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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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8. 종로 일대 탐방

 

제7강.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강연 : 윤태양(건국대 연구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동학혁명의 현장을 직접 탐방함으로써 책 속에 갇힌 역사를 몸소 경험해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에는 곳곳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종로 일대를 윤태양 교수의 이야기와 함께 ‘서울 속의 동학혁명’을 테마로 걷는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귀금속 종합매장으로 변모하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이었던 단성사 자리에 그보다 더 예전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하였지요. 단성사 터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고문을 받았던 좌포도청(左捕盜廳)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을 잡으려고 만든 좌포도청이 조선 후기에 주로 타 당파의 정적을 제거하고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등 사회·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인물을 취조하거나 형을 집행하던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종로3가 9번 출구 벽면에 새겨진 처형되기 직전 최시형의 모습을 보니, 민중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고,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했던 그의 정신이 느껴졌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운현궁입니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이 장소가 동학혁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는데요.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흥선대원군과 대화를 나눈 곳이 바로 운현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봉준이 운현궁에 문객으로 3년 정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하여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종 부부와 민비 척족세력의 부정부패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동시에 민비 척족 세력은 임오군란의 군인들과 동학혁명의 농민들이 모두 분노했던 대상이었습니다. 서울의 유명 유적지가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과 관련 있었다는 점이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운현궁 바로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수운회관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인 천도교 중앙대교당(1921년 건립), 그리고 세계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함께 있습니다.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어린이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이 곳에 거점을 두고 독립운동과 어린이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참, 소파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라고 하는 군요. 어린이를 존중할 대상, 인격으로 보는 평등 의식의 바탕에 바로 동학의 근본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인사동을 거쳐 들른 곳은 태화빌딩입니다. 이 빌딩 앞에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 적힌 커다란 기념비와 동판으로 제작된 독립선언문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유혈사태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따로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경찰에 자진 투항한 장소가 지금의 태화빌딩이 있는 자리에 있던 고급 음식점 태화관이었다고 합니다.

종각역 앞 전봉준 동상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동상이 세워진 바로 그 자리가 전봉준이 처형당한 전옥서 터입니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전옥서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촛불혁명의 시대를 맞아, 전봉준과 동학혁명 세력이 추구했던 저항정신을 기리고자 2018년 4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정부의 부정부패와 가진 자들의 횡포에 저항한 농민군들, 식민지배 시기에 민족해방을 꿈꾸고,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어린이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했던 천도교 지식인들, 마지막으로 2016년 겨울, 전봉준의 저항 정신과 공명하는 촛불혁명까지, 오늘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동학이 그저 어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저항운동으로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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