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글: 최종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직접 감정의 용기와 간접 반성의 용기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면 감각에 기반한 신체 신진대사율의 만족스러움과 불만스러움이라는 단순감정일 것이다. 감정 수준이라기보다는 외부조건을 지각하는 기초적인 자극반응 양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과 불만족의 기초 감정을 확장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발현한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화내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며 두려워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욕망하는 감정 등이 그것이다.
인간 감정의 발현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감정의 단계는 더 상승한다. 불쌍한 이를 보면 측은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나쁜 것을 보면 울컥하거나 피하기도 하며, 옳고 그른 것을 가를 줄 아는 마음도 생긴다. 불행하게도 인간 마음에는 이런 유형 말고도 시기하거나 집착하고 사기치며 속이고 아부하고 업신여기며 이기적인 마음의 유형도 도사려 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유형을 넘어서는 더 높은 단계의 마음이 가능하다. 숭고함과 이타성이 그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은 다층적이다. i) 반응적 감각 수준, ii) 소위 칠정七情과 같은 직접 감정의 마음, iii) 사단四端과 유사한 판단하고 사유하는 간접 반성의 마음, 그리고 iv) 간접 반성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창출의 마음으로 되돌려 발현되는 숭고함이나 이타성의 마음도 있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이 다층적으로 겹쳐 있다.
용기는 간접 반성의 마음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용기가 실천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직접 발현의 감정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불의를 보고 나도 모르게 저항을 하는 경우이다. 어떤 나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즉자적으로 용기가 발현되는 경우 말고 삶속에서 연습되고 간접적으로 교육된 용기의 발현도 가능하다. 전자를 ‘직접 감정의 용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후자를 ‘간접 반성의 용기’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을 보아도 잠자코 있는 사람도 많다. 나쁘고 잘못된 것, 즉 직접 감정의 마음 수준을 분명히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다면,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그것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조하지 않는다면 용기를 내어 고쳐야 하지만, 나부터 그런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깡패정치꾼, 독재자에게 미리 알아서 기는 주변 아부꾼들 그들을 가만히 두고만 본다면, 결국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포에 맞섰던 광주의 용기
한반도 근현대사를 치욕으로 물들게 한 일제의 역사는 해방의 한 순간으로 되돌려지지 않았다. 일제의 흔적을 그대로 이식한 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한마디로 말해서 깡패들의 정권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소불위 횡포는 315부정선거로 폭로되었으며, 정권의 총체적 부정은 419 민주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60년 길거리로 나선 학생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정치깡패들의 무법천지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올해는 419민주혁명의 50주년이기도 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학생들의 촉발로 모아진 시민의 힘은 막장 부패정권을 붕괴시켰다. 직접 감정의 용기가 모아진 시민 자생의 힘이었다.
불행하게도 419 민주혁명 직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해갔다. 그렇게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무지막지했던 독재정권이 자멸하고, 20년 가까운 기나긴 악몽의 터널이 무너지나 했더니 또다시 기회를 잽싸게 도둑질해간 새끼 악동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또 다시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공포에만 떨고 있지 않았다.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는 일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이 저항만이 앞으로 갈 길이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30년 전 일상의 시민들이 혁명의 피를 흘렸던 광주, 바로 그 길거리에 오늘 우리들이 와 있다.
은폐된 병증들
용기를 낼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리는 용기가 요구되는 시대에 처절하게 살고 있다. 30년 전의 무장 독재세력은 아니지만 더욱 정교화된 자본의 독재는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달콤한 계엄사령부를 운영하고 있다. 한반도 산하의 강줄기를 틀어막아 부수고, 지맘대로 종교를 통제하며, 기업에게는 행정권력의 전권(올마이티 티켓)을 선물하고, 방송사를 장악하고, 교육비리 척결 명분으로 오히려 교육환경 격차를 늘려놓고, 서민의 빈 주머니마저 쥐어짜면서 빚잔치로 희롱하고, 색깔논쟁의 메카시 선풍을 재조직하면서 최후에 남은 선량한 시민들의 마지막 상식을 뒤집어엎는 중이다.
전두환에서 박정희에 이르는 공포의 군부독재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50년 전 419 민주혁명 전야의 깡패자유당 전염병 증상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다. 문제는 지금의 증상이 통증을 직접 수반하지 않고 마약에 취한 환각 증상과 유사하다는 데 있다. 이런 환각 증상은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병증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앓고 있는 병증의 진짜 심각성은 권력에 의해 병증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의 스위치
은폐된 병증은 ‘직접 감정의 용기’를 직접 끌어당기지 않는다. 증상을 빨리 눈치채는 사람들의 마음은 마음의 스위치를 하나 더 거쳐서 겨우 도달하는 ‘간접 반성의 용기’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쉽지 않다. 전염성 강한 신자유주의 병증의 원인은 자본 바이러스이다. 직접 감정의 용기를 차단하는 자본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용기의 저항력을 회생해야 한다. 그리고 희미해진 용기의 저항력을 되살리려면 심했던 그 전염병을 힘들게 이겨낸 저항 면역력을 기억해내야 한다.
감기 면역이 얼마간 지속되듯 말이다. 감기에 한번 걸리고 난 후 같은 감기에 당분간은 안 걸린다. 전염병 중에서 홍역 같은 것은 한번 걸리고 나면 평생 다시 안 걸릴 정도로 그 기억은 아주 오래 가기도 한다. 우리의 몸, 우리 몸의 저항력이 내 몸을 크게 힘들게 했던 기존의 감기 바이러스나 홍역 바이러스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가능한 것은 희소하나마 내 몸 림프구에 존재하는 기억세포들 덕분이다. 건강한 몸은 자신의 기억세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을 잘한다.
그래서 저항력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저항의 기억은 내 몸 안에 저장되었던 직접 감정의 용기를 켜는 스위치 구실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린 것 같은 저항의 면역력, 우리 안에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저항의 기억을 회생시켜야 한다.
기억은 용기의 스위치다. 기억의 스위치를 켜야 할 때이다. 한편 스위치를 켜기 위해 필요한 불빛도 있어야 할 터인데, ‘간접 반성의 용기’가 그 구실을 잘 할 수 있다. 나 같은 지식인 행사나 조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직접 창출의 용기가 부족한 편이다. 이것 재고 저것 재면서 ‘현장과 순간’에서 발을 빼는 경우가 많다. 좋다. ‘현장과 순간’을 놓쳤다면 ‘역사와 기억’을 통해 주변의 불특정 다수에게 용기의 마음을 이입해야 한다. 간접 반성의 용기란 그런 감정이입에서 드러난다.
광주는 기억의 공간이다. 이렇게 30년 잠재된 기억을 다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 이 글은 2010년 5월 27일 ‘518민주항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션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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