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도산공원 가는 길
춘분, 추분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동등한 날에 이른 점심을 먹고 도산 안창호의 자취를 찾아 집을 나섰다. 바깥은 안창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우울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 걸음을 돌려 우산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평일 한낮인데도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와 다행이라고 여긴 것도 잠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이 이리저리 춤을 추는 탓에 온전히 앞을 보며 걷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빌딩숲 인공협곡이 만든 순간적인 강풍에 우산이 뒤집혀 살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나의 허약한 3단 우산은 강한 바람을 버텨낼 힘이 없었던 게다. 그렇게 조금 먼 길을 돌아 도산대로를 거쳐 도산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산공원과 도산 안창호 기념관의 의미
도산공원(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은 1973년 11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안창호의 묘소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면서, 도산이 ‘우리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자 조성’된 근린공원이다. 전반적으로 아담한 크기의 도산공원은, 근린공원답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산책로와 체육시설, 휴게시설 등도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매일 24시간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도산공원은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창호의 자취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한 곳이다. 다시 말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안창호를 우리의 마음에 새길 필요성은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의 행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소나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 곳을 정해 그를 기리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넓게는 도산공원이 그러한 곳이고, 좁게는 도산공원 안에 자리한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안창호가 태어난 지 12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 11월 09일에 개관한 건물이다. 입장료는 없으며, 01월 01일과 설날, 추석에만 휴관이다. 다만 관람시간은 인터넷 정보와 안내 책자 및 현장 안내문이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대체적으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 개방을 하는 듯 보이지만, 원활한 관람을 위해서는 방문하기 전 미리 개방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다소 쌀쌀했던 날씨 탓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안내나 관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관람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 기념관 처지에서는 아쉽겠지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본격적으로 도산 안창호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다.
안창호는 1879년 11월 0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사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894년 서울에 와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밀러학당)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에 입교한다. 구세학당에서 보고 배운 것은 안창호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 그의 민족운동가·개화사상가·교육자·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 땅이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안창호의 삶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도 일제의 내정 간섭 및 만행은 있었고, 안창호는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당시 우리 민족의 가장 급선무는 진정한 독립이고,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명과 부강함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1902년 결혼 후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난다.
도산(島山)이라는 호는 이때 생겼는데, 배를 타고 가면서 태평양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하와이를 보고서 스스로 지어 붙였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섬뫼인데, 섬은 고립과 고독을 의미하고 뫼는 우직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심한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그 속에 담은 셈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하와이가 아닌 독도나 제주도, 마라도를 보고 그렇게 붙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그러나 이 시기는 일제의 시커먼 야욕이 빠르고 치명적이게 우리 민족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때였다. 그야말로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 거센 비바람에 맞서는 허약한 우산 신세였다. 도산은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한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결심하고 1907년 02월 귀국한다. 이때부터 국내외 각지를 오가는 그의 힘겹고도 숭고한 여정이 시작된다.
힘을 길러야 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에게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목적은 두말 할 것 없이 진정한 ‘독립’이다. 그리고 독립이 옳은 것은 전 인류의 최종적 목적이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산은 엉뚱하게도 행복의 실마리를 ‘문명’에서 찾고 있다. 개개인이 긍정적인 ‘개조’를 통해 서구 열강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고 습득하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우리도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다분히 개화·계몽적이다 못해 사대주의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그의 현실적인 판단력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인류의 행복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동등한 선상에 있거나 감성적으로 그러하다고 느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산이 보기에 우리 민족은 이미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시작은 뒤떨어진 문명에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보다 일찍 문명을 받아들인 일제에 의해 더 이상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등한 문명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동등한 문명, 곧 동등한 힘을 가지기 위한 개개인의 개조와 그에 대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결국 동등해질 수 있고,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있으며, 이 땅의 올곧은 주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산은 힘을 기르지 않고 “한갓 요행과 우연을 바라보고 한번 떠들기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육혈포질이나 작탄질이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어떤 나라에 호소나 잘 하면 독립이 될까하고 어련한 가운데서 호도하게 시간을 보내며 방황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석하기가 한이 없”다고 말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선진문명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육과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개개인이 영원한 책임감을 가진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서로 간의 믿음에 기반을 둔 합동과 협동을 주문했다. 그러면 정의(情誼)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도산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두고 서로 믿고 모이어 합동적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워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도산은 “어떠한 협동이든지 그 협동 중에 앞선 사람은 곧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지도자의 자격은 비교문제로 생”긴다고 말한다. 각자가 남을 시기하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지도자를 찾아 세울 참된 뜻으로 냉정한 머리를 가지고 살피고 따지면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도자가 될 후보군들이 다 협잡하고 싸움만 일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중에 협잡과 싸움을 적게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산의 생각에는 “위인이란 별 물건이 아니요 위인의 맘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자가 위인”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신이나 성인(聖人)과 같이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전제가 깔린 듯하다.
결론적으로 도산은 “무조건 허영만 표준하여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주의와 본령과 방침과 능력을 조사한 후에 그 주의와 본령이 내 개성에 적합하고 그 주의에 대한 방법과 능력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앞선 것을 본 후에 지도자로 인정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살피는 방법은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요언비어(妖言誹語)에 의하지 말고 그 사람의 실지적 역사와 행위를 밝게 살필 것”을 들고 있다. 또한 지도자를 택할 때 마음가짐은 “친소 원근과 차당 피당의 관념을 떠나서 전 군중의 이해를 표준하고 공평 정직한 맘으로 할 것”을 말한다. 도산의 이처럼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견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바다. 그런데 당시에도 요구되는 바였고 지금도 요구되는 바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당시에도 가능하지 않았고 지금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에 씁쓸할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산의 길과 우리의 길
도산은 1937년 06월 28일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1월 10일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산은 12월 24일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심해져 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약 3개월 뒤인 1938년 03월 10일 00시 05분에 간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서거한다. 도산은 자신을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대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치 1945년 08월 15일의 광복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날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병을 앓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독립에 대한 그의 희망과 동지들에 대한 믿음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도산 안창호는 민족주의와 개화사상에 기반을 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곧 철학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면, 그 어떤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나 명제만큼이나 철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과 민족, 나아가 인류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분석하며,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한 다음, 최선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실천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졌다. 이것이 철학이 있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 철학이 있는 삶이겠는가? 도산이 걸었던 길에 이제 우리가 서 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과연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지 물어야 한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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