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내가 읽는 『자본론』]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1. 어느 여름 날
2020년 어느 여름 날, 늦은 아침 집 앞 도로를 달리는 마을버스의 엔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의자에 걸려 있는 옷을 주워 몸에 걸친다. 코로나19가 무서운 나는 가방과 함께 마스크를 챙긴 다음 집 밖으로 나선다. 학교로 향하는 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텀블러에 받아간다. 정문 옆 대학병원 입구로 의료용품을 실은 수레가 향한다. 그 뒤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학교에 들어서니 길목 곳곳을 서걱서걱 쓰는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교통정리를 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 하고 학교 건물로 들어간다. 어차피 수업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 하지만 행정실에 들러야 해서 학교에 왔다. 행정실 방문 전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켠다. 수업을 들었는지 잠을 잤는지 잘 모르겠다만 수업은 끝이 나고, 행정실로 가서 내가 다음 학기 졸업이 가능한지 마음 졸이며 확인을 받는다. 다행스럽게도 졸업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바친 돈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 가기는 좀 그렇다. 배달음식어플을 켜고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고민해본다. 고민은 복잡했지만 답은 언제나 그렇듯 자장면이다. 요청사항에 ‘양파 많이 주세요’라고 적은 뒤 배달이 오기 전 한 숨 자기로 한다. 아차, 배달주소를 잘못 입력했다. 재빨리 음식점에 전화를 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으로 배달 주소 변경할게요. ㅎㅎ’ 조금만 늦었으면 점심 먹으러 다시 집에 갈 뻔 했다. 배달이 왔다. 후루룩 자장면을 먹는다. 다 먹고 그릇을 내놓으려 보니 요즘은 중국음식점도 일회용 그릇을 쓰나 보다. 지구 생태와 환경에 죄를 지었다는 아픔에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일회용 그릇을 버린다. 달력을 보니 <e 시대와 철학> 원고 마감일이 코앞이다. 밀린 자본론 에세이 연재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쓰레기통 비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뜨고 있다. 아까 학생회실 소파에서 10분만 잔다는 게 열 시간이 되었나보다. 내 인생 이래도 괜찮을까?
위의 글은 2020년 여름 어느 날을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이 쓴 하루 일기이다. (절대 필자 본인 인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일기 내용을 보면 참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여러 노동자들이 엿보인다.
한 번 간단하게 나열해보자. “버스기사, 바리스타, 택배기사, 의사, 간호사, 미화원, 수위, 강사, 행정교직원, 배달원, 콜센터 직원 등…….”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들만 해도 이정도이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그 형태도 방법도 결과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이름 아래 묶인다. “노동자”
2. 노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 생산을 위해 쓰이는 노동을 단순화하여 분석한다. 실상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탐구하는 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규명하였다. 그 노동력을 투입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노동’이다.
노동은 노동을 행하는 사람과 노동환경의 구성, 노동과정의 끝에 나올 완성품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가진다.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와 망가진 에어컨을 수리하기 위해 가정집 출장을 다니는 에어컨 정비공, 이 둘의 노동형태가 다름은 자명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서로 다른 이들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상호 비교·분석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기능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함으로써, 가치[대상화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자기를 증식하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1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노동의 형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노동이 가치를 증식시켜 자본을 불려준다면 자본가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만큼 재생산될 수 있게 하면 된다.
다시 다른 입장에서,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입장으로 가보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형태의 노동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본가들에게 인간 철수, 영희, 바둑이는 없다. 그들은 이 세 명의 인간을 노동자 1, 노동자 2, 노동자 3으로 본다.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이 열악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와 나눠가져야 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해고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자’이기 때문이지 ‘방직’노동자라서, ‘청소’노동자라서, ‘IT’노동자라서, ‘사무’노동자라서가 아니다.
3.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서 ‘전노협’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건설운동의 영향을 받아 1990년 결성된 단체로, 이름 그대로 전국 노동조합들의 협의회, 상위단체였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전노협 진군가’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2이라는 대목을 인용하고자 전노협을 언급했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생각하기에,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를 이 구절이 잘 나타낸다고 봐서이다.
작업장이 어디에 있든, 그 작업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들은 전노협 아래에 뭉치고자 하였다. 이는 활동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 모든 활동들이 노동이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포항 제철소에서 쇳물 사이를 누비는 노동자와 광주 자동차공장에서 볼트를 조이는 노동자, 새벽같이 서울 빌딩숲을 오가며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노동자와 대전 국가연구단지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같은 노동조합 상급단체 아래에서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앞 2.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어떤’ 노동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특정한 노동에 종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을 한다.
4. 노동운동을 한다!
필자 주변에는 노동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필자 역시 노동 현장 혹은 노동운동 현장을 몇 번 직접 경험했었다. 사람들은 노동현장에서 여러 부류로 나뉜다. 우선 노동현장의 사람들은 크게 노동자와 사용자로 나뉜다. 여기서 사용자는 논외로 치고, 같은 노동자라도 법적으로 어떤 고용형태를 가지냐에 따라 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또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도입부의 일기에 나온 것처럼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진다. 버스를 운전하는 운수노동자는 버스기사, 학교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는 청소부, 이렇게. 혹은 노동숙련도에 따라 숙련노동자, 미숙련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다는 경우도 있다.
노동운동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이렇게 이질적인 겉모습들을 가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들리는 구호 중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3이라는 구호가 있다. 이 구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구호이자, 사회 주류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범주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이라는 외연 아래에 한데 묶는 구호이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대오로 뭉칠 때 그들은 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조직된 모든 노동자 수의 합 그 이상의 시너지로 나타난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자 조직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수와 범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히 필자가 노동운동이 그렇게 전개된 이유를 짐작하자면, 쪽수가 곧 힘이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그 조직이 단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이 유효했고 유효한 이유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형태가 모두 다를지라도 그들이 모두 ‘노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오늘 뒤풀이 비용은 조합비로 결제하겠습니다.”
필자도 나름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직접 느껴 본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보일 수도 있겠는데, 필자는 회식자리에서 그 힘을 느꼈다. 노동운동 현장을 따라다니다 보면 필자도 투쟁 마무리 회식에 스리슬쩍 합류할 때가 있다. 참 감사하게도 필자는 아직 얻어먹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돈을 안 버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 현장에 함께했던 노동자 개개인들과 필자가 일대일로 만난다면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밥을 사줄 수 있을까? 그분들이 일해서 돈을 번다고 살림이 풍족할 리가 없다. 빠듯한 가계부이지만 그분들이 나 같은 ‘룸펜’에게 밥을 사주실 수 있는 이유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회식들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임금에서 각출한 조합비로 처리되기 마련이다. 아마 그 조합비가 없었다면 나는 밥을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연재 글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현대 한국의 대학생이 쓰는 글’이라는 연재의 주제와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연재분의 핵심 글 꼭지였던 『자본론』 제1권 제3편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읽으며 노동의 껍데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끊임없이 생각났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장악한 뒤 노동과정에서도, 가치증식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을 담지하고 있는 하나의 살덩어리로만 여겨져 왔다. 그들이 하나의 전인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의 담지자로 취급당해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뭉쳐야만 했다. 노동해방의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상을 상상해본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 ‘노동계급’이라는 단어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해방 그 이후에야 사람들은 노동력의 담지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자로서 생활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소 주변에 노동자 가족, 이웃,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 (99% 확률로) 노동자가 될 사람으로서 느끼는 점들이 많았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며 두서없이 그 느낌들을 적어봤다. 그럼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노동자’가 아니라 ‘어떤’ 노동자라는 관점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았을 때 느낀 그 절망과 공포에 맞서 싸우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존경한다. 그들 중 몇몇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한다. 자신의 일만 하면 참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탄가루 날리는 발전소에서, 쇳물 흐르는 용광로에서,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바이러스 감염자들 앞에서 자신을 갈아 넣는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는다.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260쪽.
- 김호철, 김애영 작사 / 김호철 작곡, ‘전노협 진군가’(1989) 중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미조직전략조직실 선전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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