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말하기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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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기

–셋 또는 아홉으로 갈라지는 선들 중의 하나의 선을 만들며

2024 02 19 우수(雨水)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절후이다.

옛날에 나 어디서 태어났냐고 꼬마가 물으면 아저씨들과 할배들은 놀리느라 농담 같은 이야기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다리 밑에 거지들이 너의 아버지야’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네 엄마를 비하’하는 내용 의식이 숨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여성의 지위를 거지처럼 여기는 의도도 있지만 사실 여성의 다리 밑에서 태어났다는 비유도 함축하고 있다. 예전에 가까운 어떤이를 두고 내가 알기로는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왜? “그의 할배가 만주에서 개장사를 했지?”라고 나의 속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래 개장사 한거야, 아직도 저러고 있지’라는 대답에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고로… 정도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청년 기를 지나 과거 역사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였다. 사람들은 왜 ‘만주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개장수를 했다고 했을까? 더욱 나이가 들어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농담조의 비유처럼, 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호명할 때 개장수라는 비하의 방식만이 남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재의식(무의식)이 궁금해 프로이트를 읽으면서도 ‘개장수를 하면 했지,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 빌붙지는 않았다는, 그들에게 예속된 삶을 살지 않으려 했을 진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와 터전에서, 그들은 엿장수나 하면서 살거나 또는 각설이로 나섰다는 풍자로_막걸리 타령으로 시름을 달래는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일흔이 가까워서야 풍자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진솔한 사유를 하는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의미논리”를 쓰면서 정신분석학적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할 것인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달리 말하기를 대하 소설처럼 쓴 것이 “앙띠 외디푸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개장수라 말하지(부르지) 아니하면, 공산주의 운동했지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말 못하는 사정은 무엇인가? ‘그 놈의 참주 외디푸스 때문이야’라고 두 철학자는 말한다. 달리 말하기, 그리고 그에 맞게 진솔하게 사유하는 길은 무엇일까? 토지와 자연, 그 위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대하를 넘어서 대양의 소설을 쓴 것이 “천개의 고원”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살기, 혁명하기이다. 그래 빨강이다 왜, 파랭이 자식이….

   풍자를 하면서 자기를 빼고서 말하는 자조적 이야기가 파라독사라고 엘리스의 이야기를 비추어 누누이 말한다. 하늘나라에 환인과 환웅이 있다는 이야기도 파라독사이고, 극락에 미륵보살, 관세음 보살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이고, 천당에 베드로와 요한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라고 캐럴이 “훌륭한 나라 엘리스”에서 말한 것이다. 자기를 빼면, 또는 단 하나의 예외를 두면, 김건희든 윤석열이든 하나의 예외를 두면, 호롱 속에 지구를 담을 수 있고, 아라비아 이야기처럼 램프 속에 마왕도 담을 수 있는 것도 파라독사이다. 삶은 하나의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를 수학적 증명이 아니다. 그 증거는 한번 있었는데, 또다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가? 어느 생명체도 죽고 난 뒤에 다시 산 증거는 없다. 수학의 증명은 다시 할 수 있다. 이 증명과 증거가 다르다. 신의 현존은 증명(demonstration)이 아니라 증거(prouver)라고 되어 있은데 요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그게 거짓말쟁이들의 장난이다. 그 장난을 알아차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온유하고 인내하며 등으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지 아무르가 아니다. 아가페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 주면, 어디에 교회라는 그런 건물과 재산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네들의 사기꾼 같은 이야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현존과 증거를 입말로 하자는 것이다.

   현실의 고달픈 삶에서 제도에 복속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게다가 현실적인 삶에 동의하며 합류하기에도 마땅찮았을 것이다. 구속의 동네를 떠나서 사는 것이 개장수가 아니라 엿장수이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여 각설이로 나섰다는 이야기는 과거를 회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도 없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조일 것이다. 그나마도 민중신앙이나, 무당이나, 불교 같은 공동체 의식이 남아있는 것조차, 엿장수처럼 되었던 것은 토지체의 삶이 아니라, 기계 체계(기계체)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산업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민이 일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제도화되고 연쇄적 고리들로 연결된 기계조립 과정의 부속이 되지 않으면, 낙후되거나 게임에서 진 패배의 그늘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대화 과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기개와 의리가 남아서 전국의 호걸과 현자인 척하며 거지로 나섰다는 인물들 사이에 연결이 있었으리라. 이런 이들의 저항과 항거가 역사에서 있어왔다. 이들이 입말을 하지 않으니 개발싸게같은 파랭이 자식들이 빨갱이니 친일파니 이승만이니 박정희 같잖은 소리를 한다.

    유일신앙의 종교들이 시골 골짜기 구석구석에까지도 스며들어 대종교, 무당(몸주가 단군), 불교 등을 마치 악마들처럼 몰아내고 토지와 터전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 새 학문을 배우게 하면서 지역과 사회를 서양근대화로 만들려고 하면서(게다가 악마화하면서), 불교 천년과 유교 오백년을 무시하고 잡 사상을 버리게 하기에 6,400년 역사를 달달외게 하고 졸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취직도 하여 산업사회의 장점과 변화를 따라가 근대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대화에는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일제가 참주(외디푸스)처럼 들어와서 4,500여 년 역사를 깡그리 다리 밑 거지처럼 만들고 산업과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들로 취급했으며, 미제는 한 수 더 떠서 우리 역사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인디언을 몰아내듯이 하고 있다. 일제의 부일파와 미제의 숭미파 속에서 개장수나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부일자들과 숭미자들은 해방 공간의 우선 일제의 잔재들(부일파와 종일파)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후에 산업화에서 일제의 구식 산업화를 미제에 맞게 신식으로 바꾸어 놓았다(숭미파와 모미파). 이런 부류들이 21세기에는 이명박근해와 윤석열 정권에서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기에 입말은 제국의 언어가 아니다. 이미 훈민정음에서 말했다. 나라 입말(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라고 말이다. 입말은 대상화가 먼저가 아니라, 삶에서 일반화가 먼저이다. 삶에서 훌륭타와 탁월하다는 역사에서 영웅과 천재라는 대상과 다르다. 증명이 아니라 증거는 삶에서 일반화이다. 이런 의미를 도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제와 미제를 거치면서 도덕성이 밥먹여주냐고 한다. 이런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부역하고 있는가 숭배하고 있는가. 고교생들의 수능에서 사유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대상으로 지적하게 한다. 이렇게 식민지 지배에 노예처럼 살게 하는 것이 논리학의 체계이고, 그 논리학에 맞는 지배방식이 제국의 황제의 체제이다. 이에 굴종이 살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론이다. 의미가 포장의 기술이 아닌가, 삶에서 기호가 발현되는 것과 전혀 다른 길이다.

   포장의 기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있었지만, 당대의 스토아 학자들이 삼단 논법의 항들은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비판 했을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상위 류의 개념이 상징 또는 사고 추리의 극한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반화의 개념을 소쉬르가 기표라고 했을 때, 이미 상징, 개념, 용어, 항목은 현실의 경험에서 있는 실재하는 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실재가 아닌 용어나 항목이 현실적 대상인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 천국이니 천사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이 현실에서 “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상상이며, 추상의 항들은 공상에 가깝다. 그 망상을 진실인 것처럼 은폐하기 위해 쓰는 용어가 초월이라는 단어이다. 초월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초월적 현존이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음으로 만드는 재주는 자기를 제외한 황제(외디푸스)의 것이며, 오로지 예외적인 신이란 용어에만 속한다. 상상을 넘어서 추리하는 극한은 망상이다. 누군가가 우주의 넓이가 25억 년 광년의 거리라고 하면서 실재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상상의 극한이고, 그 극한을 넘어서는 “뭣”이 있는데 라고 물을 때, 그 언어와 과학의 논리가 추리를 넘어서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도구와 상상 때문이고, 과학적 도구의 한계라면 수긍이나 가지만, 상상의 한계는 그보다 훨씬 넓고 멀고 깊다.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추리하는 사고는 망상으로 치닫는다. 망상이 망상인 줄 한계 지우면 상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망상을 실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또는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상징 또는 기표로 불렀고, 그 기표에서 가장 크고 넓고 높은 것이 신이야. 이게 망상이야. 들뢰즈가 좋게 말하여 파라독사라고 해서 그런 소리 그만하자는 정도로서, 그런 정도 소설은 나도 쓸 수 있어 나도 신(부처)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추리를 넘어서 초월하든, 초월의 10에 무량대수만큼 하든 그 망상은 파라독사야.신을 꿇게 하거나 신에게 배웠다는 이들은 모두 공상을 넘어 망상에 그리고 착란에 빠진 것이다. 루신이 말하듯이 그런 자를 패야한다고 한다. 그나마도 들어 줄 수 있는 상상은 아폴로가 갔건 말건, 여섯 살 꼬마에게 보름달을 보면서 저기에 계수나무가 있고, 그 밑에서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찢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엘리스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입말에는 삶의 진실이 있지만, 언어에는 삶을 떠나 즉 실재성을 떠나 기표로서 상징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말하고 살고, 말에 맞게 문자를 남긴다. 우리 문자(한들)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절이 인류의 역사에 있기나 있었던가? 언즉시야라는 문자의 대리 표상이 아니라, ‘그래’ 또는 “뭣꼬”라는 말과 같은 입말을 인민들 사이에, 입말과 문자의 대응을 맞추어가면서 말하는 것이 해방 후 겨우 79년 정도이다. 3-4천년의 유사 언어(인도유럽)를 쓴 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 맞추면서 입말도 문자도 해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쓰기는 터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상상은 상징에 맞게(제국주의 똘만이)가 아니라 실재성에 맞게(자치와 자주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서양 고대 철학사에서 이미 실재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들도 현실이 공상(상징, 신들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인가 실재(자연, 휠레 물질)에 맞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그 당시의 오관(상식)을 통한 설명에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여 실재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데아는 실재성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듯이, 시간과 공간이다.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학파 간에 실재성은 다른 용어 또는 대상이었다. 왜 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가 스토아학자들을 이겼느냐는, 지금의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고 부자편인 것과 같다. 그 원죄는 살았던 예수를 하늘나라에 살고 있고 게다가 다시 온다고 거짓말한 바울 아류들 일 것이다. 예수가 다시 내려와 지금의 목사와 신부들을 단죄한다면 이렇게 실재적으로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고들 한다.

   1,600여 년이 지나 오관을 종합하여 사유하는 방식에서 실재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데카르트가 수학을 통해서 무한을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듯이, 무한이 있다고 해야, 그 무한보다 더 적은 수많은 수학적 부분들이 성립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추론에서 무한이 실재성이 된다. 그렇다고 신이라는 용어가 실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신은 수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모든 곳에 있다고 규정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렇다면 그것을 증거 해보라고 하면, 신이 삶의 현장에 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은, 이런 종교인들의 사악한 돈 벌레 속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인간은 실재하는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이 무한하다는 것은 수학의 추리 전개에서 증명하는 것이지, 삶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 같은 이들은 제우스를 상식의 측면에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는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안다는 의미에서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콜라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신의 보편 편재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현존에 대한 것이었고, 게다가 현존은 추리에서 무한 소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도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현실적 증거를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수이트들이 증거할 수 없는 신을 말하는 데카르트를 무신론이라고 단죄 하려 들었지만, 이미 망원경의 시대라 마남(魔男)사냥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수이트들도 보편적 까지는 거의 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증거는 마치 기적처럼 그것을 독실하게 믿는 자에게도 그의 생애에 한 두 번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증거를 일상으로 보편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의 기적같은 신의 증거를 삶을 통해서 다시 증거되기를 바라면서 착하게 순수하게 산다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불교에서 돈오로서 부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들이 삶의 내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돈오를 할 수 없어서 봄 가을로 그 경지를 맛보려고 안거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안거가 부다의 경지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매번 알면서도 또 다시 안거에 들어가 반성, 성찰, 명상, 집중, 홀림을 맛보려 하는 것이다. 서양도 철학자들도 집중(recueillement)과 홀림(possession, 신들림)을 말한다. 플로티노스가 생애에 다섯 번 환희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도 홀림의 일종이다(무당의 신내림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홀림이 그나마도 이런 길을 따라가는 것의 한 방법이라고, 그는 “엔네아데스”를 쓴 것이다. (4:30, 57MLI) – <이어지는 글>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열여덟 해 동안에, 매일 해가 뜨듯이 자고 먹고 싸고 동일반복 같지만 매일 매우 조금씩 자라고 또한 달리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이질적 반복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그 긴 과정이 하루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이 고대철학자들이 말한 두 실재성 – 시간과 공간 – 중의 하나이다. 실재성이 과거 추억들의 조각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 나이에서야 진솔한 사유(도학, 철학)을 시작한다. 인간이 오랜 경험을 거쳐서 이런 정도의 과정은 일반화와 보편화해야 만이 공동체(공산사회) 또는 자연(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집단에서도 즉 스님이든 수도사든 목사든 신부이든 간에 이 나이가 되어야 입문식을 한다. 왜 그 나이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말에서 시작한 심리학이 얼마나 많이, 항목, 용어, 개념, 상징, 기호, 기표 등을 가지고 논의하면서, 개체발생은 종 발생의 이질반복이라는 점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역시나 인간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에서야 추상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시대의 고비[마루]마다 일반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중세에서 플라톤 이래 이데아가 실재성이라 여겼고, 근대에 데카르트 이래로 자연의 이법(raison)을 실재성이라 여겼다. 근대에서야 추론하는 청년이면 무한과 정해지지 않은 수(부정수)의 실재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수는 없는 수(부정수)가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법도 정해진 원리가 아니지만 실재한다. 추리의 극한으로서 무한도 신도 실재해야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무한(정해지지 않은 수들 중의 하나)도 있다고 해야만 학문이 성립하듯이 소위 말하는 좌표도 성립한다. 신의 경우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있다고 해야 도덕과 감정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신은 이론적 신, 즉 이신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신론의 등장은 예수를 크리스토스로 동격화 시키는 것이 논리의 추리의 하나이지, 현실적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미래에 올 메시아인데, 이미 만들어져 1,60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고, 논리적 추론에서 증명되는 것도 도덕적으로 증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말 심리학의(프쉬케학) 성립은, 이 시기에서야 인간이 실재성과 현실성을 개념으로 정립하려 하니, 묘하게 뒤바뀐다는 것을 알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헤겔을 뒤집어 사유하는 맑스의 이야기도, 이런 소설 같은 사유의 이야기들의 한 부분에 속한다(자본론은 1867년에 나왔지만, 1859년에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냈다) 여기서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소설처럼 읽어보라는 것이다. 열여덟이 넘어서 장편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초등과 중등 시절에 위인전 과학들에 대해 요약본을 읽소서 자란다. 이때서야 10권 짜리 장길산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속에 “뭣”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공자의 논어든, 플라톤의 향연이든, 싯달다의 법구경이든, 벩송의 물질과 기억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한 항목의 연속이라 여기고 읽어보시라. – 한가지 다 읽은 경우에도, 50여 년이 지나도 읽기는 읽은 것인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지만, 그거 읽다가 말아서 몰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추억처럼 장면이 없다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열여덟의 나이에 초등학교 선생님 또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과 행동이 눈에 선하듯이 기억하면서 동창들이 모이면 추억들의 장면들을 이야기한다. 각각의 추억들 중에서 서로 서로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래 맞다고 하며 서로의 이야기(소설같이)들을 즐긴다. 그래 삶은 추억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산다. 기억의 일반화는 “뭣”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부정(정할 수 없음)이 실재성이라고 벩송이 말한다. 이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자들의 이데아의 실재론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이다. 이런 혁명적 사유는 벩송에서 유래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사유의 발달에서 학문들의 발달에서 온 것이다. 이런 발달 때쯤에서야 실재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상식, 근대의 양식과 달리 현대에는 고등양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열여덟의 이질 반복의 과정에서 고등양식의 성찰과 집중에 들어서는 것이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신 존재가 아니라 신 현존으로 사유하는 것도 또 다른 변화이다. 그런데 그 현존이 이론적 신인 이신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십자군 이후에 수많은 인민 대중이 신은 우리 속에 있지 하늘나라는 사기 또는 거짓이라고 여기다가, 마남 사냥으로 불 속에서 물 속에서 이름 없이 순교했다. 이들이 실재로서 순교자이다. 그 분들에게 나무아미 안녕을! 프란체스코학파의 그 많은 순교와 끈질긴 싸움에서 오캄과 같은 과학적 사유 등이 나왔고, 브루노의 살신성인의 등장하였다 그러고 난 뒤에야 데카르트가 나온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의 인류의 기억 속에서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다. 종교를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들이 기쁨과 환희가 실재한다는 것은 사기, 기만, 망상, 착란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의 발달도 몇 가지 인간과학들이 성립하면서였다. 기나긴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는 간헐적으로 또는 갑자기 솟아난다.

   19세기 초엽에서 보면 칸트가 말한 인간이 계몽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14세 정도일 것이다. 칸트(1724-1804) 시기까지도 추상이 실재성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기이라, 헤겔까지 가는 것이다. 우선 꽁트(1798-1857)가 현실의 세상이 실재성이라고 여기고 신학과 형이상학에 벗어나야 한다고 실증철학을 주장했다. 꽁뜨의 실증은 독일법학의 실정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검사집단은 실재성에 대한 이해 없이 실정과 실증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언어의 일반화의 개념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증적(positif)이란 용어가 긍정적이라는 용어와 같은 단어이다. 그러면 대구(對句)에서 긍정적의 대립은 부정적인데, 실증의 대구는 허구일 것이다. 허구와 부정은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의 입말에서 아직 사유의 깊이로 들어가기 어렵게 한다. 부정은 없다(아니다)라는 쪽도 있지만, 잘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있지만 아직 미지수로 있는 어떤 것으로서 부정신학은 데카르트의 이신론으로 보면, 착하고 솔직한 사고이다.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뭣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긍정이라는 것은 부정의 성립 위에 있다. 없는 것 위에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을 다룬다. 현실적으로 “있다”는 주위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 위에 성립한다.

    사유의 총체로서 “긍정”은 현재에 없는 다른 것도 합해서 사유할 때이다. 이에 비해 속 좁은 지성에서, 긍정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긍정적이라기보다, 자기 이외에 배타적이고, 자기고집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외골로 사유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 긍정이란 용어가 절대자, 유일신앙에 붙어 다니는 경우에, 그 신앙이 거꾸로 가장 많은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정성을 내포한 긍정성이 제국주의 사고이다. 또한 부정성을 제외하면서 긍정적이라는 유일신앙이 자기가 모르는 부정성을 악마 취급하는데, 그것은 자기 속의 오류, 착오, 허위 등의 부정성(잠재적으로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중세의 마남(魔男)사냥과 그 많은 선량한 인민들을 이단이라고 죽여 놓고 반성 없는 자들이, – 주기철에 대해 한경직도 마찬가지 – 자기편의 죽은 자들은 대대손손 순교자라고 떠받들고 숭상하는 것이야 말로 기만, 사기이라고 한다. 그들은 저 많은 인민들뿐만 아니라, 단지 사유가 다르다고 종교재판으로 죽은 자들에게 참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그렇게 죽은 이들이 악당, 악마인가를 다시 묻는 것도 19세기말의 실재론 등장의 일부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타 문화에 전도한다는 이름으로 관심을 바깥으로 쏟았던가. 게다가 학문적으로는 반성하기도 한다. 긍정의 논리적 사고가 착오와 오류가 있다는 것은 논리학자인 러셀이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그리스가 일찍이 난제로 삼았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 장이”를 다시 사유하면서, 전칭긍정명제가 파라독사라고 했다. 러셀은 나중에 왜 기독교인 아닌가라는 글도 썼다. 뭐, 들뢰즈가 보면 수많은 소설같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것을 논리학자들은 진리라고 하고, 나아가 심리학의 실재론을 거짓과 착오로 몰기 위해 상징의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 상징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면 뭣을 왜, 철학하니.

     실재성에 대한 고대 상식의 사고와 근세의 양식의 추리를 뒤엎는 것은 철학자 꽁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며, 여 우리나라에는 수운 최제우의 득도(1860년)의 이야기도 있다. 다시 서양 사유의 발달사를 들여다보면,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전복적 사유를 했다. 유클리트 기하학이 절대공간의 사고이며, 뉴턴과 칸트의 사고체계는 절대공간의 성립과 전개이라는 것이다. 실재성에서 공간은 오목공간도 볼록공간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사유를 다양체 사유라고 들뢰즈 이후에 유행하고 있다. 절대공간의 실재성들은 상징성이며 논리적 추상의 항목들이다. 이런 절대공간의 개념을 뉴턴에 이어, 천문학에서 아인슈타인이 실재성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데카르트와는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우주의 통일성을 믿는 이신론에 가깝지만, 평생을 통일성을 주장하는 측면에서 그 또한 유일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물학 쪽의 발달은 더욱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을 넘어서 난바다(대양)의 소설이다. 18세기 생물학의 분류학의 논쟁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초 화석의 논쟁은 생명체의 생장과 변형에 대한 것이었다. 현미경의 발달로 미생물의 발견은 자연계가 통일성을 갖는 실재성이란 사고방식이 깨어지는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생명체의 다양성과 변형론에는 내재적 힘(벩송에서 엘랑)이란 것이 있어서 무작위로 다변화한다는 것이 널려 알려졌다. 그럼에서 다윈류들이 하나의 통일적 방향으로, 그 중에서 인간의 방향이 가장 발달된 또는 선별된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스며들어, 이 방향이 맞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외부의 신)를 끌어들였던 것도 유일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들 한다. 그 사고는 실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유전과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생명체는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의 이법(raison)은 신앙의 통일성과는 별개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실재성은 유물론자들을 자극할 것이다. 통속적 유물론자는 공간(볼 수 없는 공간)에서 원자들의 움직이고 구성하고 구축하는 놀이에 빠져, 레고 장난 같은 결합과 조합을 유물론으로 또는 실재론으로 설명했었다.

   그러다가 공간이 “뭣”인가라고 다시 물으면서, 실재성에서는 “뭣”이라는 토대와 같고 알 수 없는 영역이 오관(상식)과 추리(양식)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뭣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물과 물체를 놀게 또는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엇(기저, 깊이)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하면서, 실재하는 것은 “뭣”이며 그 속에서 또는 그 위에서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이성의 상상과 공상이었구나 하는 것이 바슐라르의 과학적 사고였다. 그는 자기 사유를 스스로 물의 철학이라 불렀다. 실재성은 부정성(아직 모르는 것)의 실재성이며, 그것을 철학사에서는 오래 전에 “휠레”라고 불렸고 중세에서 물질로 번역된 것이며,

    이 휠레라는 실재성은 이오니아학파의 학문적 토대였다. 이 학문적 관심을 우주발생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엘레아학파가 뭣의 기초가 존재[상징에 가깝다]라 여기고, 이를 실재성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 존재의 실재성이라는 주장이 유일신앙자들에게 요상하게 꼬여들어 변형되면서 신학이라는 항목 속에 들어갔다. 그 변형에서 이 항목의 주장자들이 이 항목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이들을 추방하겨 죽였던 것인가. 이런 오류와 과오를 감추기 위해 억압과 강제로, 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굴종과 예속을 따랐던가. 이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을 악마의 죽음으로 만들었던 논법을 브루노 화형에까지 1600년을 공공연하게 실행했고, 현 남한 땅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이 악마의 화법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인디언을 거의 몰살한 그 유일신앙이 악마의 화법인데, 이 화법에서 대항하기 위해 달리말하기는 중요하다. 일제에 협력자를 친일파라니 부일파이지, 미국의 딸랑이 친미파라니 숭미파지. 실재성에 맞는 용어를 쓰는 것이 그들과 달리말하기이다. 들뢰즈가 제국주의자의 예속의 학문을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서, 이들과 달리말하기를 넘어서 달리 학문하기로서 분열분석학을 제시한다. 게다가 맑스가 달리 살기를 말하면서 포이에르바하 명제 11에서 혁명을 말했듯이, 달리 실천하기를 들뢰즈는 다양체로서 리좀 흐르기라 한다.

     19세기의 1859년을 기점으로 신에서 벗어난 인간이 “뭣”이냐는 문제제기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언어학회, 진화론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학회를 만들면서 인류학의 성립에서도 있다. 뭣이라고? 지금까지 남은 기록들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해도 유대 경전에 인류 역사가 6,400년 정도라고 한다. 뻥을, 상상을 좀 더 하지 한 만년 정도로 그런데 그들에게 아마도 만년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기일 것이다. 요즘에는 만석꾼, 만에 하나라는 용어가 통용하지 않으니, 억 년 전으로 잡았어야지. 그래야 엄청나게 기나긴 대하소설들이 되었으리라.

    화석과 지층의 도움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구석기와 신석기를 다루면서, 추억들의 장면 같은 조각들이 발견하듯이, 인간의 과거의 역사들의 파편을 찾기도 하고, 생명체들 중의 추억들에서 거대한 뼈다귀로 남은 멸종된 생명체들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추억들에서 망각은 무엇인가? 잊고 싶어 하는 것이 망각일까? 황제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반대파들의 기록을 없애는 것이 망각일까? 요즘 윤석열 정권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홍범도를 지워버리고 이승만을 불러낸다고 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게 한단다. 망각에서 자기에 맞는 것을 불러들이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트라우마 논의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라. 러시아의 미하일 솔로호프 소설 “고요한 돈강”에서 자본주의자들의 트라우마로서 적군에 죽은 귀족인가, 인민의 트라우자로서 백군에 죽은 적군의 가담자들인가? 두 전쟁에서 피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일신앙의 역사에서 그들의 종교에서 순교의 피와 이교도 사냥과 마남(魔男) 사냥에서 죽인 피의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 어쩌면 역사에 대한 망각에 대한 논리와 실재성에 대한 논의의 차이일 것이다. 왜 프랑스 아닐학파들이 맑스의 역사적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미슐레는 왕조사를 읽기를 그만두고, 먼지 속에 쌓여있었던 프랑스 대혁명과 인민의 청원서를 읽었겠는가. 역사의 실재성은 상층의 트라우마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살아간 실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라 한다. 실재성은 트라우마를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현실에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데카르트는 그런 사고는 백 배로 빨리 돌려도 같은 값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과정의 실재성을 소설처럼 읽으시라, 자신이 그 과정을 겪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거쳐가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기억으로 흐르고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도. 개인의 삶에서도. 실재성에 대해 진솔하게 대하면, 이 뭣꼬를 테스형까지는 아니라도 “뭣”에 대한 진솔한 문제제기를 할 때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닌 것 같다) 실재적으로 열여덟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이란 관습적 틀을 벗어나, 진솔하게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여기에서 실재론은 관념론의 전복도 아니고 유물론의 변이도 아니다. 실재론에 들어서면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둘 중의 둘째 것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깊이 생각하며 성찰하는 시기는 누구에게 있다. 양식의 추리를 저 너머 또는 달리, 다시 추론하는 것이다. 추론은 다양한 과정들의 자료를 함께 놓고서 사유하는 것이다. 실증철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생물학, 진화론, 언어학, 인류학, 유전학, 역사학, 기억론 등을 펼쳐 놓고 이것들의 과정을 함께 논의해 볼 때, 스스로를 확장하는 자기교육(책읽기, 벗과 동지 만나기), 자기 함양, 자기형성의 시작이다. 열여덟의 다음으로 삶의 과정을 평생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삶에서 배워야하는 실재성은 우선 눈으로 보거나, 말을 듣거나, 손(발)으로 노동하면서 그리고 생산하면서, 익히고, 자기 몸(내재의식)에다가 등록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치(raison, 이법, 자연의 과정)를 탐구하면서, 더하여 타인과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유교에서 “선한 일이 사소하다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라고 하듯이, 불교에서 이치를 구하라고 법구경이라 한다.

    고등 교육을 마친 이후에 대학의 교육이 필요한 경우는, 한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한 영역에서 삶을 정착하기 위한 것이다. 실재성은 한 부분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과 실천에 있으며, 완전성과 통일성이 먼저 있지 않기 때문에, 셋, 아홉, 여든하나가 모일 때의 실재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 너비의 확장에는 입말과 글자를 포함하는 언어의 활용이 중요하다. 만남에서 입말도, 책에서 문자도, 자연에서 절후마다 달리 등장하며 또한 터전마다 다른 풍경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언어 전체는 기호(signe)로 표면에 또는 현실에 드러난다. 이런 언어를 배우고 읽히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연속성만큼이나 이어지기에 좋은 길 또는 좋은 선(線)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선을 따르거나 또는 살아가면서 점점 만들어 가는데, 그 선에서는 함께 논의하는 입말이 필요하다. 이런 입말에서는 보안법이 없어야 하며 또한 빨갱이라는 악마화 용어가 사라져야 한다. 아직도 이런 시대에서 달리 말하기를 실재성에 비추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1859년 언어학회가 생길 때 언어 기원은 논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지만, 이제는 언어가 기호의 등장 전체를 의미하고, 서로 소통에서 입말의 역할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입말을 중심에서 구강의 역할이 호흡(생명), 노래(옹알이), 언어, 음식, 애정 등을 발현하는 다양체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삶의 터전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별개이다. 언어학에서 입말은, 논리적 명제의 개념들을 말하기보다 내면의식을 포함하는 삶의 일반화를 표출한다. 입말이 문자에 귀속되는 것은 들뢰즈 식으로 제도에 복속되는 것인데, 인류 역사상 기억 속에서 입말은 문자보다 먼저이다. 입말이 문자를 모방하는 것으로 여기면 입말을 하는 부류들이 제도와 체제에 예속되는 것이고, 입말이 자연의 순리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삶의 여러 가지치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방식에서 내재의식(무의식)이 현실에서 출현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두 실체와 스피노자의 두 속성에 맞물려 있다. 더 과거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휠레와 이데아와도 맞물려 있다. 철학사가 중요한 의미이다. 정신이 물질을 다룬다고 여기는 것은 플라톤주의였다면, 볼 수 없는 것에 공감하며 내 뱉는 입말에는 (인간의) 자연의 발현이 있고 보는 쪽은 퀴니코스학파와 초기 스토아학자들이다.

    논리적 개념작업으로 개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라면, 입말을 통해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언어학 또는 심리학의 방식이다. 전자에서는 앵글로 색슨에서 의미론이 주축이라면, 후자에서 언어학의 토대 또는 기원으로서 기호(signe)를 다루는 쪽은 기호학이 있다. 다음에 말하겠지만, 우리의 내재의식[무의식]의 발현으로 입말이 문자와 결합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발표했지만, 언어와 기호, 입말과 삶의 과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실재적이고 현실적 활동은 해방이후 일 것이다. 인민이 자유롭게 입말을 하는 시기가 얼마되지 않는다.

     서양이 자국의 언어로서 문화적 양상을 바뀌는 것은 르네상스 1,600년경이었지만, 그들은 꾸준히 자기 문화의 창달을 했는데 비해, 우리는 갑자기 도래한 것처럼 1945년 이후에 활발해졌다. 아직도 우리 입말이 문자로도 삶의 현장에서 실재성을 드러내기에 어렵다. 열다섯에서 학문의 시작(자기 형성)을 세웠다고 하는 공자가 시편을 정리한 일흔 나이에 까지를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기를 하며, 선들을 셋에서 아홉으로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여든에 이루기까지, 지나갈 세월이 50여 년이나 된다. 고승이 50년 되어서 할! 한다고 하는데, 젊은이여, 열여덟에서 시작하여, 종속과 관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면서, 달리 말하기와 선(線, la ligne)을 만들면서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팔천오백만이 입말을 공유한 지 75년이란 입말-문자의 역사에서 보면 비록 짧지만, 우리 한글과 입말이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데 매우 좋은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철학자 윤구병이 말한 것처럼 제2외국어를 꼭 하나 하시라. 가깝게는 러시아어와 중국어, 미국어와 일본어도 있지만 아랍어도 있고, 유럽어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있다. 젊은 시절 시작해서 50여 년을 매일 조금씩 행하는 이질적인 반복은, 당신을 달리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할 것이다. 혁명은 여기에 있다. (7:09, 57MLH) (10:08, 57M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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