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죽음 – 살처분은 답이 아니다[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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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도 있었을 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서둘러 중요한 일을 하려다가 무심결에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1918년 11월 18일

300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 구제역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피해 예방 차원에서 도살당했다. 예산도, 인력도 없어서 생매장한 돼지들도 있다. 이 모든 게 구제역 때문이다.

동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널렸는데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단지 죽어간 동물들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죽어간 동물들을 보면서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첫째로 300만 마리의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우리 인간의 폭력성이 안타깝고, 둘째로 2차 환경재앙을 비롯해 그들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악영향에 두렵고, 마지막으로 구제역 파동을 불러온 축산시스템과 자본주의 경제의 근원적인 상관관계에 수치심이 들어서다.

집단적 죽음이 주는 정서적 효과, 그 치명적 트라우마

자식처럼 키우던 소와 돼지를, 그것도 병에 걸리지도 않은 동물들을 행정기관의 살처분에 내맡겨야 하는 시골 축산농가 주민들은 울분을 토한다. 그들은 사실상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 살처분에 동원되는 수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사랑해서, 동물을 살리고 싶어서 수의사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동물 집단 살처분에 동원된 뒤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는 인터뷰를 우리는 신문에서 보았다.

살처분은 물론 구제역을 막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심지어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동물들까지 예방적 차원에서 살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까? 물론 아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살처분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살처분은 적어도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실용적인’해결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살처분은 ‘실용정부’MB정권의 관점에서는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실용성’을 위해서는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를 수입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4대강에 인위적으로 공사를 해서 자연생태계를 해치고, ‘실용성’을 위해서는 노인복지예산을 삭감해버리는 이 정권의 관점에서는 죽임으로써 구제역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인 셈이다.

그러나 실용성을 위해 300만 마리의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인간의 정서와 가치관에 미칠 해악적인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있을까? 단지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대량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논리를 확장했을 때 장애인 아이들을 안락사하고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키는 것도 허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장애인이나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회적 비용’의 차원에서 계산해보면, 그것은 위정자들의 ‘실용적’인 계산에서는 ‘낭비’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시절, 장애인들은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2007년 5월 12일인터뷰). ‘실용성’을 기준으로 생명을 취급하며,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취급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명 역시 ‘실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살처분정책의 문제는 이렇게 생명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만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실용성’을 근거로 생명을 죽여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겪는 일은 놀랍게 느껴지지만 자주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 연민을 느끼던 사람도,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었다는 뉴스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소와 돼지의 죽음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느끼는 무감각함. 사회 전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갈 때,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는 어떤 종류의 광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이미 시작된 재앙

환경부는 2월 7일, 낙동강 상류지역의 구제역 매몰지 89곳을 정밀조사 한 결과 61곳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매몰지 89곳의 절반을 넘는 45개 매몰지에서 침출수 유출이나 비가 많이 올 경우에 사면 붕괴 등의 위험이 있었으며, 16곳에서 침출수 유출 오염이 우려됐고, 23곳은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붕괴나 유실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6곳이었다. 집중호우 때 문제가 될 수 있어 빗물 배수 시설이 필요한 곳도 16개로 나타났다.(, 2월 8일, “구제역 매몰지, 3월이면 다 썩는다.”)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이미 매몰지에서는 침출수가 유출되고 있고, 결국 지역당국은 분뇨차를 동원해 침출수를 퍼다가 하수처리장이나 분뇨처리장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한다. 날이 풀리는 3월이 되면 피해는 본격화할 것이다. 병에 걸린 동물들의 사체에서 나온 피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강물로 흘러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시킬 때 그 피해는 결국 인간 스스로 지게 된다. 이것이 생태계의 부메랑 효과다. 인간이 자연생태계의 전과정을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사실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에서 밝힌 바 있다. 문제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이 인간 자신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을 겪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자연생태계를 훼손한 대가는 결국 인간 자신이 지게 되어 있다(그것도 가난한 하층계급이 지게 되어 있다).

구제역 예방을 목적으로 과도하게 살충제를 살포하는 행위 역시 인간과 환경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얀 가루가 자동차에 묻어 전국으로 유포되고 있는데 이 약성분이 아이들의 눈이나 입으로 들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살충제와 함께 뿌리는 항생제 때문에 대기중에 있는 불특정 미생물의 내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결국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부 집권자의 머리 속에는 오직 구제역이라는 보기 싫은 질병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살처분과 살충제 대량살포 이후에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근본적인 축산 시스템의 문제는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먹거리의 상품화와 생태위기

현대인은 너무 많은 고기를 먹는다.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된다. 그 결과 대규모 축산업이 성행하게 됐고 이 때문에 지구 환경은 재앙을 맞고 있다. 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물은 평균 5리터 가량이며, 생활용수를 포함해 하루 150리터 정도를 사용한다. 1kg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2,000~5,000리터 정도의 물이 쓰인다. 그런데 소를 키워 쇠고기 1kg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4,000리터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채식을 하는 것보다 최소한 5배의 물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물을 많이 소비하는 소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있다. 전 세계에 고기를 전달하고 맥도날드와 같은 대규모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햄버거 페티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지구의 건조화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많은 물을 소 사육에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소 사육을 위해 수풀과 삼림을 개간하여 거대한 방목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지구 사막화에 동조한다. 중남미 대륙에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 지역이 이미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 중이며 이 때문에 사하라 이남과 미국, 호주 남부 목장지대에서는 대규모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심각한 문제다. 소 1만 마리를 사육하는 사육장에서 배출되는 유기폐기물은 11만 인구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강으로 배출되는 오물이 일으키는 문제, 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볼 때, 이처럼 대규모로 소를 사육하는 것은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 역시 과도한 축산밀도의 원인이 크다. 소와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다보니 동물들이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 거기에 동물들의 운동량이 적어 면역력 역시 떨어진 상태다. 이렇게 좁은 축산밀도로 많은 수의 동물들을 사육하는 현재의 축산시스템이 구제역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다.

만일 고기를 비롯한 먹거리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둔갑하지 않았더라면, 소, 닭, 돼지가 교환을 통한 이윤축적을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문제는 육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식은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나친 육류 공급과 과도한 육식에 있으며, 이러한 과도한 육류의 소비와 공급을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요구된다. 생태계에 좋은 것은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먹거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축산정책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정책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친환경적으로 축산시스템을 바꾼다고 해도, 대규모 방목을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외국산 육류와 경쟁이 되겠는가? 소비자들은 당연히 값싼 외국산 육류를 찾을 것이고 국내 축산업계는 망할 것이다. 따라서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적 먹거리문화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과도한 육류소비문화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3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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