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서울 시민청 강좌] -1
필자의 허락을 얻어 [서울시 시민청]에서 올 여름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을 총 5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흔쾌히 원고를 넘겨주신 필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의 1 :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강지은(건국대 강사)
우리는 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에 대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분석을 시도한다. 더불어 스마트폰을 통해 매일 접하는 SNS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관한 반성도 함께 모색해 본다.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차례>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이 된 지 얼마쯤 되었을까요.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스마트폰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제 기억엔 5년 남짓 된 듯 싶습니다. 제가 스마트폰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말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아이와 기억나는 큰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처음 사준 스마트폰이 2011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소설을 15권이나 엄마 몰래 읽은 것이었어요. 이미 또래들에게 인소(인터넷소설) 읽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건데 저는 몰랐던 거죠. 지금 중년 분들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틴로맨스라는 얇은 로맨스소설이 인소의 원조쯤 되겠죠. 예전에 저희들은 고교생 때나 되어 읽던 걸 저희 딸은 스마트폰 덕분에 초등학교 때 접한 거죠. 처음엔 아이가 당장 타락이나 한 것 마냥 속상하고 그랬는데, 세상이 그러니 차라리 저도 한 번 인소를 읽어 보자 싶더군요. 그리고는 아이와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가 상상하는 타락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스마트폰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화를 거듭한 듯 보입니다. 당시에는 없던 소셜네트워크가 전 세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가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희 아이는 그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물건인데 손에서 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에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소가 유행하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소소한 게임들이 유행했었던 듯합니다. 당시엔 조잡했던 게임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바일 게임 시장이 pc게임 시장과 맞먹을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하겠죠.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게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연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임은 ‘포켓몬고’겠죠. 포켓몬고는 새로운 증강현실(AR)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입니다. 저는 해본적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가봅니다.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출시도 되지 않았는데 속초에서 어찌 어찌 된다고 하니 유저들이 몰려가는 대소동까지 있었다죠. 아무튼 스마트폰의 진화는 무한대인 듯합니다. 아무튼 당시 인소의 유행이 지난 후엔 카카오톡이 주도하는 SNS가 아이들을 사로잡더군요. 이제 아이의 스마트폰은 단톡방의 알림이 울리고 아이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답을 달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아이들에게 기쁨도 주었지만 상처도 주었습니다. 카카오톡의 상태메시지는 은근히 타인을 욕하거나 따돌리는 메시지창이 되기도 하고, 오프라인의 왕따는 온라인에서도 역시 왕따가 되어 단톡방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재미와 연대 두 가지를 제공하는 신기한 상자임에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풍속도가 이러하다면 어른들의 스마트폰 풍속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물론 아직 2G폰을 가지고 계신 어르신도 계시긴 합니다. 저희 친정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십니다. 폴더폰 기억나시지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 계신데 저희어머니 말고 많은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자식과 카카오톡으로 사진도 주고받고 친구분들과 소통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의 역사는 스마트폰의 변천사보다 조금더 앞섭니다. 언제부터 휴대폰이 소위 공짜폰으로 전면 보급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97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인데 남편만 휴대폰을 한 대 장만했습니다. 당시 만해도 남편만 장만하면 됐지 뭐 저까지 덩달아 사겠다고 나서기가 좀 거시기 한 그런 때였습니다. 아직 대학원생이라 금전적 여유도 없었구요. 처음 우리집에 온 남편의 휴대폰은 크기는 손 크기 만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창도 작은 그런 폰이었죠. 그러던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창의 크기가 커지다가 컬러가 등장하고 창을 손가락으로 터치할 수 있는 터치폰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버튼이 아니라 화면을 터치해서 조작을 하는 기술은 스마트폰의 기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터치폰의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곧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고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처음엔 도대체 애플리케이션, 앱이 뭐야? 핸드폰을 쓰면서 왜 요금말고 또 돈을 결재해? 궁금한 것도 많았죠.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세계는 스마트폰 천국이 되었습니다.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익숙해진 스마트폰 안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의 SNS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한번 함께 보면서 노철학자가 어느 부분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에 놀라고 걱정을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질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소녀는 이제 다른 친구들이 없을 때, 과연 사람들이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혼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지 거의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는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워볼 만한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셈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24~25쪽.
어떠십니까? 누가 생각나십니까? 물론 자녀분들이 많이 생각나시지요? 본인 스스로가 생각나시기도 하구요. 저는 식당갔을 때 보았던 남의 집 유아들이 더 생각납니다.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영상이 뽀로로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큰 해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영상이 아니라 손에 쥔 것 자체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죠.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면 잠시도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도 심심한 것을 못참는 현대인은 수시로 SNS에 접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올린 포스팅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확인하러, 좋아요가 몇 회나 올라갔나 확인하러, 또 그냥 다른 포스팅 둘러보러 등등의 이유로 들락날락 거리는 시간이 생각해보면 하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꼭 페이스북, 트위터에만 접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날씨가 도대체 왜 이렇게 덥지? 궁금하면 그것도 무엇이 해결해주나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에 접속하면 네이버에 날씨가 나옵니다. 메인화면엔 그날그날의 탑뉴스들이 뜨죠. 내가 원하는 연예기사나 다이어트, 음식 뉴스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들을 읽느라 시간이 흘러갑니다. 스마트폰은 누군가와 접속하게도 해주지만 그저 온라인과 내가 접속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오늘 서울 시민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SNS를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SNS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빠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트위터의 앰블램은 참새같은 새모양이지요? 시도 때도 없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처럼 아무 때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포스팅을 하는 곳이 트위터입니다. 남이 댓글을 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하지만 SNS의 속성상 댓글 없는 포스팅은 공허합니다. 내가 포스팅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재빠르게 댓글을 달아주고 리트윗을 해주면 그야말로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올린 포스팅은 순식간에 전 세계(친구가 전세계에 퍼져있다면) 혹은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지요. 페이스북도 속성은 비슷합니다. 트위터는 짧은 글을 간단하게 포스팅한다면 페이스북은 사진과 함께 좀 더 긴 글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르죠. 페이스북에선 좋아요가 몇이나 올라가는지가 관심사인 것 같아요. 페이스북 개인페이지 말고 회사나 상업성을 띤 페이지들은 그 페이지들의 좋아요나 공유만을 관리해주는 업체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그야말로 ‘인정’이라는 내면적 속성의 숫자화 또는 외면화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정이 숫자로 표시되는 장소가 바로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인정받기 위해서는 칭찬받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엔 착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습니다. 문제는 나만 빼고 그런 것 같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럼 뭘 포스팅해야 할까요? 도대체 나를 스스로 생각해보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는 일도 변변히 잘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영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닙니다. 아…….인정은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가진 최고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식당도 제일 비싼 곳에 갈 때만 사진을 찍어 포스팅을 합니다. 변변치 않은 식당에 가면 사진찍기는 없습니다. 셀카도 오늘 화장발이 잘 받은 날만 찍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상 받아온 날은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는 날입니다. 나는 최고의 것을 포스팅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나의 일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하겠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남들이 최고의 모습을 포스팅 한 곳에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실 남들에 비하면 내 모습은 참 별볼일 없으니까요.
다시 좀더 인정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대체로 많이 받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유명인 또는 연예인들이겠죠.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된 사람들이니까요. 나와 그들이 친구는 아니지만 언젠가 유명인들의 SNS에 들어가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많은 좋아요와 댓글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SNS 포스팅을 하면서 그런 연예인들과 같은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것이죠. 지그문트 바우만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인간 존재증명이 이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에 밀려 쫒겨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51쪽)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SNS를 자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많이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유명인들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가 될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철학자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소셜네트워크 활동인 셈이지요.
그러나 SNS가 진짜 자신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대시켜줄까요? 철학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명인의 흉내내기에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장해보면 사회의 영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결국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류 즉 보여지는 부류(유명인, 연예인)와 권력이 없는 부류 즉 보는 부류(일반인, 소외계층)의 삶은 어디에서도 뒤바뀌지 않는다는 진리 말입니다. 거기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페이스북의 친구 1000명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따지고 든다면 또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같은 너” 바로 페이스북 등의 SNS 친구이지요.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어쨌거나 SNS 이전과 이후는 고독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SNS 이후에 연락 않던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이죠. 한 번 연락하고나니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또 많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조금 친한 친구들도 있고요. 한동안 동창들끼리 네이버 밴드 많이들 하셨죠. 카카오톡 단체톡도 하시고요. 이런 온라인 모임들이나 개인적인 접속들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근황을 알 수도 있고 대화도 할 수 있고 내가 귀찮으면 접속을 중단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참 편리하고 깔끔한 만남입니다. 그러다보니 또 내 손안의 핸드폰이 채팅창의 알림을 울려주면 안들어가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인간관계가 풍부해졌다고 느끼거나 나의 정신세계가 확장되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공허감을 느낄 때가 훨씬 많지 않으십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이 걱정하는 내용을 함께 들어볼까요.
당신은 즐겁게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면서 당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아주 가까운 주변에 있는 진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멀리 있는 친구들이 접속하려고 버튼을 클릭해올 때, 과연 누가 정작 가족과 이야기하기를 원하겠는가?……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31쪽.
오늘부터 시간을 정해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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