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저 너머에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Mulder, Where are you?” (멀더, 어디에요?)
“Scully, The Truth is Out There.” (스컬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30대 이상은 위 대사를 모를 리 없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The X-Files>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우리나라에서는 KBS가 수입하여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안방에 날라다 주었다. <The X-Files>는 FBI 수사관인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스컬리(질리언 앤더슨)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해결 사건 등을 추적하는 X-File이라는 부서에서 겪는 일을 줄거리로 하는 TV 시리즈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매회 오프닝에 스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문구이자, 남자 주인공 멀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마다 되뇐 말이 바로 ‘The Truth is Out There(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다.
2016년 8월 26일, 검찰 출두를 앞둔 롯데 그룹 부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수사 기관과 이를 감추고 싶은 또는 감추어야만 하는 자 간의 대결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모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했던가. 그의 죽음으로 진실도 함께 묻혔다. 언론에서는 스스로 몸을 던진 망인을 두고 ‘충신(忠臣)이다. 의리 있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 하나만큼은 정말 깍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행동을 미덕 또는 충성으로 여기는 사회, 또 그런 사람에게 뒤늦게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사회, 이것이 그 옛날 우리가 배운 동방예의지국의 실체인가 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 위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지켜져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질 수는 있는 것일까. 또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등등. 위와 같은 언론의 태도로 보아 부회장이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해서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말 못하는 기계처럼 양심선언이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실제 사례가 있으니 굳이 위 사건을 가지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5년 노회찬 의원이 들추어낸 이른바 ‘삼성 X파일’과 2007년 김용철 변호사(당시 삼성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 녹취록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죄로 기소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빵집(뚜레쥬르)을 운영하기도 했다.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했으며 이들의 비위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예의 없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여정이다. 과연 어떤 진실이기에 그들은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래서 필사적으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면 그런 진실 위에 쌓아온 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 온 ‘진실’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지금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런 모순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는 이유도 동방예의지국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누설하려는 자들이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현상은 세월호 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어도 참는 게 미덕이고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예의다. 덕성도 예의도 없으니 ‘진실한’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만약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론에서는 유족들을 유공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일제히 찬사를 보낼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롯데 사태에서 보았듯이 진실을 저 너머에 고이 묻어준 대가로, 통 큰 결단으로 사회를 살렸다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의 진실도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2013년 1월에 제기된 18대 대선 부정 개표 소송을 떠안은 대법원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2014년 소위 ‘성완종 리스트’ 의혹도 흐지부지되어 몸통들은 처벌받지 않고 덮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도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1948년으로 정하겠다는 건 무엇을 위함일까. 또 누구를 위함일까.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뿌려졌기에 이를 모조리 거둬들이려는 것일까. 1948년을 나라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진실을 수거하려는 자들은 일각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친일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조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단하려 한다. 1948년 이전 이 땅에 자신과 조상들의 행적에 관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 팔 걷어붙이고 막으려는 것이다. 롯데와 삼성이 보여주듯,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보듯. 여기에 딴죽을 걸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매를 맞고, 진실을 수호한 자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서 진실이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이 사실은 늑대였다는 점이다. 가해자이면서 가증스럽게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란 그런 것. 전 국민이 알면 경천동지할, 그래서 지우고 싶은 이 ‘진실’ 위에 시멘트 반죽을 붓고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진실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모습은 저 멀리 재벌권력이나 정치권력에서 보듯 대규모의 조직적 차원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장삼이사인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다를 바 없다. 대학 강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면 학교 측은 물론이요 동료·선후배 강사들까지 손가락질하며 그를 내친다. 내부 문제를 밖에 알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분란을 일으킨 죄로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한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동료 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성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데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를 욕하고 발로 차는 모습이. 그러면서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 같다. 쥐가 고양이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러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진실을 폭로하는 쥐는 가혹한 뒤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노회찬 의원이나 김용철 변호사, 세월호 유족처럼. 혹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을 지켰다는 공로로 자자손손 명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다. 롯데그룹 부회장처럼. 이도 저도 싫다면 살아 있는 머리에 진실을 가둔 채 입 다물고 사회가 강요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진실’로 무장한 길을 걷다보면 우연히 ‘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진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리 곳곳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어느 날 백화점이 붕괴되고 한강다리가 끊기기도 한다. 자신을 녹색으로 드러낸 4대강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모두 스스로 민낯을 드러내며 대국민 사기극임을 커밍아웃한다. 다른 쪽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솔한 현실에 기초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남의 10억 원짜리 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10원짜리 집은 무엇이 다른가. 그 집이 10억이라는 건 진실인가.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꼴을 봐야 그제야 깨닫는다. 10억짜리 집이나 10원짜리 집이나 다 같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먹고 자고 싸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다 같은 집이라는 사실을. 경매에서 1억 2천만 원에 낙찰된 900g의 송로버섯은 정말 1억 2천만 원인가. 전쟁이 발발해 먹을 게 귀해지면 땅콩 한 알도 1억 2천만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실이란 고작 이와 같은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모래성처럼 점점 약해진다. 이런 걸 지키겠다고 이 난리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사회,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요, 진실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진실을 수호해보지만 종국엔 무너지면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조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오류로 가득한 볼품없는 그 민낯 말이다. 이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 하다. 진실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국의 한 고속도로가 차량 정체로 꽉 막힌 적이 있었다. 교통경찰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맨 앞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시범 운행 중인 무인차가 한 대 있었으니… 범인은 무인차였다. 무인차가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킨 탓에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 그렇다면 그동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태 사람차가 속도를 위반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무인차가 ‘저 너머에 있던 진실’을 고속도로로 끌고 와 스스로 예의 없는 공익제보자가 된 것. 인정에 손발이 묶인 사람이 못 하는 양심선언을 인공지능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렇듯 뭔가 일이 터져야 그간 꾹꾹 눌려왔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애써도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던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진실’을 들춰내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 세상의 토대가 되어 온 온갖 추한 ‘진실’을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양심선언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양심선언은 추한 진실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인 나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규정 속도를 위반한 운전자 각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너머로 진실을 던져보지만 동시에 내 안에 동일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젠장,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필자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적 가게에서 쥐포, 껌, 사탕 등을 훔친 적이 있다. 몇 번 있다. 당시엔 CCTV가 없던 시절이라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당시에 누가 이를 알고 가게 주인에게 이른다고 했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물어뜯어서라도. 마치 롯데처럼, 삼성처럼, 정부처럼, 학교의 비정규직 강사들처럼, 황우석 박사처럼.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지는 나의 모습과 대면해야 하니까. 나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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