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들, 가족과 결혼 2-② [4人4色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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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영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결혼, 꼭 해야 합니까?
언제부턴가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가 꺼려진다. “아직도 학교에 더 다녀야 하는 거니?”로 시작해서 “그래서 졸업은 언젠데?”로 이어지는 질문들. “논문을 써야 졸업을 하죠.” 우물쭈물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해는 제발 그 질문 좀 안 했으면 했던 바로 그 질문이 날아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그렇다. 앞서의 모든 질문들은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전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딸, 조카에게 어른들이 궁금했던 건 내가 어떤 공부를 어떤 관심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아니고, 결혼을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니다. 남들 다하는 결혼을 도대체 왜!!! 안 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시집을 가도 벌써 갔을 나이인데…….” 라며 말끝을 흐릴 때,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꾹 삼켜낸 그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고 싶으셨겠지.
어른들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장성한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는 것까지를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고 계심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는 걸 요만큼도 상상하기 힘들이 때문이리라. 어른들의 질문 세례는 일단 논문부터 쓰고 결혼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어물쩍 넘겼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결혼을 꼭 해야만 합니까? 나이 차면 결혼하는 게 정말 당연한 걸까요?” 물론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은 갖고 있지만,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니다. 하게 되면 하고, 안 하게 되면 뭐 그런대로 살자는 입장이랄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이 1975년에는 11.8%였으나 2005년에는 59.1%로 높아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결혼기피 심각. 적령기女 미혼율 60%”라는 타이틀로 보도가 되기도 했다.(2010년 7월 28일 연합뉴스 기사 참조) 기사에 따르면, 미혼자의 28.3%가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하니, 결혼에 대해 “하게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닌가보다. 한편, 기사에 따르면,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미혼자는 46.4%라고 한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면 미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미혼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 ‘교육을 더 받고 싶어서’, ‘자아 성취와 자기 개발을 위해’ 등 가치관과 관련된 이유가 54.9%로 가장 많았고, ‘소득이 적어서’, 또는 ‘결혼 비용이 마련되지 않아’, ‘실업이나 고용상태 불안’ 등 경제적 이유가 31.9%로 그다음이었다고 한다.
통계청의 ?인구통계연보?에 따르면, 2008년 평균 초혼 연령이 남자는 31.4세, 여자는 28.3세라고 한다. 1990년에는 평균 초혼 연령이 각각 27.8세, 24.8세였다고 하니, 근 20년 동안 초혼 연령이 꾸준히 상승한 셈이다. 20대 중 후반 여성의 미혼율의 급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혼율의 급증, 초혼 연령의 상승은 저출산 문제로 이어진다. 이 기사는 “저출산의 원인은 교육기간과 취업준비기간이 늘어나는 데 따른 초혼 연령의 증가 등 만혼화와 이에 따른 자녀 출산시기 지연 때문으로 요약된다”며 “초혼연령을 낮추는 정책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변용찬 선임연구위원의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결혼 문제는 국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옆 나라 일본의 상황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야마다 마사히로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오늘날 일본 가족의 재구조화>에서 일본 가족 구조의 변화를 사회 구조의 변화, 특히 경제 변화와 연관지어 분석했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즉 가족 내 이혼, 미혼화, 저출산, 자녀 양육과 노인 보호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양상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일본 가족 구조 문제에 비추어 우리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회 구조, 특히 경제 구조가 변하면 그에 따라 가족 구조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야마다 마사히로의 주장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가족의 표준 모델인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은 전후 경제 부흥기에 알맞은 모델로, 경제 침체가 장기화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경제 부흥기에 일본 기업은 연공서열-종신고용 제도를 고수했다. 따라서 남자들은 직장에서 성과가 낮다고 해도 해고될 염려가 없었고, 경력이 쌓이면 임금은 저절로 올라간다. 여자들은 결혼을 할 경우, 남편의 임금만으로도 중산층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밖에서 일하기보다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샐러리맨-전업주부’를 이상적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고도의 경제 성장 덕분에 그런 형태의 가족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표준 가족 모델은 흔들리게 된다. 우선 기업에서 연공서열-종신고용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실직할 경우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들은 남편의 임금만으로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자녀들도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 혹은 더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안정된 가족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표준 가족 모델을 유지하고자 할 경우, 여성의 경우에는 부모의 경제력이 높을수록, 남성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제력이 낮을수록 결혼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직업이 있든 직업이 없든 부모와 같이 살 경우 중산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 때문에 굳이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 가족에 감돌고 있는 정체 분위기이 원인은 남편의 수입이 가족생활 수준을 결정한다는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이 뿌리 깊다는 점, 성인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보낸다는 현상에 있다. 원흉은 여성 차별적인 직장 환경과 성인 자녀를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 부모의 태도인 것이다.(228쪽)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성인 자녀들을 저자는 ‘기생적 싱글’이라고 부른다. 이 기생적 싱글들의 증가가 저출산의 원인이다. 즉 결혼한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임 여성 한 명당 출생률인 합계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표준 가족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기생적 싱글들의 결혼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88만원 세대의 결혼, 가족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청년실업 몇 만 명,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뜻),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뜻), 88만원 세대……. IMF 이후 경기 침체 속에 유행처럼 번진 말들이다. 특히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2000년대 이후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만큼의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부모로부터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부모 세대가 받은 것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세대별 고등교육 이수 비율(전체 인구 중 고등교육 인구 비율)이 25~34세는 55.5%, 55~64세는 10.9%라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률은 99.9%, 99.7%로 집계됐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비율도 83.8%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 간 학력 격차는 크지만,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 간 학력 격차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는 우리 부모들이 우리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상황이나 우리의 상황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실질 임금의 하락하면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한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차별, 가사와 출산?양육에 대한 책임과 부담은 여성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 쉽게 선택하게끔 한다. 여성 노동력은 일종의 상비군과도 같아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사회의 필요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실례로, 조금 멀리 떨어진 얘기일 수도 있지만,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은 다시 돌아와서 그동안 여자들이 다니고 있던 직장이나 대학교로 다시 복귀했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남녀 사이에 경쟁이 늘었고, 케케묵은 여성에 대한 반감이 되살아나 여자들이 직장을 구하거나 승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런 점이 확실히 여성들에게 다시 결혼과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중략) 전시에는 여자들의 능력, 그들(남자들)과의 경쟁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에 여성들은 비록 정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남자들에게서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자들에게는 사랑을 하거나 사랑받는 것이 더 쉬웠고, 그러기 위해서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변명도 쉽게 할 수 있었다.(베티 프리단, 김현우 옮김(2005), <여성의 신비>, 이매진 펴냄, 320~321쪽)
여성의 사회 진출이 페미니즘의 성과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의 상황은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정중하지만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가 암암리에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기가 호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날 경우에는 그나마 덜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할 경우 경계 대상 1순위는 여성이다. 어느 분야든 여성이 부각될 경우 이슈가 된다. 공무원 시험에 여성 합격률이 남성 합격률보다 높다거나, 사법고시 고득점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거나, 초등학교 교사 중 여성의 비율이 높다거나 등등. 정당한 경쟁의 결과임에도 간호사나 유치원 교사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여성 비율의 증가는 매번 도마 위에 오른다. 상황이 이러하니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자. 6~70년대 경제 성장을 이끈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풍족하게 자랐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 우리 세대는 안정된 높은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다.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한 후에도 맞벌이를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불황은 역으로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암암리에 부추긴다. 어찌어찌 결혼해서 아이를 낳더라도 부모가 해준 것만큼 내 자녀에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에라, 그냥 부모님 곁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래 살아보자. 결혼을 해도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아이는 낳지 말자.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새로운 가족의 탄생
야마다 마사히로는 직장에서의 성 차별을 없애는 것 못지않게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각각 이러이러해야 한다, 자녀들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보살펴야 한다,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등등 가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문제를 키우기보다, 개인의 감정을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관계로 가족이 구성될 때 오늘날 일본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가족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변하면 가족도 변한다.
동성애 커플이든, 이성애 커플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꼭 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는 미라(문소리 역)를 통해 가족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정적 요소는 그 외양이나 틀이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애정과 친밀도임을 보여준다. 미라는 남동생이 부인이랍시고 데려 온 엄마뻘의 여자 무신(고두심 역), 무신을 찾아 온 여자 아이―심지어 이 아이는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다.―과 어쩔 수 없이 동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했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 것이다. 가족은 결혼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 지, 할 수 있을지, 할 수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미라처럼 가족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그 형태에 관계없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이 올까? 다음 명절에는 어른들께 말씀드려야겠다. 저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족은 만들고 싶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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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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