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30- 모더니즘 미학의 선구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0- 모더니즘 미학의 선구자
1)
앞에서 낭만주의 예술형식은 필연적으로 리얼리즘적인 형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상징적 예술형식은 추상적 형태가 사용되고 고전적 예술형식에서는 형상은 이상화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형식에서 정신은 자기를 구체적 현실을 통해서 그것도 경험적 실재의 자기 부정적 운동 속에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나 고전주의는 실제 현실에 대한 관심은 없으며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한다.
경험적 실재에 대한 관심은 낭만주의 해체기인 근대 부르주아 시대에 이르면, 구체적 현실 자체가 긍정적으로 파악된다. 낭만주의 시대 정신과 그 현실 사이는 무한한 괴리가 존재하는데, 이 시대 사회적 관계가 발전하면 할수록 정신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좁혀지며, 현실은 이제 그 자체로 긍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리얼리즘 예술의 발전한다.
그 결과 네델란드 풍속화에서 보듯이 여관에서 술에 취해 희롱하는 남녀 등이 생동적인 정신을 보여주며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서 보듯이 개인적 주관성 자체가 기이하고 부정적이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이제 그 부정성이 아니라 그 자체의 긍정성[Positivitaet]이 흥미의 대상이 된다. 이제 순간적이며 찰나적인 현상조차도 예술가가 주목하는 대상이 된다. 아래는 네델란드 풍속화를 거론하면서 헤겔이 서술한 대상이다.
“금속의 반짝거림, 불빛에 비친 포도의 미광, 희미해져 가는 해와 달의 모습, 웃음, 흘깃 스쳐가는 심정 상태의 표현, 우스꽝스러운 움직임, 자세, 표정-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이러한 것을 잡아내고 그 충만한 생명성을 지속적으로 가시화하는 일”[1]
”여기서 우리에게 고정되고 가시화되었던 것은 변화하는 자연의 무상한 표현들, 개울의 흐름, 폭포, 물거품 이는 파도, 유리잔과 접시 등의 우연한 광채를 담은 정물, 아주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정신적 현실의 외적 형상, 불빛 아래서 바늘귀를 꿰는 여인, 우연히 행동하는 강도들의 한 장면, 금방 다시 바뀌는 일순의 한 동작, 농부의 웃음과 야유 등이다”[2]
2)
예술형식에서 리얼리즘적인 예술과 예술 기법에서 리얼리즘 기법은 구분되어야 한다. 리얼리즘적 예술이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이라 한다면, 리얼리즘적인 기법이란 현실을 모방하는 기술을 말한다. 여기서 모방은 현실의 일부를 예술적 질료 속에 옮겨놓는다(또는 이중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방은 감각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결여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어떤 형상을 예술적 형상으로 만드는 결정적이거나 유일한 기법은 아니다.
우선 상징주의 예술에서나 고전주의 예술에서는 구체적 현실을 형상화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다. 여기서 사용되는 감각적 형상의 일부가 구체적 현실을 모방했다고 하더라도, 그 형상화의 핵심은 모방과는 무관하다.
인도의 춤추는 시바 여신상을 보라. 그 형상은 여인의 모습을 닮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수천의 팔로 춤춘다는 환상적 사실에 있다. 이 사실이 이 형상을 상징적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또 그리스 아테네 여신상을 보라. 마찬가지로 여인을 닮은 모습이지만 여기서 이 여인을 아테네 여신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얼굴과 신체를 이루는 부분들 사이의 비율이다. 그 비율이 이상적인 비율, 황금 분할의 비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형상이 고전적 예술이 된다.[3]
낭만주의나 근대 예술은 앞에서 말했듯이 그 형상화는 리얼리즘적이어야 한다. 즉 감각적 형상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제 현실을 닮도록 모방하는 기법이 중요해지고 자주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조차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반드시 모방의 기법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현실과 인간의 모방이란 상징주의나 고전주의에서처럼 부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 자체가 부딪혀서 일으키는 현상을 물감이나 소리와 같은 추상적인 물질이나 문학의 재료인 표상을 가지고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헤겔은 이런 점에서 네델란드 풍속화의 기법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찰나적이며 변화무쌍한 현상이 “충실하고 참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충실한 참된 묘사가 모방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헤겔은 여기서 ‘주관적 재창조’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정신이 사유와 개념 파악의 활동을 통해 세계를 표상과 사상들로 재생산하듯, 이제는 외면성을 대상 자체와 무관하게 색채와 조명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주관적으로 재창조한다.”[4]
이런 주관적 재창조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언어는 사태에 대한 그림(즉 모방)이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어지는 헤겔의 설명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에서 개개의 음향이 독립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다른 음향과의 관계 속에서 그 대립, 조화, 이행 그리고 융합 속에서 효과를 야기한다면, 여기서는 색채가 그런 것이다. 금처럼 광채가 나거나 불빛을 받은 금식 직물처럼 반짝이는 색채의 가상을 우리가 가까이 관찰한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희거나 노란 획, 점, 채색된 평면들 따위뿐이다. 개개의 색채는 그것이 야기하는 이러한 광채를 가지지 않는다. 조합이 비로소 이러한 반짝임과 빛남을 만든다.”
즉 마치 음악이 추상적인 음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슬픔과 기쁨을 생산하듯이 미술에서도 추상적인 색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반짝임과 빛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음악적 기법을 다시 사유의 활동과 비교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설명하듯이 사유는 개념을 체계화함으로써 대상의 진리에 도달한다. 물론 단숨에 진리에 도달하기 않고 처음에 주관적인 개념 체계가 대상과 모순에 부딪혀 재구성하면서 마침내 대상의 진리에 도달한다. 이때 사유는 객관적 개념 체계가 된다. 이런 개념의 체계화는 곧 음악에서 음들의 대립과 조화와 같으므로 헤겔은 사유가 대상을 재생산하듯이 예술은 감각적 형상을 주관적으로 재창조한다고 말한 것이다.
4)
헤겔이 말하는 이런 음악적 기법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기법이었다. 음악이 지닌 이런 기법은 현대 예술가를 통해 회화나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퍼져 나갔으니, 간딘스키의 추상화, 피카소의 몽타주, 아상블라주 등이 모두 이런 기법의 발전이었다.
이런 기법은 다양한 변형을 만들어냈다. 예술은 이런 음악적 기법을 통해 개별 예술 장르를 넘어섰으니 회화는 언어, 회화와 음악, 회화와 조각 건축이 뒤엉켜서 통합적인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학적으로 본다면 헤겔이 모더니즘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1] 미학강의 2, 242쪽
[2] 미학강의 2, 242쪽
[3] 자주 인도의 조각상은 비사실적이고 반면 그리스 조각상은 모방적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시바의 여신상과 아테네 여신상을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 것이 더 모방적인가를 판단하기 어렵다. 차라리 시바 여신상이 여인의 풍만한 모습을 더 사실적으로 모방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시바상과 그리스의 아테네 여신상의 차이는 사실성이나 모방성의 정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헤겔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상징적 표현과 고전적 표현의 차이 즉 천 개의 팔과 이상적 비율의 차이에 있다고 하겠다.
[4] 미학강의 2,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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