 형상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신이기 때문이다.”[5]

 

조각에 시선이 없다 할 때 그런 조각은 대체로 고전적인 조각에 한정된다. 근대에 들어와 조각은 주관적 특수한 정신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이런 경우 조각은 다시 회화에 가까워지면서 눈동자가 등장하게 되니,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눈동자가 따로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다비드 상의 눈동자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그의 눈동자는 눈동자이지만 그저 영웅의 눈동자를 닮은 외면적 가시적 눈동자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에서 눈동자와 시선이 없다는 헤겔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 미학강의 2, 379쪽

[2] 참고로 지금은 보존을 위해 원본은 우피치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본이 시청 앞에 놓여 있다. 피렌체 외의 지역에도 복사품이 다수 존재한다.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384쪽

[5] 미학강의 2, 385쪽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