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공산주의의 현실성』
『공산주의의 현실성』
김상범 (포항공대 대학생)
오늘날 ‘공산주의’와 ‘현실성’이라는 단어처럼 붙여쓰기에 어색한 단어들이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공산주의가 ‘현실적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데리다의 말대로 ‘유령’은 단순한 ‘순수 정신’이 아니라 육체성이나 현실적인 위력을 어느 정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유령은 현실성과 절연된 채 ‘순수 이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특히 바디우는 공산주의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이념’, ‘이데아’일 뿐만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는 살과 살이 부딪히는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완전히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브루노 보스틸스는 바디우 등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잠재성의 존재론’을 넘어서 ‘현실성의 존재론’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쓰기로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공산주의의 현실성’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조화된, 그리고 전투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그대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사유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유치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보스틸스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현실성은 reality가 아니라 actuality이다.)
보스틸스가 기존의 ‘정치적 존재론’을 검토할 때, 사실상 레닌주의적 정치철학,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의 정치학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비전투적이고 탈주체적인 존재론을 제시하고 있는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사유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복귀가 낳을 치명적인 결과를 피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뽀지토는 ‘비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의 초월적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정치 전체의 배후에 깔린 전제들 자체를 근본적[급진적]으로 만듦으로써, 즉 이 전제들을 내부로부터 동시에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일의 초과 성취를 통해서”(『공산주의의 현실성』, 163쪽)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정치가 펼쳐진 영역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이러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전투적이고 주체중심적인 맹목적 실천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모레이라스는 ‘하부정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주체주의의 “돌림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하부정치라는 것은 적/아군의 구분을 넘어서, 유위적이고 주체적이며 주권적인 결단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주체의’, ‘수동적인’, ‘무위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적 주체의 ‘구성적 외부’라고 볼 수 있다. 모레이라스는 이 ‘하부정치’ 개념을 통해 “자기정체성에 내재하는 배제된 타자의 위상학”(『공산주의의 현실성』, 176쪽)에 도달하게 된다.
보스틸스는 이러한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이론을 통해 주체중심적이고 전투적인, 그래서 위험성을 간직한 순수한 해방의 존재론을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이론이 “통상적인 정치 전부를 능가하는 도덕적인 탁월함의 증거로서 비정치적인 것의 비효율성에 의지하는 아름다운 영혼이 취하게 되는 태도”(『공산주의의 현실성』, 195쪽)를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보스틸스는 랑시에르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잘 알려진 대로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질서이자 셈의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논리로서 ‘치안’과 이러한 ‘치안’에 대항하여 “셈의 논리”로부터 벗어난, 평등을 주장하는 ‘정치’를 구분하는데, 보스틸스는 이러한 “감각적인 것을 [명령적] 질서대로 분할 및 구획하는 것으로서 치안과 몫이 없는 부분집단을 기입하는 것으로서 정치 사이의 대립은, 사변적 좌익주의의 특성이라 할 법한 모순의 ‘순수화’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것”(『공산주의의 현실성』, 229쪽)이라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치안과 정치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정치는 단지 ‘간헐적으로’ 또는 ‘희귀성을 가지고’ 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보스틸스는 지적한다.
또한 보스틸스는 랑시에르의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즉 비시대적인 것이자 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을 옹호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에 대한 이런 옹호는, 비 현실성 자체의 지반이 우리 자신의 현실성과 해방적 관련을 맺는 때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관련을 맺게 되는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그 다음 수준으로 문제를 넘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공산주의의 현실성』, 250쪽)
그래서 보스틸스는 이렇게 랑시에르의 한계를 지적하며, ‘실행’에 대한 사유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지젝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게 된다.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라캉과 헤겔을 참조하면서 그의 ‘진정한 실행’ 개념을 “신경증에서의 [증상으로 구현되는] 행동화, 정신병에서의 [발작적인] 실행으로서의 이행, 그리고 순수하게 형식적인 자기주장에서의 상징적 실행”(『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과 구분짓는데, 이러한 실행은 “행위자가 속한 상황의 그야말로 상징적인 좌표를 재구축하는”(『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에서 지젝은 바틀비를 옹호하며 ‘가짜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해석이나 사유에 머물지 않도록 명령하고 맹목적인 실천을 명령하는, 도서관에서 나와서 거리로 나갈 것을 명령하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지젝은 ‘멈춰라, 그리고 사유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지젝은 진정한 ‘실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오늘날 진정한 정치적 실행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운동을 중단시키는 일이다.”(『공산주의의 현실성』, 321쪽)
이것은 보스틸스의 입맛에는 맞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일순간에 정지시킬 수도 없고, 이러한 초월적/신적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지가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뚫고 지나가야 하며, 자본주의 안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심지어 가속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를 가속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사유’가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보스틸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잠재성’의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성’만 부여잡고 있는다고 해서 ‘현실적인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잠재성을 알아야 현실의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존재론적으로도 현실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를 하이데거-아감벤적 의미에서의 ‘순수 잠재성’으로 정의하거나, 바디우적/고진적 의미에서 ‘순수 이념/규제적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들뢰즈적 의미에서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성, 현실화될 수 있는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에 언제나 내재하는 비시대적인/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어디에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공산주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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