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등급을 알라!’는 사회, 그러나 ‘네 자신을 알라’[썩은 뿌리 자르기]
나를 보는 나가 아닌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
얼마 전 보았던 영화『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첫 장면에 John Betjeman의 자서전 『종소리에 눈을 뜨고』의 구절인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Childhood is measured out by sounds and smells and sights, before the dark hour of reason grows(유년시절은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 자라기전에 소리와 냄새 그리고 시각에 의해 평가된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얘기하기보다는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the dark hour of reason”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의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세계와 만나고 있는가? 영화 속에서 독일 소년 브루노는 슈무엘이라는 유대인 소년을 이성이라는 잣대로 만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 소년과 이성의 어두운 시간보다는 감성의 창문을 통해 만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란 모든 세계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 개체의 질적 측면보다는 양적 측면만을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위 합리성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이러한 시각은 결국 인류의 참혹한 사건을 만들어낸 도구적 이성으로 귀결되며 인류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양화시키려는 이성은 생텍쥐베리의『어린왕자』본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숫자로 세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어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고? 몸무게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야 근사하겠구나!”하고 소리친다. …
…어른들은 다 그렇다. 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우리는 숫자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학벌사회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글에서 영화, 소설 이야기가 현상적으로는 다소 주제와 벗어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와 맞물려 강력하게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수량화 문제는 ‘나’를 내가 주체가 되어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과 연결된다. 나의 내면이 아니라 나를 외부의 그 무엇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 점이 바로 학벌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주체로서 ‘자아the self를 알아듣는 나the I’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알려지는 나 the me’에 무게 중심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 핵심에 있다. 학벌 사회를 조장하고 추구하는 생활양식이 공고화된 사회에서는 대상으로 알려지는 ‘나’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로 이 알려지는 대상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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