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갈무리, 2022-05-31) 서평 [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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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한동석(시각예술인)

 

공간이 3차원의 다양체인 것처럼, 『들뢰즈 다양체』는 편지들,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들, 청년기 저작들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껏 발표되지 않았거나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이 텍스트들은 질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의 사이에, 혹은 저변에 자리 잡고는 곧 다른 저작들의 시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좋아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의 막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진동,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며 알게 모르게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메아리와 흡사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던 사이에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꽂이는 조금 더 비좁아져 있었고 들뢰즈에 대한 내 마음은 조금 더 부산해졌다. 새 책의 낯선 느낌이 전해지며 방은 잠시 나와는 무관한 듯 느껴졌고 순간 기존의 물건들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부 편지들」에서는 ‘친구’ 미셸 푸코를 포함한 여러 동료 철학자들, 흠모하는 예술인들, 여러 저작을 통해 협업을 펼쳤던 펠릭스 과타리, 들뢰즈 철학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생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향해 띄운 그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들뢰즈가 평소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기에 발신 메시지로만 남았지만, 문장은 때로는 자잘한 속마음을, 때로는 그지없는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각 인물들과 맺은 관계의 고유성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사뭇 다른 어조에도 철학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무엇보다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힘입어 들뢰즈의 사유가 발전해나가는 내밀한 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새로웠고 들뢰즈의 철학적 고민들이 여타의 저작에서보다 쉽고 간명하게 표현된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가장 호기심을 끄는 편지는 과타리를 향한 것들이었다. 협업이라는 때로 험난할 수도 때로 흥미로울 수도 있을 과정에 대한 일반적이며 막연한 궁금증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뢰즈 혼자만의 저작과 과타리와의 협업이 낳은 저작을 연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물음이, 이들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으로 이끌었다. 먼저 편지에서 드러나는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의 가족주의에 대한, 또 이를 너무나 손쉽게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응시키려는 당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과타리를 ‘야성적 개념의 놀라운 발명가’라고 부르며 ‘무의식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서 과타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기계’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무의식을 죄의식과 더불어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법과도, 위반과도 무관한 것으로서 긍정하는 과타리의 입장을 무의식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고 칭송하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동의와 지지의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과타리와 더불어 분열증적 생산 기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나가고자 한다.

편지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종종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에 더해, 그럼에도 이를 서로에게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은,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구절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결과를, 철학자로서 보다 심대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들뢰즈에게만 귀속시키는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아르노 빌라니와의 편지에서 과타리와의 공저를 들뢰즈만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의 분석에는 독창적일 모든 권리가 있지만, 그 책(『천 개의 고원』)이 본질적으로 나 혼자만의 저작이라 주장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만일 인물이 아닌 모종의 흐름에 의해 책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둘의 협업은 본래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본래의 물결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파장을 형성하는 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녹음에 기초한 또 다른 인터뷰 자료가 2부에 이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들뢰즈는 편지 속에서 종종 여러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업무와 실생활에 쫓겨 저작과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 논문준비생에게 그의 철학을 연구해서 현실적으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당시 프랑스 주류 철학계가 들뢰즈에게 취했을 껄끄러운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은 왠지 모를 공감을 자아냈다. 감성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향하며 전복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철학자가 마주했을 학자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순탄치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험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쉽게 수긍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대한 양의 역작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바라보며 개인의 천재성, 혹은 독특성의 발현과 그에게 사회가 되돌려주는 고난, 이들에 대한 선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을, 혹은 운명적 조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2부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는 들뢰즈의 그림들로 시작된다. 몇몇 그림은 ‘괴물’을 묘사하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있었다. 「1부 편지들」에서 빌라니가 띄운 ‘당신은 괴물인가요?’라는 질문에 들뢰즈는 괴물이란 ‘그 극단적 규정성이 미규정성을 완전하게 존속시키는 그러한 어떤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한 강한 공감과 더불어 무언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느껴지는 현기증을 함께 담아 이 문장에 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기억에 비하면, 괴물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게다가 평범하기까지 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우스꽝스럽게, 또는 그런대로 재밌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4. 평생 친구인 장-피에르 벙베르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들뢰즈의 자화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좋았지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복잡한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친구에게 말을 하라고, 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그는 친구의 목을 매우 솜씨 좋게 어루만져 친구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헌정했던 스승이었으며 훗날 절연했던 페르디낭 알키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알키에의 저작에 대한 들뢰즈의 2편의 리뷰에서 그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키에가 ‘초현실을 피안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낳는 분리의 원리로, 시를 낳는 이행의 원리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비현실에서 현실로 의지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규정했다는 대목은, 들뢰즈가 발전시켜나갔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내재성의 철학의 단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알키에가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는 진리를 넘어서고 진리의 우연적 측면을 파악한다’고 해석한 대목에서, 사유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설적인 어조로써 새롭게 정의했던 들뢰즈의 입장이 마련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들뢰즈가 철학적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여러 입장들을 그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과정은 그의 사상이 갖는 또 다른 저변은 물론, 그가 보였던 창의적 역량도 새롭게 비추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텍스트는 한때 들뢰즈가 출간을 고려했었다는 흄에 대한 강의 자료였다. 비교적 들뢰즈의 활동 초반기, 『차이와 반복』이 출간되기 10년 전 즈음에 이루어졌던 강의이니만큼 그의 사상적 진화의 출발 지점을 헤아려볼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과는 별개로, 더 나아가 저자와도 무관하게, 이 자료는 흄에 대한 강의로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간결한 표현들뿐만 아니라,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역동적인 구도와 명료한 짜임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개괄적인 이해의 계기를 고대해왔던 흄의 철학을 단지 인식론이나 인과론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총체적으로 접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어 기뻤다.

이와 더불어 2부에 수록된 여러 단편 텍스트들도 모두 나름의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음악적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단편은, 음악을 들으며 철학 텍스트를 읽어보는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청각적 환경 속에서 이 단편을 읽어보는 나름의 실험적 상황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소개하며 박자로부터 해방된 시간, 음향 풍경,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음악적 재료에 대해 다룬다. 들뢰즈의 시간, 개체, 물질, 생명에 대한 사유가 음악 속에 녹아든 듯한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3부 청년기 저작들」에서는 스물, 스물 남짓 된 들뢰즈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요 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이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할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청년기 철학자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묘사〉라는 텍스트는 어디에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여 다가가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성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 담론을 동일한 맥락상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타자 철학을 새롭게 바라보며 그 한계를 느껴보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성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묘사가 낯설고 불편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 되기는 있어도 남성 되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는 소수자 되기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입장과 차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다. 언젠가 여러 시간적 양태들이 혼재하는 결정체적 시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이 텍스트와 공명할 또 다른 시공간적인 계기와 더불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독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보다 진보한 독자로서의 역량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을 들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누구도 전면적으로 견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일 이 책을 전기적 자료로 해석할 경우.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그를 다소간 한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 들뢰즈에게 삶의 파고는 철학적 작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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