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2. 논제1 : 정의의 본질과 기원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는 세 가지 논변들은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이 그랬듯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자신의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도전들이자 안티테제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적 문제제기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그 도전들의 내용을 잘 살펴보는 것은 플라톤이 직면한 당대의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정의론의 기본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의 도전은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보다 공고하게 건설하기 위해 플라톤 자신이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터파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58e-359b]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제의 순서에 따라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정의란 무엇이고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면 좋은 것ἀγαθόν이요 부정의를 당하는 것ἀδικεῖσθαι은 나쁜 것κακόν이지만 부정의를 당할 때의 나쁨이 부정의를 저지를 때의 좋음을 훨씬 압도한다. 그래서 서로 부정의를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의를 당하기도 하며 양쪽을 다 맛보고 나면ἀμφοτέρων γεύωνται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선택할 힘이 없는 사람들로서는τοῖς μὴ δυναμένοις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서로 계약을 하는 게συνθέσθαι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법률νόμοι을 제정하고 계약συνθήκη을 체결하며 법에 따른 명령을 적법하고 정의롭다νόμιμόν τε καὶ δίκαιον고 말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며 본질γένεσίν τε καὶ οὐσίαν δικαιοσύνης이다.

* 정의롭다는 것은 부정을 저지르고 처벌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ἀρίστου 경우와 부정을 당하고도 보복을 할 수 없는 가장 나쁜κακίστου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μεταξὺ οὖσαν이다.

* 이렇게 정의는 양쪽 사이에 있는 것임에도 좋아하는 까닭은 결코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없어서ὡς ἀρρωστίᾳ 그것을 존중할 뿐이다.

* 그러나 능히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강자 즉 진짜 사내ὡς ἀληθῶς ἄνδρα(이를테면 참주)의 경우는 부정의를 저지르지도 당하지도 않도록 하는 계약 따위는 누구와도 맺지 않는다.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다. 이것이 정의의 본성φύσις δικαιοσύνης이자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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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법률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생각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일단 법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에 따르면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법률을 제정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로서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모종의 다른 법률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 내지 발생γένεσίς은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부터의 정의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의 기원 즉 그러한 정의의 기초가 되는 법률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을 자연 상태로부터의 정의의 기원으로 보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것의 의미를 단순히 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이 기본적으로 5세기 지식인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관이 그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플라톤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자리 잡은 신흥 정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에 대한 아래와 같은 분석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 글라우콘의 주장은 정의와 법률이 일정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정의의 본성을 자연의 본성, 신들의 본성에서 구하고 그것을 관습의 형태로 확립하여 그것을 사회적 삶의 기초로 삼아온 전통적인 입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입장은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전통적 입장과 달리 자연과 관습의 분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자연 상태라기보다는 그리스의 역사에서 자연과 관습의 분리가 진행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준다. 글라우콘의 입장을 탄생시키는 배경으로서 글라우콘 스스로가 진단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도 그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 글라우콘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 현실은 부정의를 저질러도 처벌은커녕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가장 강한 자)과 부정의를 당해도 보복은커녕 나쁨만 입는 사람들(가장 약한 자) 그리고 힘에 있어서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 중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강자들처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자기들끼리는 서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기적인 존재인 까닭에 늘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제의 형식을 빌어 서로 약속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상호 합의하에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여 법이 정한 그 명령을 적법한 것이자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이 여기서 말하는 사회 현실 속 사람들이란 계층적으로 아테네 당대의 귀족층과 시민계층 그리고 노예 등 최하계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정의와 법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글라우콘의 주장은 법률의 강제적 집행과 관리를 주도할 권력기구 내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종종 국가 형성과 관련한 이론들 가운데 사회계약설적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지하다시피 사회계약설은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합목적성과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해주는 핵심 이론으로서 17세기 근대 국가의 성립과정과 성격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근세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태동되기 2000 여년 전에 이미 사회 중간계층인 시민 계급에 의해 주도된 사회계약이념의 원형적 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고도 주목할 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세 사회계약론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홉스(T. Hobbes, 1588~1679)의 사상과도 자주 비교된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자기보존 욕구만 가지고 있어 그 상태를 방치할 경우 마치 원자들이 부딪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계산적 이기심 또한 갖고 있어 그 이성의 규제적 통찰이 그들 모두의 공멸을 피해 사회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즉, 그들은 도덕적 자발성은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강력하게 통제할 막강한 권력기구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호 합의 하에 강권국가(Leviathan)를 세워 법률제정 권한 등 강력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여 자신들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과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의 방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홉스에게 사회 계약은 자연 상태에서 비슷비슷할 정도의 힘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계약 당사자로 참여하여 합의를 통해 최고 주권자로서 절대군주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그 주권자의 강권통치에 예속됨으로써 서로의 안전과 공존을 보장받는 것이 목표이지만, 글라우콘이 말하는 사회 계약은 앞서 살폈듯이 일단 자연 상태가 아닌 일정한 역사적 현실 상황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노예계급을 제외한 보통의 시민들이 그들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률의 제정과 그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수립이 그 목표이다. 다시 말해 최초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인 바람을 충족시키는 정부의 수립이다.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것을 태동시킨 정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른데서 연유한다. 홉스의 강권국가이론은 원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영국의 절대왕정이 위협을 받게 되자 절대왕정의 정당성을 개인주의 차원에서도 온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 상태라는 원초적 상황까지 끌어들여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은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절대왕정주의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사상은 왕권의 절대적 존엄성과 그에 대한 충성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안전보장을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비록 이기적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구가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자리 잡긴 했어도 그것이 기존의 절대군주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그 자체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홉스의 사상은 그 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근세 자유주의의 이념이 더 이상 반동에 직면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또한 증대하자 그가 내세운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국가권력의 결합이 자유방임의 한계에 대한 선구적 통찰로 재조명되면서 근세 자유주의 국가 이념의 기본틀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참주정, 귀족적, 민주정의 예를 들어가며 결국 참주건 귀족이건 시민이건 법률 제정권을 가진 강자가 진정한 강자이며 정의는 그들의 이익임을 주장하고 있다.(338d-339a) 그런데 글라우콘의 주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이 참주나 귀족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중간 계층 즉 시민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의 정의관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정치적 강자가 이제 더 이상 참주나 귀족이 아니라 민주정체 하에서의 시민임을 말해준다. 물론 귀족 계층도 여전히 사회적 강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멋대로 법을 제정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시민들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막을 정도의 힘 또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 그들이 이전처럼 법률 제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시민 계급의 법률 제정을 허락하기는커녕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언제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고 그 과정에서 결코 약자들과 상호 협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기 때문이다.(359b) 역사적으로 법률 제정의 결정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는 강제적이고 공적인 집행 기구로서 정부의 통치 권력의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민들이 법률 제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적 강자들과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 시민들이 나름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법률 제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사회계약설은 이미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합해 사회적 강자를 제압하거나 일정부분 타협이 가능해진 상황, 즉 기원전 5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정한 역사적, 시대적 현실에 조응하는 정의의 기원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 법률 제정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사회 계약의 합목적성과 관련해서도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은 홉스가 제기하는 사회계약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는 개인의 자기 보전 욕구가 절대 권력에 대한 주권 권력의 위임을 통해 관철되고 있지만 글라우콘이 제시하는 사회계약설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시민 계급이 강자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해 스스로 주권자로 나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는 이전 세기의 참주정은 물론 당대 귀족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 세기 이전에 성행하던 참주정 치하의 상황을 토대로 강자의 이익으로서 정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를 몰아세우던 트라쉬마코스의 도발은 이제 제2권에서 글라우콘을 통해 현존하는 당대 아테네 현실과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참여의식을 토대로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도전으로 대체되면서 소크라테스를 보다 강화된 방식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의 논변은 이기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일관된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테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되 논거에 있어서는 모두가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는 아테네의 역사적 현실을 끌어들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터파기 심화 작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국가>를 구상함에 있어 자신의 정의론을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처럼 글라우콘의 정의에 관한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넘어서야할 정반대의 입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중추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거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은 고대와 현대에 걸쳐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정의의 사회계약설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소수 사회적 강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다수 약자들의 방어 내지 의심 프로그램으로서, 같은 약자이자 배타적인 이기심을 갖고 있는 타인들로부터 스스로의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실로 민주주주의 본질은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방어적 의심과 투쟁에 기반 해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비록 <국가> 전체를 통해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사회계약설적 입장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켜온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물론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앞장 선 소피스트들의 입장은 오늘날 빛나는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바탕을 마련해 준 선구적 사상으로서 소중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의 주장의 배경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은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5세기말에 이르면 법률과 정의가 곧 시민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방어차원에서 성립되었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그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면서 전성기 아테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근본 동인이 되고 만다.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테네 민주정은 기원전 41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역동성을 상실한 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사회경제적 현실 앞에서 공동체의 보존보다는 시민 각자의 자기 도생을 위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정치 시스템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른바 사회적 강자로부터 시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으로 추구되던 입법 정신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들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정치적 강자로 군림하면서 시민들 서로에 대한 음해와 부의 강탈마저 정당화하고 용인되는 이른바 반공공적 자유방임의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아테네 사회를 뒤덮기에 이른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에는 이미 역설적으로 당대 아테네 민주정체 하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제기되고 전파된 세계관과 삶의 방식, 즉 자연과 관습의 일치가 아닌 분리를 통해 개인의 이기심을 본성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킨 당대의 피폐된 이기주의와 상대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 이로써 정의와 관련하여 사회계약설적 주장을 추축으로 하는 글라우콘의 첫 번 째 문제제기가 마무리된다. 첫 번째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치철학적 도전을 담고 있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제기는 인간의 본성론에 기초한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1-2-3.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359b]

* 글라우콘은 이제 358c에서 예고한 대로 두 번째 논제 즉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οἱ ἐπιτηδεύοντες 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무능ἀδυναμίᾳ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먼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임을 ‘멋대로의 자유’ἐξουσία가 주어진 가상 상황에서의 사고실험과 귀게스(Gyges)의 반지에 관한 전승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논변하기에 이른다.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임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아래의 경우를 상정하면’εἰ τοιόνδε ποιήσαιμεν τῇ διανοίᾳ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59c]

* 즉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를 부여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모두 탐욕πλεονεξία(pleonexia)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천성ὃ πᾶσα φύσις이 그러함에도 법률이 강제로βίᾳ 천성을 평등을 존중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ἴσου τιμήν 유도한다는 것이다.

 

[359d-360a]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우콘은 옛날 뤼디아 사람 귀게스γύγης의 조상에게 τῷ Γύγου τοῦ Λυδοῦ προγόνῳ 생겼다는 어떤 힘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든다.

*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옛날 뤼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는 심한 뇌우와 지진σεισμός이 있은 후 갈라진 땅 틈χάσμα으로 들어갔다가 속이 비고 문이 달린 청동 말ἵππον χαλκοῦν 속에 어떤 송장νεκρόν이 손가락에 금반지χρυσοῦν δακτύλιον를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 가지고 나왔다가 반지의 보석받침σφενδόνη을 자신을 향해 손 안쪽으로 돌릴 경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ἀδήλῳ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목자는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에게 접근하여 왕비와 간통하고μοιχεύσαντα 왕비와 함께 왕을 살해ἀποκτεῖναι한 후 왕권을 장악한다.ἀρχὴν κατασχεῖν

* 이곳에서는 ‘귀게스의 조상’이 반지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제10권 612b에서는 그냥 ‘귀게스의 반지’τὸν Γύγου δακτύλιον라고만 언급되고 있어 일부 주석가는 ‘조상’πρόγονος이라는 표현이 잘못 전승된 표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귀게스라는 인물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I권 8-13에 나오는 기원전 7세기 뤼디아 왕 귀게스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왕의 하인 또는 목자가 나중에 왕이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360b-d]

* 그러한 반지가 두 개가 있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각각에게 끼게 할 경우, 정의에 머물며 남의 것에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ἀδαμάντινος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신 같은 존재ἰσόθεον로 행세할 수 있게 된다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방향ἐπὶ ταὔτ᾽ 즉 부정의 짓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정의는 좋은 것이 못되는ὡς οὐκ ἀγαθοῦ ἰδίᾳ ὄντος 반면 부정의는 훨씬 이익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는 자발적이 아니라 부득이하게ἀναγκαζόμενος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τεκμήριον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ἐξουσία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장 딱하고ἀνοητότατος 어리석은 사람ἀνοητότατος으로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속이며 면전에서 그를 칭찬하는 것은 그들 모두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φόβον때문이다.

* ‘귀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을 경우 남의 것을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들어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의 주장 자체가 그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른 방편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인 것이다.

* 360d에서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면전에서 순수하게 정의로운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면전에서 솔직하게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거나 비난할 경우 어떤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는 것인지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면전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경우 자신이 부정의한 자임을 고백하는 형국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나 통치자들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우에서처럼 모나게 처신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염려를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참주정 치하에서 부정의를 독점하는 참주에 의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거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지레 부정의한 자로 백안시되거나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까? 글라우콘의 주장을 자연 상태로 부터의 법과 정의의 기원에 관한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일부 주석가들은 글라우콘이 법과 정의가 생기기 이전에도 ‘부정의를 당한다’(358e)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말의 의미를 그냥 ‘불이익을 당한다’, ‘해를 입는다’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 글라우콘은 정의란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서로가 약정한 방어적 성격의 것으로서 따라야할 최선의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경우 그것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탐욕적이 된다는 점에서 정의는 다만 약자가 그 자신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면 강자건 약자건 그 누구라도 그것을 자진해서 추구하겠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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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콘이 제기한 두 번째 논변 특히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인간 본성론 내지 도덕 심리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관련 국내 논문들 : 김영균,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기게스의 반지와 두 가지 삶의 방식’ <인문과학논총> 30, 청주대 학술연구소 2005. 임성진, ‘글라우콘의 도전’ <철학사상> 제4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 양선숙, ‘만약 당신이 기게스의 반지를 얻게 된다면’, <Knu law review> 제3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2012. 이민규, ‘기게스 반지의 선택’, <언론정보학연구> 3권 대구경북언론학회 2001.4)

* 글라우콘이 전하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형식으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중대한 물음들을 담고 있다. 물론 내용 자체는 허구라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주장과는 달리 어떤 객관적 증거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일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인간 누구도 완전하게 빠져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다. 특히나 글라우콘이나 우리가 서 있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사회현실에서 타인의 비밀을 타인 몰래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지배 욕구 내지 절대 우위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귀게스의 반지가 상징하는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인간 욕망의 극치를 표현하는 소재로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고 도덕의 근원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가 되어 왔다.(물론 투명인간이란 말은 오늘날 타인의 관심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당하는 인간의 의미로도 쓰인다). 과연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주어지고 게다가 그 자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는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오직 하나의 방향 즉 부정의하고도 부도덕한 행위를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만약 그와 달리 누군가 그와 동일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 즉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의 타고난 선의지 내지 선한 본성에서일까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겪어온 시행착오와 쾌락의 역설과 같은 수많은 인생 경험들 때문에서일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수치감 내지 도덕의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정의와 질서가 가져다 준 모종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역사를 통해 고대 성선설과 성악설에서부터 근대의 공리주의, 행동주의, 인본주의 심리학,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수많은 답변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나 철학적 신념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누구도 그 어떤 대답이 맞거나 그 대답이 다른 대답을 압도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양태 자체가 인간 본성의 중층성과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쨌든 크든 작든 일시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욕망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그것이 빚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적 영역에서건 공적 영역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로 글라우콘의 문제 제기는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실로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이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향한 유혹은 늘 치명적일 정도로 뿌리가 깊어서 그것을 욕망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현실의 거의 모든 영역이 크게 뒤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선 공적인 영역에서 모든 국가가 갖추고 있는 첩보기관은 다른 나라 또는 자국 신민들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비밀스런 탐지와 음모를 권력과 나라의 안전을 보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정당화하고 있고, 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기업과 개인 또한 자기들의 부와 권력, 배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타인들에 관한 정보를 그들 모르게 비밀스레 탐지하고 독점하고 활용하려 든다. 고객 서비스를 내세워 이루어지는 기업들의 개인정보의 수집활동이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을 포함한 비밀스런 사적 영역에 관한 정보까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대규모 포털과 국가기관의 정보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치 벤담(J.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나 오웰(G. Orwell)의 빅브라더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들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공적 영역에서 부와 권력에 대한 다함없는 의지로만 표출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적 영역에서 만연해 있는 몰래 카메라를 통한 도촬과 도청 행위 등도 자본과 권력에 침식된 개인의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차원에서건 성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차원에서건 그 모두 귀게스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일탈 행위 즉 타인에 대한 변태적인 지배 욕구 내지 병적인 인정 욕구의 소산들이다.

* 이런 측면에서도 이곳에서 글라우콘에 의해 제기되는 두 번째 도전은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물론 오늘날 현대인이 직면한 피폐한 삶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앞으로 펼쳐질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그 문제의 심각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아니 그 이상으로 실로 엄청난 의미와 무게를 갖고 우리들 모두에게 소망이자 믿음으로, 빛으로 다가오고 또 반드시 그렇게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글라우콘의 귀게스 반지 이야기를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지진과 뇌우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충격과 상처들이고 땅의 갈라짐은 정신의 분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행위 청동말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치 무의식에 대한 응시를 말하는 것인 양 느껴지고 청동말 속에 반지를 낀 채 누워있는 송장은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자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서 프로이트의 id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송장 역시 똑같은 반지를 끼고 살다가 죽은 권력자의 송장이라는 점에서 꿈을 통해 나타난 무의식 속 귀게스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귀게스가 반지의 능력을 알고 취한 첫 행동이 최고의 금기인 최고 권력자의 여인을 간통하고 그러한 성적 지배를 통해 최고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것도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를 연상시킨다. 사실 프로이트의 역동적 성격론이 플라톤의 영혼 3분설에서 착안되었다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석받침을 안쪽으로 돌리면(반지 자체를 손바닥 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반지위에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보석받침을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것을 말할 것이다) 목동의 모습이 다른 목동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웰스(H.G. Wells)의 소설에서 나오는 투명인간이 알몸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다른 설정이지만, 귀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말 속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도 뭔가 그의 욕망이 맞이하는 결말에 대한 플라톤적 시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송장이 사람 크기보다도 크다는 내용도 일정하게는 나름의 고인류학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거나 초인적 존재임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에 이어 그가 앞서 밝힌 논제 제기의 기본 순서와 목적에 따라 이제 세 번째로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실로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위한 아주 깊고도 깊은 터파기 작업이 글라우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