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어느 골목길 막다른 곳을 찍은 것이다. 당신 눈길이 하늘을 향해 잔가지를 뻗은 나무에 먼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주 피사체는 텅 빈 벽에 비친 오후 햇살이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배경에 있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한데다 이단으로 된 벽 때문에 굵다란 화살표가 땅을 향해 단숨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 제목을 ‘오후의 표지’라 했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사진을 찍던 저 순간처럼 빛이 비치지 않을 때, 통의동 이 막다른 골목은 눈길을 끌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벽뿐이었다. 같은 장소지만 빛이 없는 빈 벽은 참으로 초라했다. 저 순간은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체념하는 골목길, 막다른 공간에서 저런 장면을 만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진기를 들고 여러 해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숨죽여 꼭꼭 숨어 있던 사물이 혹은 어떤 공간이 내 앞에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아쉽게도 대체로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짧다. 하지만 말을 거는 그 순간, 피사체는 놀랍게도 아주 커다랗게 도드라져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 찰칵! 숨어 있던 친구를 발견한 술래가 “찾았다!” 외치는 소리하고 똑같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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