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④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④
서론에 이어 본문 강해는 앞에서 밝힌 강해취지에 따라 텍스트를 처음부터 빠짐없이 천천히 읽어가며 주요 부분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정암학당 현장 강의에서는 텍스트의 일정 단락을 청중들과 함께 읽고 난 다음, 강사가 다시 읽어가며 설명을 하지만, 이곳 강의록에는 본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텍스트 해당 부분 독서를 병행하며 본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제 1 권]
<세부 목차 >
-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 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 케팔로스와 대화 : 노년의 즐거움과 재산(328b~331d)
2-1(328b-328c) : 소크라테스, 케팔로스를 만나 노년의 즐거움을 묻는다.
2-2(329a~329d) : 케팔로스의 대답 – 노년의 즐거움은 노령이 아닌 생활방식에서 온다.
2-3(329e~330c) :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이 과연 생활 방식인가 재산인가?
2-4(330d~331d) : 노령의 즐거움과 재산의 관계를 논하다 정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다.
- 폴레마르코스의 정의(331d~336a)
3-1(331d-332b) : 폴레마르코스,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즉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334c~336a) : 기능과 훌륭함(덕)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 트라쉬마코스의 정의(336b~354c)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
4-2(338c~339a) :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다.
4-3(339b~340b)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이 잠깐 끼어든다.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4-5(341a~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4-7(344d~345e) : 소크라테스의 절망과 분노
4-8(345e~346e) :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4-10(348a~349a) :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 정의와 부정의는 각각 덕과 악덕.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
4-11(349b~350c) :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4-12(350d~352c) :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본문 강해>
-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327a]
*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어제 나눈 대화를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는 그가 글라우콘과 함께 아테네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처음 열리는 트라케인들이 주최하는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축원과 구경을 마친 후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 ‘어저께 나는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네.’κατέβην χθὲς εἰς Πειραιᾶ μετὰ Γλαύκωνος <국가>의 그리스어 텍스트는 ‘내려갔네.’κατέβην라는 동사로 시작한다. 이 첫말이 갖는 함축을 제7권 서두의 동굴의 비유에서 지혜로운 자가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당연히 동굴의 비유 부분에서도 그 동사가 나온다.(516e) 대화편의 구조를 크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주장들을 논박하거나 깨닫게 하여 지혜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어제’χθὲς 거의 밤이 샐 정도로 오랫동안 토론을 했음이 분명함에도 그에 이어 오늘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도 이처럼 ‘어제’ 대화에 이어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티마이오스>에서 ‘어제’(17a)했다고 요약 인용되고 있는 이야기가 <국가> 4권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티마이오스>의 대화 설정 시기가 <국가>에서 이루어진 대화 다음날이고 그에 따라 <국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이 <티마이오스>의 등장인물들 즉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실제로 5세기 플라톤 주석가로 유명한 프로클로스는 이를 근거로 <국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를 3부작으로 쓰여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된 내용은 <국가> 전체 내용도 아니고 4권의 내용도 일부만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에서 그 내용이 어제 이야기한 내용에서 빠진 것 없이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19a~b).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국가>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에서 일부 요약에 불과한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플라톤의 핵심 정치사상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중요한 내용을 그 날 하루만 표명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 두 대화편의 대화 설정시기가 연속적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 페이라이에우스Πειραιεύς는 아테네 도심으로부터 8㎞ 떨어진 아테네 외항이다. 페이라이에우스는 페리클레스의 제국화 정책 이후, 국제적인 교역이 급증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아테네와 외부지역을 연결하는 핵심 항구이었을 뿐만 아니라 에게 해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로서도 중심적인 기능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싸고 스파르타와의 전쟁 기운이 커지자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7년 막강한 스파르타의 육군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네를 방어하고 아테네 도심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도심 성곽과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성(μακρὰ τείχη)을 구축한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아티카를 침공하면 지역 농민들을 소개(疏開)시켜 장성으로 피신케 한 후 스파르타 군이 복귀하면 해군을 동원하여 스파르타 해안 마을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앞서 살폈듯이 좁은 장성 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 거주함에 따라 기원전 429년에는 참혹한 역병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그 여신께 축원도 드릴 겸’προσευξόμενός τε τῇ θεῷ이라는 말에서 표명되고 있는 여신신은 354a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축제가 벤디스 축제(Bendideia)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벤디스(Bendis) 여신임이 분명해 보인다. 벤디스 여신은 아테네의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에 해당하는 트라케 지방의 여신으로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각 나라마다 숭배하는 주신이 있었고 주신들 이외에도 또 각 도시와 지방, 마을 마다 자신들을 가장 잘 돌봐줄 것으로 여겨지는 각기 다른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리스 전역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을 비롯해 지역별, 개인별로 공물을 바치고 안녕을 기원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신전들과 제단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기적으로 제의와 축제가 열리곤 하였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종교 생활 즉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은 오랜 동안 전통적인 규범이자 관습으로서 그들의 일상적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신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호메로스 시가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전과 다름없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제의와 축제는 물론 공적 기부금까지 동원하여 수시로 펼쳐지는 시가를 주제로 한 합창극·연극 공연은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는 일종의 교양교육이자 세계관 내지 가치관 교육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의 시가와 시인 비판은 단순한 예술 비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세계관·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인 것이다. 수호자 교육에서 시가 교육이 생각 외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제는 수호자 교육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살필 것이다.
* 소크라테스도 위와 같은 아테네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에 따라 제의에 참석하여 신들에게 기원을 드리고προσεύχομαι 있다. 이곳에 나오는 ‘본바닥 사람들(ἐπιχώριοι)의 행렬’은 아마도 트라케 사람들의 벤디스 축제를 동반 축하하기 위해 본토 주민들이 펼친 아르테미스 여신 경배 행렬일 것이다. 이미 국제화된 아테네에서 본토 주민과 거류외인이 큰 거리감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 ‘트라케인들’οἱ Θρᾷκες 이들은 본토 주민들과는 구별되는 거류외인들((metoikoi 혹은 synoikoi)로서 대부분 아테네의 상업 장려 정책에 의해 페이라이에우스에 정착한 트라케 출신 즉 발칸반도 동북부에서 내려온 상인들 또는 라우레이온 은광 채굴을 위해 초청된 광산 기술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유입이 늘어남에 따라 아테네는 그들의 관습과 제례도 허락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페이라이에우스에 트라케인들의 여신인 벤디스 신전도 세워졌고 축제도 개최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 관련 비각문에 대한 연구 가운데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벤디스 축제가 아티카에서 열린 시기는 기원전 42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앞서 살핀 대화편 상정 시기를 최대 429년까지 높여 잡을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Christopher Planeaux, ‘The Date of Bendis Entry into Attica’, The Classical Journal 96.2, December, 2000. pp165-195)
*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주민들은 자유민(eleutheros)과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자유민은 다시 시민(politēs, 참정권을 가진 완전 시민으로서 성인 남성들과 불완전 시민으로서 그들의 가족)과 비시민(거류외인+ 그의 가족, 시민과 비시민의 자식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처럼 시민은 곧 자유민이지만 자유민이 곧 시민은 아니다. 그리고 비자유민에는 농노(농업노예)와 가사노예(가정교사, 보모 등)가 있었다. 이러한 계급분화는 그리스의 모든 국가가 정복국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25년 경 아테네의 인구는 시민은 29,000명 그들의 가족은 87,000명 거류외인은 7,000명 그들의 가족은 1,4000명, 농노와 노예는 81,000명, 총 218,000명 정도였다. 완전한 시민권은 곧 참정권(koinōnein archēs)을 의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민주정은 주민 14%에 해당하는 성인 남성 이른바 완전 시민들만의 민주정이었다.
* 아테네에 타 지역 그리스인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초 클레이스테네스가 자신의 정치적 배후세력으로서 민중의 수를 늘이려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테네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기원전 48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테네에 거주하는 타 지역 그리스인 출신이 시민이 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비교적 국제적인 도시였던 코린토스 정도를 제외하면 나라마다 외국인도 별로 없었고 스파르타는 아예 정책적으로 외국인을 추방 또는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만은 해를 거듭할수록 외국인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이후부터 이른바 metoikos 즉 거류외인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여지면서 법적인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어떤 이는 metoikos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 된 것은 427년 초연된 아이스퀼로스의 연극<페르시아인(Persai)>이었다고도 주장한다. (James Watson. “The Origin of Metic Status at Athens”. The Cambridge Classical Journal 56, 2010. p. 265) 이후 거류외인은 시민권은 취득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유인으로서 영주권과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각종 종교행사와 제례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참정권을 제외한 기타 공공사업에 권리와 부담을 함께 가졌으며 때로는 군역을 지기도 하였고 일부 부유층은 자비무장인(hopla parechomenoi)이 되어 전투에 나서기도 하였다. 다만 그들은 시민이 아니어서 법정에 설 때에는 한 시민을 보호자(prostates)로 내세워야 했다. 그리고 세금의 경우, 이들은 식솔의 수에 따라 소정의 인두세(metoikion)를 내야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상업 진흥정책에 따라 다른 세금에서는 면제되어(ateleia) 점차 이들의 지위는 향상되었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63쪽 참고) 이후 이들의 상당수가 부를 축적하여 아테네 부유층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에게도 공공기부금 헌납(leitourgia: 비극·희극의 상연에 불가결한 합창대 운용비용, 함선의 장비 및 시설 등 공공사업비를 위한 기부제도)이 요구되었고 부정기적으로 과세된 특별재산세(eisphora)의 납부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4세기에 들어서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 시민들 가운데 중추적인 계층은 조상 대대로 이어 받은 토지 소유자로서 2, 3명의 노예를 두고 농업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중소 자영농들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농업이야말로 자유인에 어울리는 직업으로 여겨졌으며 상공업은 시민이 아닌 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르러 상업이 발달하고 이오니아 등 외지에서 올리브 수요가 급증하자 토지는 식량생산 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용 올리브 재배지로 크게 바뀌어 무역업은 물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도자기 산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른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경제는 식량생산과 물물교환 중심의 전통적인 경제 틀에서 벗어나 교환가치 중심의 화폐경제, 상업경제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의 변화는 농업경제 중심의 전통적인 시민적 삶의 방식을 해체하는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업주의적 재편은 특히 페리클레스 등장 이래 아테네가 제국화되면서 전통 그리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혼란과 내분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당대 주변 국가들 특히 아테네와 패권경쟁을 하던 스파르타인들에게는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 이외의 상업주의적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 이후 동맹국으로부터의 조공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장기적인 경제입국을 위한 비축과 투자 개념은 희박했고 대부분의 경비가 파르테논 등 대규모 신전 건축을 포함하여 시민들의 정치 참여 및 배심원 수당으로 지출되었다. 예산개념도 따로 없었고 실제로 근대국가가 재정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몇몇 분야( 예컨대 공교육, 공공수송 등 사회간접자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군비를 비롯한 나라에 필요한 경비 또한 기본적으로 동맹국의 조공과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의 공물 그리고 부유층의 공공기부제(leitourgia)에 크게 의지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시민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되었으며 직접세는 필요할 경우 민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상시적인 세입의 주요항목은 무역업의 증대로 생긴 관세 수입정도였다. 아테네는 최소한 재정운용에 한해서는 오늘날의 최소국가와 소비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페리클레스 사후 실권을 잡은 클레온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어 동맹국의 조공 요구도 크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시민의 정치 수당도 인상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이기는 하지만 데미스토클레스가 라우레이온 은광이 발견되자 그곳에서 생긴 막대한 부를 시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페르시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삼단노선 건조에 투자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시민 모두가 국가 연금자이다시피한 이러한 포퓰리즘적 경향과 원시적인 재정정책, 행정의 비전문주의는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전성기 동안에는 민주정하 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지만, 시라쿠사 원정 실패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참담한 패배를 지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각자도생을 위한 민중들의 이기심과 선동정치, 부자 갈취, 무고와 소송 등 사회적 병폐의 원인이 되면서 공동체의 분열과 몰락을 재촉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123-130쪽 참고) 이러한 점에서 <국가>가 이 혼란기를 배경으로 아테네의 상업주의를 대표하는 세력이자 오랜 전쟁기간 동안 무기 판매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케팔로스와의 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국가>의 집필 또한 이후 아테네가 더욱 쇠락하여 거의 재기 난망의 상태로 접어들던 기원전 375년 전후에 이루어졌다.
[327b]
* 소크라테스는 시내로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폴레마르코스의 시동παῖς을 통해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기서 시내τὸ ἄστυ는 폴리스 ‘아테네’의 중심을 이루는 아테네 성곽 내 도심 지역을 말한다.
* ‘시동이 내 뒤에 와서 옷을 붙잡고서’καί μου ὄπισθεν ὁ παῖς λαβόμενος τοῦ ἱματίου.
말을 걸기 전 옷을 붙잡는 장면은 <국가> 제5권 서두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나온다.(449b)
[327c]
* 폴레마르코스는 아테이만토스, 니케라토스 그 밖에 몇 명과 함께 소크라테스에게 다가와 시내로 가지 말고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니케라토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니키아스의 아들(Νικήρατος ὁ Νικίου)이다. 니키아스(기원전 약 470-413)는 422년 클레온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어 스파르타와 일시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으나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 원정 중 포로로 잡혀 처형된다. 그의 아들 니케라토스는 함께 있는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404년 30인 과두정권에 의해 처형된다. 기원전 406년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장군으로 참전했다가 시신 수습 문제로 문책을 당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처형된다.
* 이 사람을 ‘이겨내시거나(더 힘이 세거나)’의 원어(κρείττους)는 나중에 트라쉬마코스가 ‘강자’를 표현할 때도 나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힘에 의한 물리적 윽박지름은 이어서 언급되는 소크라테스의 설득(πείθειν)의 방법과 대비된다. 그리 심각한 대화 국면은 아니긴 하지만 폴레마르코스에게 설득의 방법은 아예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지도 않다. 이런 식의 농담조 윽박지름은 <필레보스> 16a, <파이드로스> 236c에도 나온다.
*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실 수가 있을까요?’ἦ καὶ δύναισθ᾽ ἄν πεῖσαι μὴ ἀκούοντας;라는 폴레마르코스의 반문에 글라우콘이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οὐδαμῶς라고 답하는 부분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복선처럼 느껴진다. 잠시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만나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종국에 이르러 트라쉬마코스가 이미 처음부터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런 사람을 설득하기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바른 대응은 이제 설득이 아니라 그와 같은 주장을 완전하게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대안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 아무려나 이러한 윽박지름식 강권은 소크라테스에게 익숙하지도 받아들여지기도 힘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곁에 있던 아데이만토스는 이 상황의 어색함을 금세 알아차리고 다른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체류를 청한다.
[328α]
* 아테이만토스는 밤에 횃불 경기도 있고 철야제παννυχίς도 열리니 그것도 구경하고 젊은이들과 대화도 나눌 겸 재차 머물기를 청한다. 횃불 경주 λαμπὰς : λαμπὰς는 횃불 경기의 공식이름이기는 하지만 λαμπὰς는 뒤에 나오는 λαμπάδια와 마찬가지로 그냥 ‘횃불’을 뜻한다.
* 트라케 지방은 광산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으로 광산노예들이 많았다.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또한 트라케 광산에 묶여 지낸 광산 노예들의 삶에서 착상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몸과 영혼의 이원론, 영혼불멸설 또한 고대 아티카에서는 그리 발달하지 않은 사고인데 광산 동굴노예의 참혹한 삶이 영혼만이라도 자유롭고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과 욕구의 일환으로 생겨나 점차 아티카에도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트라케지방에서 디오뉘소스 신앙이 발달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에서 열린 횃불 경기도 그들이 광산 동굴에서 늘 함께 했던 횃불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산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마상 횃불 경기에 의아해하며 관심을 보인다.
* 이 후 전개된 대화의 분량으로 시간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철야제 구경은 밤샘토론으로 대치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말잔치(συμποσίον)가 축제 구경보다 좋은 잔치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서도 소크라테스는 지금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소크라테스의 열정과 체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28b]
* 아테이만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보이자 폴레마르코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그의 말을 거들고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에게 머물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뤼시아스, 에우튀데모스, 트라쉬마코스, 카르만티데스, 클레이토폰이 이미 와 있었고 뜰에서 제물을 바치고 앉아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 뤼시아스 Λυσίας (약459-약378)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이다. 기원전 404년 형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민주파의 편을 들어 30인 과두정에 맞서다 형은 재산을 몰수당한 후 처형되고 그 자신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로써 유복했던 케팔로스 가문은 몰락한다. 무기 제조 판매업을 통해 치부한 신흥 상공인 계급이자 거류외인이었던 케팔로스 집안으로서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과두정 세력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뤼시아스는 기원전 403년 민주파에 의해 30인 과두정권이 무너지자 아테네로 돌아와 유명한 법정 연설문 작성자로 명성을 얻었고 민주파를 적극 지지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이 민주파에 의해 희생된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가 기원전 375년 경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사태를 목도한 후임을 고려하면 <국가>에서 플라톤이 이미 몰락한 케팔로스 가문을 어떤 시각에서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추정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 나오는 에우튀데모스Εὐθύδημος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로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 나오는 키오스 출신 에우튀데모스와 동명이인으로서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 카르만티데스 Χαρμαντίδης는 훗날 유명한 연설가 이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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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에는 다소 방해가 되겠으나 텍스트 내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주요 개념의 원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 앞으로 본 강해에서는 중간 중간 고전 그리스어 원문을 병기할 예정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어 원전 텍스트 대부분이 실려 있는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 저자별 목록에서 ‘Plato’을 찾아서 을 클릭한 후, 플라톤의 <국가> 텍스트(Republic, Greek)와 해당 페이지 및 섹션(327a, 338c 등으로 표기)을 찾아가면 버넷(J. Burnet)판 그리스어 원문과 쇼리(P. Shorey)의 영어 번역, 아담(J. Adam)의 주석 등을 참고할 수 있다. 특히 실린 고전 그리스어 원문의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자세한 단어별 사전(Liddell & Scott’s Greek-English Lexicon)풀이가 나와 있어, 최소한 고전 그리스어 알파벳 정도만 익힌 분들도 쉽게 해당 개념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Perseus Digital Library, Perseus Collection, Greek and Roman Materials
http://www.perseus.tufts.edu/hopper/collection?collection=Perseus:collection:Greco-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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