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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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

 

1)

호퍼는 40년대 들어 마침내 실재계의 세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 바탕에는 뒤늦게 그에게 다가온 원초적 장면의 체험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실재로부터 단절하고 상징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 상징의 세계에서 맨 처음 그가 만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세계이다.

 

호퍼의 욕망 구조에서 새로운 전환의 시기였던 1940년 그는 아래와 같은 그림 <밤의 사무실>을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실에서 밤 늦게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남자이며 사무용 책상에 서류에 몰두하고 있다. 호퍼는 그를 상당히 위에서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그의 오른 편에는 창문이 열려 있지만,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림의 외편에는 여성이 있다. 그림 왼 편 아래쪽에 타이프라이터가 있는 걸로 보아, 비서로 보인다. 그녀는 온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엷은 푸른 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서류함을 뒤지는 중 갑자기 남자를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호퍼는 그녀를 거의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어서, 타이라이터 책상과 남자의 테이블, 그리고 남자와 시각적으로 어긋나고 있다.

 

실내는 실내 전등과 책상 위의 등의 빛이 교차하면서 상당히 밝고 전체적으로 밤의 아늑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바닥의 녹색과 책상의 짙은 고동색이 그런 분위기에 어울린다. 언뜻 상당히 섹슈얼할 수도 있는 분위기인데, 더구나 여성의 몸의 윤곽이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남자는 서류에 몰두하여 그런 분위기에 전혀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간, 여자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저 딱딱한 사무적인 이야기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의 시선을 끌어내기 위한 도발적 언어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에게 터뜨리는 파일까?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던져 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말이 없고 창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자기의 내면에 잠겨 있다. 이 그림의 남자는 그런 연속 선상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여성은 아니다. 여성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말을 건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2)

이어지는 그림은 호퍼가 1947년 그린 <여름 저녁>이라는 그림이다. 얼핏 보면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집은 무슨 무대의 세트처럼 보인다. 이 집의 테라스에 두 남녀가 걸쳐 앉아 있는 측면이 너무 옆으로 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법은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나온다. 그 결과 정면과 측면이 마치 몽타쥬된 듯하며, 집의 분위기보다는 연극 세트처럼 보이게 만든다.

 

두 남녀의 등 뒤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짙은 여름 밤이다. 풀들이 무성하고 하늘은 검푸르며, 숲은 좀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그 으스스함은 두 남녀를 덮칠 것도 같은데, 마치 벽에 붙여 놓은 그림처럼 보이면서 두 남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테라스에는 밝은 등이 켜있고 그 아래서 두 남녀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어린 듯 보인다. 여자는 브래지어와 짧은 치마만 입었지만 더구나 색깔이 붉은 색이지만,  섹슈얼한 모습은 아니다. 아마 호퍼가 긴장된 다리의 근육을 가감 없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손을 써 가면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경우 대개 남자는 앞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내면서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여자의 인상이 심각한 듯 하니 남자는 아마 상당히 진지한 약속을 던지는 모양이다.

 

그 내용은 독자가 짐작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서류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이 그림에서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귀 기울이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곧 대화가 오갈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3)

이 그림은 1949년 그려진 <밤의 회의>라는 그림이다. 우리가 미국 호퍼의 시대 살지 않은 한 이 그림은 배경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세 사람이 회의를 하는 방의 천정에 시멘트 대들보가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기둥이 보이는데 그 옆에 창문이 달린 문이 보인다. 이 문이 마치 허공에 세워진 듯하다. 방의 좌우에는 나무로 된 긴 탁자(또는 군 내부반 침상)가 놓여 있으며, 세 사람은 그 사이에 있다. 과연 이런 공간이 실제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운데, 그 가운데 서 있는 세 사람은 매우 실제적인 모습이다.

 

두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다. 앉아 있는 나이든 사람이 책임자로 보인다. 서 있는 여성은 나이든 여성인데, 아마 비서로 보이고,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책임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는 아마 그 말을 실행할 직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분위기상 업무와 연관된 일에 관해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하는 장면 오른쪽에서 아주 밝은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낮이라면 햇빛이겠지만, 제목에서 밤이라고 밝혀 놓았으니 햇빛은 아닐 것이다. 가로등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환한 빛이다. 아마 작가인 호퍼가 임의로 집어넣은 빛일 것이다.

 

호퍼는 왜 아마도 업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대화를 하는 그들을 이렇게 강한 빛으로 비추어 주었을까? 일상적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호퍼가 어둠과 침묵으로 표현되는 실재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호퍼로서는 일상적 대화가 오히려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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