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8 -고독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8-고독
1)
20년대 중반 호퍼의 욕망구조는 상상적 동일화 또는 나르시시즘적인 상태로 발전했다. 이어서 20년대 말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30년대 걸쳐 호퍼의 욕망 구조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30년대 후반 호퍼는 정신증적인 자기 폐쇄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제 그런 발전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호퍼의 욕망 구조의 각 시기를 칼로 두부 자르듯이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각 시기는 전후 시기와 중첩되면서 발전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0년대 말 호퍼의 그림 ‘호텔방(1931년)’에는 고독한 여성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자리에 머무르지 못한다. 그들은 창가에 돌아앉아 있기도 하며, 길 거리의 카페에 혼자 있기도 한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또는 앞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여행 중의 호텔 방에 있기도 한다.
대체로 그들의 모습은 이동 중에 있지만 자기 내면 속에 침잠되어 있어서, 마치 방향을 잃거나 길을 잃은 모습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 자주 팔루스를 상징하는 것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주인공 여성이 상실한 것, 정신적 고향, 동경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의 그림 ‘호텔방’보다 먼저 그려진 1927년 그려진 ‘자동기계’라는 작품을 보자.
여성은 상당히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녹색의 외투 속에 붉은 원피스가 보인다. 파티에 나갈 복장이다. 그런데도 자동 판매대 앞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초초한 빛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갈 곳을 잃어버린 듯,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화병, 여기서는 붉은 꽃이 꽂혀 있다. 여인의 소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화병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녀는 커피를 앞에 두고 마시기보다는 들고 그 향을 음미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싶은 상념에 잠겨 있다. 아득한 먼 시절, 화려했던 그날을 상기하는 것이 아닐까?
충격적인 것은 자동판매대에 아마도 들어있어야 할 여러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퍼는 자동판매대 전체를 검은 색으로 칠해 버렸다. 그 표면에는 방안의 전등이 반사되어 희게 빛난다. 그 전등은 이제 닫혀 버린, 다만 기억 속의 어떤 것 속에 잠겨 있는 여인을 비추어 준다.
2)
이 그림은 앞의 ‘호텔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 ‘부루클린의 방’(1932년)이다. 부루클린이라면 호퍼의 부부가 살았던 곳이다.
여성은 부루클린에 있는 자기 방에 있으나, 창가에 앉아 있다. 아마도 그녀는 실패하고 만 여행에서 돌아왔을 것이다. 집안이 답답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실패하고 말 여행을 또 떠날 수도 없다.
그녀는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20년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밖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속에 잠겨 있다. 아마도 책을 읽는 듯한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의자 등받이를 통해 보이는 검은 드레스일 뿐이다.
정작 그림의 한 가운데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온통 받고 있는 것은 화병이다. 화병은 그녀의 검은 옷과 대조되는 흰 꽃이 꽂혀 있다. 화병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그 크기가 앉아 있는 그녀의 크기와 거의 같을 정도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꽃이 꽂힌 화병은 늘 그렇듯이 팔루스를 상징한다. 하지만 붉은 꽃이 아닌 흰 꽃이니, 기억 속에서 빛나는 꽃이 아닐까?
그녀는 화병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 앞에는 붉은 건물이 있다. 그 건물 너머 뉴욕의 빌딩 가의 모습이 마치 굴뚝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뉴욕의 마천루, 화려한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녀는 이제 아무 기대도 없다.
3)
1938년 제작된 작품 293열차 c칸에서 여성은 다시 여행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푸른색 드레스와 푸른색 모자 속에 온몸이 팽팽히 긴장되어 있다. 황혼이 지는 듯 어둑한 가운데 열차는 다리 옆을 지나가고 있다.
이 다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그 다리가 아닌가? 그것은 건너가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작은 것이어서 마치 그림 속에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렇게 다가오는 다리에 대해 무관심하다. 기차는 빠르게 그 다리 곁을 지나갈 것이다.
그녀는 책을 보는 것 같지는 않다. 얇은 종이로 보이니, 역시 안내문이나 광고문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의자, 그리고 열차 칸의 색조는 녹색인데, 이 녹색은 호퍼에게서 항상 우울, 멜랑콜리의 색갈이다. 그리고 마치 팔루스를 닮은 전등이 그녀의 등 뒤에 있다. 전등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기차의 다른 전등 빛을 반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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