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 산책7- 기호와 표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 산책7- 기호와 표현
1) 예술과 미적인 것
헤겔은 미학이라는 용어 대신 예술학이라는 용어를 더 적합한 것으로 본다고 말한 데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헤겔은 예술 작품과 미적인 것을 구분한다. 헤겔에서 예술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념을 표현하는 기호라 한다면, 미적인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미적인 것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으나, 헤겔의 용법을 보면 대체로 미적인 것의 개념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헤겔에서 미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성질은 대상의 유적 통일성과 구분되는 종별적 통일성과 관련된 성질이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상의 규칙성, 균형, 생동성과 합목적성과 같은 성질이다. 이런 성질은 이미 자연미의 개념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헤겔에서 미적인 것의 개념 자체는 고전주의 미학에서 미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예술이 이념을 표현하는 기호는 반드시 미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미적이지 않은 것도 이념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1]. 많은 상징 예술은 무섭고 심지어 추악한 것이면서도 그 시대 이념을 표현하는 기호이니 탁월한 예술이 된다. 미적 형식이 신을 표현하는 그리스 시대에서도 비극은 운명의 힘 앞에서 느끼는 공포의 감정을 묘사한다. 근대에 네덜란드 풍속화는 잔칫날 술 취한 모습. 남녀가 시시덕거리는 광경이 그려졌는데, 그것은 그 시대 생동적인 삶의 모습을 표현하지만 결코 아름답다고 보기는 어렵다.
2) 기호와 표현
예술이 기호라고 하더라도 다른 기호와 차별성을 지닌다. 기호의 대표격이라면 언어가 되겠는데, 소쉬르 이래 구조주의에서 언어의 기표 체계는 변별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구조주의는 어떤 기표가 특정한 기의를 지시하게 되는 것 자체는 관습(또는 자의)에 기초한다고 본다.
언어적 기호가 이처럼 관습(자의)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면, 예술적 기호도 마찬가지일까? 헤겔이 예술은 이념을 표현한다고 하면서 ‘표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서 보듯이 예술적 기호는 이런 관습적 기호와는 구분된다.
헤겔이 상징적 예술형식을 논의하는 끝에 비유를 분석하는 데서 밝혀지듯, 헤겔에서 예술적 기호는 처음 관습적인 것에서 나와서 점차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 기의와 기표, 즉 이념과 그 기호 사이의 합일을 향해 나간다. 이런 점에서 헤겔에서 예술적 기호는 소쉬르보다는 오히려 퍼스의 기호론에 더 가깝다. 퍼스는 기호와 지시체 사이에 해석을 개입시킨다. 기호는 해석이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서 아이콘과 심볼, 인덱스가 구별된다.
이처럼 헤겔에서 예술이 이념의 기호라 할 때 그 사이에는 유사성이 매개되어 있으니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 관계를 기호라고 말하지 않고 표현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예술은 이념과 매개로서 이념의 어떤 성격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념은 예술 속에 자기를 이중화[du-plicate]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은 이념과 예술의 관계를 표현[Ausdruck] 또는 펼침[explicate]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중성을 스피노자가 사용하듯이 주름[plico: 라틴어, 접다]이라고 말한다면 예술은 곧 이념의 주름이다.
3) 자유와 무한성
예술이 이처럼 유사성을 매개로 한 기호 즉 표현이므로 여기서 헤겔은 예술이 지닌 기본적인 성격 즉 자유와 무한성이라는 성격을 끌어낸다. 이 자유와 무한성은 사실 같은 의미인데, 이것은 이념과 그것의 표현 사이의 이중성의 관계를 보여준다.
예술은 이념의 이중화이므로 한편으로 예술은 이념의 이중화로서 이념으로 복귀하고 있으며 이 측면에서 예술은 무한성을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이념은 자기를 벗어나 타자가 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머무르면서도 자유롭다.
“오직 이[예술작품]를 통해 이상은 외적인 것 속에서 그 자신과 합치하며, 자유로이 자기관계하는 것이며, 내면에서 감각적 지복을 누리며, 스스로에게 기뻐하고 스스로를 향유하는 것으로 있다.”[2]
예술이 무한하고 자유롭다는 데서 헤겔은 예술의 근본 특성이 고요함[Ruhe]과 쾌활함[Heiterlich keit]을 끌어낸다. 헤겔이 대표적으로 들고 있는 예는 역시 호머의 서사시이다. 헤겔은 호머의 서사시에서 “신들의 가시지 않는 웃음은 신들의 행복한 고요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헤겔은 쉴러의 시 <이상과 삶>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고요한 그림자 나라’에 대해 언급하는데, 쉴러는 그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런 그림자 나라에서 나타나는 영혼은 직접적인 현존을 벗어 던지고 자연적 실존의 궁핍에서 분리되고 …외적 영향과 모든 풍진과 세파에 대한 종속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있다.”[3]
여기서 쉴러가 언급한 고요한 나라는 곧 예술의 나라이다. 예술은 이념의 표현이므로, 이미 이념 속으로 복귀되어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풍진과 세파에 시달리더라도 그 내면에는 이념의 고요함이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예술은 어떤 풍파에서도 자신의 쾌활함을 잃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언급한 ‘눈물 속의 웃음[Lachen durch Traenen]’이라는 형상이다. 헤겔은 무리요의 그림 거지소년을 예로 들고 있다.
작품 속의 거지 소년은 헐벗고 더러운 모습이지만 따뜻한 햇빛이 그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이를 잡고 있다.
[1] 헤겔에서 예술이 미의 개념을 넘어서 추의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헤겔 연구자가 제시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안네마리 게트만 지페르트[Annemarie Gethmann-Siefert]가 <헤겔 예술 규정-미에서 추에 이르기까지>(헤겔과 근대예술, 한국 헤겔학회 편, 철학과 현실사, 2002)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1] 흔히 헤겔에서 추는 미에 이르는 계기로서만 파악되었지만 지페르트는 헤겔 미학에서 추는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념이 소여되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고전주의 시대 이념은 미적인 것을 통해 주어지지만, 낭만주의 시대 이념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통해 드러나며 그런 부정적인 것 가운데 특성적인 것(범죄적인 것) 또는 추 즉 부조화도 포함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절 그리스도의 모습을 고전주의 시대 아폴로 신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에 대해 헤겔은 비판적으로 보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페르트는 헤겔의 예술 개념이 왜 미뿐만 아니라 추까지도 포함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2] 헤겔, 미학강의 1, 216쪽
[3] 헤겔, 미학강의 1,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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