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
1)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거나 연장적인 것, 비어 있거나 충만한 덩어리[Mass]이다. 이 질료는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것이다. 건축은 어떤 외면적 형태를 갖든 간에 그 본질은 무규정적 연속적인 덩어리 즉 공간[또는 연장]에 있다. 내적 공간은 무규정적이니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외부에서 의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헤겔은 그 때문에 건축은 본래 상징적인 예술이라 한다.
그것은 “육중하고 물질적인 것 즉 특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 구체적이거나 진정으로 정신적인 형상이 가능하지 않은 것”[1]이다.
내적 공간은 삶의 터전으로 사용되니, 건축의 목적은 이런 삶에 있으며, 건축의 의미는 삶을 위한 봉사에 있다. 예를 들어 건축은 주거이거나 신전 또는 광장이거나 시장 그 외 일상적 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삶 자체가 시대적으로 변화한다. 고대 신과 고전적 신은 다른 정신을 표현하니, 그에 따라 신전은 다른 형태의 내적 공간을 요구할 것이다. 고대 도시는 정치 중심지였다. 중세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출현했다. 그에 따라 도시는 다른 형태의 공간이 될 것이다.
삶의 목적은 그에 적합한 수단으로서 공간을 요구하니 양자 사이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런 합목적성의 관계는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고전 시대의 광장이었던 곳이 근대에 시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고대 신전이 개조 되어 근대 신전으로 변한 경우도 많다.
2)
건축의 외면적 형태는 건축을 축조하는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공간의 외면적 형태는 내적인 공간과 느슨하게 나마 상호 연관을 갖는다. 그것은 병과 그 내용처럼 거의 무관한 것은 아니며 옷과 신체처럼 느슨하게 서로 들어맞는다. 건축의 외적 형태는 “독자적으로 형상화된 의미의 단순한 덮개나 환경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통해 하나의 의미 내용을 내비치는 형식”[2]을 갖는다.
외적 형태는 이런 내적 공간을 매개로 그 공간이 봉사하는 목적과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공간의 목적이 공간의 내적 형태를 합목적적으로 제약하고 이 공간의 내적 형태는 그것을 축조하는 외적 형태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형태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 정신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헤겔에 따르면 건축의 외적 형태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을 제공하며 보편적 표상들을 일깨워야 한다.”[3] 건축은 “소리가 없을지언정 그 자체로 인해 현전하는 언어로서 정신에 대해 존재한다.[4]”
건축은 다양한 외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 형태는 위에 말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느슨하게 나마 그 시대 삶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건축적 질료는 육중하고 거대하기에, 무게와 균형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법칙을 지배 받아 마음대로 형상화될 수가 없으며 대체로 직선과 직각, 수평면의 요소를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계 내에서는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그 시대 예술 형식을 닮은 요소를 받아들인다. 곡선이 들어오고 열주가 늘어서고 궁륭과 돔이 만들어진다.
건축의 질료인 내적 공간은 그 의미에 대해 상징적인 연관을 갖지만, 이런 외적 형태는 부분적 형태를 통해서 그 시대 예술형식과 정신을 드러낸다.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 형식으로 전개됨에 따라 건축 역시 상징적 건축, 고전적 건축, 낭만적 건축으로 발전한다.
2)
최초 고대 국가의 건축은 거의 무차별적인 덩어리이어서 외면적 형태도 없다. 예를 들면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저 흙덩어리를 몇 개 단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이며, 내부에 빈 공간도 없는 충만한 흙덩어리 자체이다[5]. 외적 형태에는 예를 들어 7개의 기단과 같이 추상적인 수가 할당되어, 간신히 사유의 흔적을 남겼다. 헤겔에 따르면 최초 건축은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것이어서 민족적 통일을 상징할 뿐이라 한다.
좀더 발전하면 다음 단계에서 오벨리스크처럼 거대하지만 추상적 형식을 갖거나,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 상처럼 자연형상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형태를 갖는다. 이런 건축물은 조각과 닮았는데, 조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외적인 형태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세워져 있거나 쌓여 있어서 하나의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덩어리로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닌다. 이 축조된 돌 덩어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지금은 알지 못하며, 남근이라든가 스핑크스와 같은 외적 형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조각품적인 건축의 경향은 이집트 사원 건축에 이르면 상당히 발전하는데, 이는 스핑크스의 회랑, 기둥 숲, 상형 문자의 벽, 멤논 상, 성소, 사각형의 돌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여기서는 상징적 수수께끼가 흩어져 있으니 헤겔은 이집트 사원 건축은 자연 속에서 어떤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자의식은 아직 영글거나 자체로서는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전진하고 탐색하고 예감하고 끝없이 생산적이었으나 절대적 만족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그런 까닭에 안녕이 없었다.”[6]
다음 단계에서 건축은 드디어 충만한 덩어리를 넘어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벽으로 에워싸고 기둥으로 지탱하면서 만들어진 건축적 공간은 삶에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헤겔은 이런 건축의 예로서 지하동굴이나 피라미드(무덤)[7], 왕궁을 거론한다. 이제 건축은 삶의 터전이 되니 전 단계 조각을 닮은 자립적인 건축에서 삶의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적 건축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여전히 거대하고 육중한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장엄한 스핑크스의 대열이나 기둥 숲의 열주는 이 시대 상징주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환상성이나 숭고함을 닮았다. 건축물은 아직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단순성과 추상성, 균일한 크기, 간격 똑바른 열 등의 규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적인 비례, 조화와 같은 유기적인 아름다움에 이르지는 못한다.
헤겔은 고대 건축에서 나타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보이더라도 이는 추상적 규칙성에서 유기적 아름다움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중간적 형태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세 이슬람 사원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을 보여주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달리 “식물 형태가 건축학적으로 변형되어, 원통형 오성적인 것 규칙성 직선형에 근접하여” “아라베스크라 불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8] 뿐이다.
이런 추상적 규칙성의 요소는 일반적으로 상징주의적 예술 형식을 닮았다. 여기서 직선이나 수평면이 그 자체로 상징적인 기호라는 뜻이 아니다. 즉 직선은 숲의 나무를 상징하고 수평면은 바다를 상징한다는 것이 아니다. 직선이나 수평면이란 마치 무규정적인 공간이 그렇듯이 무차별적이고 ‘탈자적인’ 요소이므로 상징적으로 된다.
4)
그리스 시대 고전 건축에 이르면[9] 이제 건축의 목적은 분명하게 자각된다. 그 목적은 곧 삶의 터전이니, 건축은 주택이거나 신전, 광장이나 도로 등이 된다. 건축적 공간은 삶에 봉사하며, 그런 한에서 자신의 봉사하는 삶에 대해 가장 합목적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나 외적 형태가 아니라 이런 합목적적 수단으로서 공간이 건축을 지배하는 기본적 원리가 된다.
“목적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규제적인 원리이며, 작품의 근본 형태와 골격구조를 동시에 규정하는 원리가 된다.”[10]
신은 민족의 삶을 통일하는 종교적 상징이므로, 개인적 삶을 위한 주택보다는 신의 거처인 신전이 이시대 건축의 최고 형태가 된다. 여기서도 목적이 지배자이며, 형태의 아름다움은 부차적일 뿐이다.
이런 합목적성은 삶 자체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삶이 실행되는 자연적 환경 즉 기후나 입지 경관 등에도 적합해야 하니, 이로부터 고유한 민족적 건축물이 세워지게 된다. 그리스적 건축물과 게르만적 건축물 동아시아적 건축물은 각기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과제를 가장 충실하게 수행했다[11].
건축은 축조되면서 외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고전적 건축은 내적 공간적 형태가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형성될 뿐만 아니라 외적 형태 역시 그 시대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고전적 예술 형식은 정신을 현현하는 이상적인 형태이니, 고전적 건축 형식 역시 이상적 형태를 닮으려 한다. 하지만 건축은 기본적으로 자연법칙에 따라 축조되는 한계가 있으니, 이상성은 이제 건축의 부분적 요소 사이의 균형과 조화, 비례라는 방식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고전적 건축의 외적 형태가 지닌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는데, 직사각형이 정사각형보다 우세하다거나, 너비는 길이의 반이라는 등 원리이다. 헤겔은 이런 특징을 ‛음악적 관계’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는 슐레겔의 말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한다.
고전 시대 건축의 형태적 특징 가운데 핵심은 기둥이다. 기둥은 내리누르는 무게를 들어올리면서 정신의 비상을 암시한다. 헤겔은 특히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주목하는데, 이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는 비상의 힘을 상징한다. 헤겔은 이런 신전 건축의 기둥을 지배하는 원리를 지탱이라 한다. 그것은 이제 에워싸는 담이나 벽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세워지며”[12], ‟하중과 유희하듯, 너무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으며 억눌려서도 안되며, 공중으로 너무 높고 가볍게 솟아서도 안 된다”[13]고 평하였다.[14]
아래는 그리스 고전적 신전에 대한 헤겔의 평가이다. 외적 형태에서 한마디로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건축은 곧 고전주의적 예술형식에 속한다.
“그들의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은 단순한 덩어리로 바닥에 눌려 있거나 그 너비에 대비해 과도하게 높이 솟거나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점에서 아름다운 중용을 유지하며 또한 동시에 그 단순성 속에서도 적절한 다양성을 위해 필요한 유희공간을 제공한다.”[15]
“이는 고전적 이상에서 보편적 실체가 자신의 생동성을 담지 하는 우연자와 특수자를 지배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신과 조화시킬 만큼 힘 있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16]
이런 그리스 신전은 이제 에워싸는 동굴과 같은 이집트 신전과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은 그 신전의 열주 사이로 ‟둘러서거나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오락가락하면서” ‟진지하지 않고 명랑하며 한가롭고 떠들썩한 머무름의 표상을 얻는다.”[17] 이런 형태는 그리스 건축이 자신의 목적인 그리스적인 삶 특히 도시 폴리스의 정치적 역할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겔은 이와 같이 간접적이지만, 목적을 자각하고 이를 건축 속에서 구현하려 하는 건축을 봉사적 건축이라 이름 붙인다.
[1] 미학강의 2, 292쪽 참조. 공간은 내적으로 텅 비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규정성 아래 있다. 이 규정성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는데, 이 규정성에 따라서 다양한 공간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규정되어 있지만 본래 구체적이지 않다”라고 한다.
[2] 미학강의 2, 292쪽
[3] 미학강의 2, 292쪽
[4] 미학강의 2, 292쪽
[5] 헤겔은 후일 헤로도토스가 전한 벨로스 탑에는 정상에 신전이 만들어졌으나 초기의 바벨탑에는 이런 신전조차 없고 그저 몇 개의 단에 걸쳐 흙덩어리가 쌓였다고 한다.
[6] 미학강의 2, 307쪽
[7] 피라미드에는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다. 헤겔은 미이라는 신체를 불멸하게 만드는데, 영혼이 개별적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개별적 영혼은 불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자연적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미학강의 2, 321쪽
[9] 헤겔에 따르면, 고대 건축의 에워싸는 벽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 석조가 유리하며 상징적 건축이나 낭만적 건축은 대개 석조다. 반면 고전 건축은 지탱하는 기둥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조가 유리하다. 그리스 건축은 후일 석조로 바뀌지만, 여전히 목조의 형태를 보존한다.
[10] 미학강의 2, 326-327쪽
[11] 그리스 건축에서 에워싸는 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지붕과 기둥으로 이루어질 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건축물은 겨울의 추운 기후와 여름의 무더운 기후를 반영하며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과 열린 넓은 마루, 두터운 지붕으로 이루어진다.
[12] 헤겔은 이점과 연관하여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기둥의 본성은 자유자재이다”. ‟벽들은 어떤 기둥을 갖는다기보다는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 (헤겔 미학강의2, 339에서 재인용)
[13] 미학강의 2, 332
[14] 헤겔은 괴테가 “기둥의 본성은 자유 자재이며” “주택은 네 기둥에서 성립하지 않으며, 사방의 네 벽에서 성립하며 이 벽은 …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고 말했다 한다. (헤겔 미학강의 2, 339쪽)
[15] 미학강의 2, 342쪽
[16] 미학강의 2, 342쪽
[17] 미학강의 2,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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