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2. 삶-정치의 대안들: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 연계하기, 투명성 요구하기, 인권주장하기/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한 경쟁으로 형성된 현재의 경제적 결과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과 맞물리는 산업혁명을 근간으로 한다. 산업혁명 전후의 자본가는 청교도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엮어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루터나 캘빈의 소명론을 직업 소명론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촉발시키는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출발점을 지닌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발상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신의 소명’으로서 직업 소명은 어떤 경제 활동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무조건 부를 축적하고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의 순수한 노동 행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 격차 문제는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이 만민 평등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부르짖은 개념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점을 상기해도 이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자유와 평등만을 부르짖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박애’라는 용어도 동시에 작동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들이 중인 계급들이었고, 그들은 중인 계급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라는 발상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동체를 배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통해 빈부 격차가 생겨도 ‘박애’를 통해 ‘공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이미 프랑스 혁명에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중인 계급들이 결국 초기 자본가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야기하지만, 그 근간을 만든 초기 자본가들이 ‘박애’를 인간다움의 기본 개념으로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자.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처럼, 삶의 공동체로서 경제 공동체의 가능성, 공존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규모 집단의 행위를 통해 보편화하자는 발상은 역사적 문맥을 지닌다.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세계경제는 공동체적 삶, 공존의 삶을 거부하지만, 그 출발점에서 원래는 공존의 삶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 측면들이 희석되고 망각된 채 여기까지 흘러왔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세계 경제의 방향은 그런 발상들과 배치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빈부 격차가 어떤 상황으로까지 이어질까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경제가 악화된다면, 민주주의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찍부터 이것을 통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그의 정언명령의 근간인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말이 현실에서 철저히 관철되기를 바랐던 철학자이다. 그런데 당시에 펼쳐지는 상인 자본주의를 목도하면서, 그의 정언명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칸트는, 비록 어떤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이어도, 경제적 빈곤이 심하면 동시에 인간다움이 파괴된다는 점도 간파한다. 민주적 요소가 파괴되어도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며, 민주적 요소를 실현해도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을 철저히 고민한다. 그래서 칸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정치 역할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칸트는 공존하는 경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사회로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는 왜 자신이 그런 대안을 설정하는지를 역사철학 관련 글들(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을 참고하라.)에서 보여준다. 경제를 끌고 나가는 개인 하나하나의 본성을 살펴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본성을 ‘공존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유도할 수는 있다. 물론 그 유도는 인간 이전에 이미 자연이 그렇게 인간을 조직했지만,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면 정치적 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연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고진이 칸트로부터 이어받아서 ‘세계공화국’으로 발전시킨다. 고진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위기 가운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이다. 판매자와 생산자가 일치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고진은, 이런 대안은 자본주의가 없는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태도로는 이런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션은 고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준 칸트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중세 교회가 지니는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근대 도시 국가에서는 ‘자유 도시’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파리 꼬뮌, 즉 꼬뮌 같은 정치 공동체 형태로 논의되다가, 근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직업단체로 변형된다. 칸트와 헤겔의 어소시에이션은 협동조합 내지 직업단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루동이나 마르크스에게서도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나타난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존 공동체’라는 발상을 가지고서 철학사를 거슬러가면, ‘어소시에이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경제와 정치의 연결’이며, 그런 연결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경제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며,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이렇듯 고진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소시에이션의 주도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민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규모 공동체이다.
현재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세계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이론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론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인터넷 세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사이버 공간은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경제 문제 속에서 생겨나는 반 민주주의적 행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들, 정치적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에서 야기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공존 공동체의 유형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에 적용하려고 했던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특수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80년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여파로 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다양하게 형성된다. 여러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때 형성된 많은 NGO들은 한국 사회의 삶을 공존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웃과 연계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실현하는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뒤 끝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후세들이 양산되었다. 사실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고, 공권력이 우리네 삶을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압박감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노동 구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은 널뛰기를 하며, 불행 지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쏟고, 경제에 더 매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곧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 정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 스스로 이미 반증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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