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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