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2002년 개봉한 영화에는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예쁜 여주인공 기네스 펠트로가 등장한다. 뭐 이렇게 예쁘고 날씬한 배우들이 헐리웃에만 있나? 우리나라에도 널렸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여성의 유전적 특성상 175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신 날씬한 여성들은 많은 편이다. 특히 학회 분과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하늘하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우울감에 시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나와 비슷한 40대의 넉넉한 체형도 얼마든지 널렸다. 아이 한 둘 낳고 운동량 부족한 주부들에게 운동이 왠말인가? 남편 직장보내고, 집안 살림에 재테크에 아이 학원 챙겨 보내기까지. 핑계같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들의 말씀. 체중감량을 원한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라. 그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주부들은 다이어트 식품에 주목한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대상폭을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현대인으로 넓히는 것이 좋겠다. 사실 다이어트니 살빼기니 하는 것들은 문명화된 삶의 고질적인 현대병 아닌가.에 나오는 조에족이 다이어트 식품 찾는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현대인은 바쁘다. 학생은 학생대로 바쁘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바쁘고 주부는 주부대로 바쁘다. 황혼을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노인들도 요즘은 생계를 위해서 바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이 영화에서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잭 블랙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실제 여주인공의 모습은 136킬로그램의 여성이다. 그런데 잭 블랙에게는 그 여성이 완벽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최고의 몸매를 가진 여자와만 데이트를 하려는 잭 블랙은 번번이 연애에 실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기의욕고취 전문가를 만나 최면에 걸리고 만다. 전문가는 잭 블랙에게 여성의 외모가 아닌 내면만을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만난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기네스 펠트로였던 것이다. 그는 애인이 앉는 의자가 박살이 나고 속옷 가게에서 고른 팬티가 낙하산만 해도 개의치 않았다. 눈 앞의 애인이 너무나도 날씬하고 예쁜데 뭐 그런 사소한 일들이 대수이겠는가.
뚱뚱한 = 못생긴
그런데 사랑에 위기가 닥친다. 잭 블랙이 최면에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남성 여러분은 어찌하시겠는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장담 못할 것들이 영화에서의 해피엔딩이다. 특히나 여성에게 현실은 더더욱 암울하다. 2006년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주인공 김아중은 암울한 현실의 상징 그 자체이다. 믿었던 애인에게 사기 당하고 결국 자살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주인공은 성형을 선택한다. 그녀가 여러 번의 연애에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뚱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뚱뚱하다’와 ‘못생겼다’는 결코 동의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동급의 가치로 둘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이목구비가 남들에 비해 좀 뚜렷하지 못하고 비율이 안 맞아 못생겼을지라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타고 난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곱게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 돈만 주면 성형외과에서 어느 정도는 잡아주니. 하지만 뚱뚱한건 도대체 동정받을 만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못생겼다는 덤까지 받는다.
미디어에 비치는 뚱뚱한 여성 혹은 남성을 떠올려보자. 뭔가 성격이나 직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결코 주인공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살빼기 프로젝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의 시청이 많은 아침 방송에서 단편적으로 편성하던 프로그램들이었는데 최근엔 케이블 티비를 필두로 살빼기 프로젝트 그 자체가 목적인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외국 케이블 채널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초고도 비만인들을 선정해서 운동 과정과 살이 빠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눈물이 나는 감동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티비에서 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초고도 비만일 때의 실물크기 사진을 세워놓고 쉽게 사람 모습이 떨어져 나가게 설치해 놓았다. 20킬로그램을 뺀 비만 여성이 그 사진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모두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그 옆에는 빨래비누를 20킬로그램만큼 쌓아 놓고 그 만큼이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 빨래비누만큼의 부피, 지금의 몸보다 컸던 과거의 사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몸에서 불필요했던 부분들이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나에게서 나갔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인류는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어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은 불멸성을 가지며 분리불가능하고 파괴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이 세상 어떤 자연 만물과도 다르지 않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근대의 자연학에서 보면 신체는 수학적으로 양화될 수 있으며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신체든 자연사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르는 기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 이후 근대 세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육체와 육체의 분리
그러나 현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에 역사적인 획을 긋는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신체는 다시 결합한다.에서 기계족들이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만 살려 놓고 인간을 사육하니 오래 살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가상공간이 매트릭스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정신활동을 하며 통 속에 있는 육체를 지속시킨다. 결국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서는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육체와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우리는 하고 있다. 긴장은 하지 마시라.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 영화에서 보는 육체의 분리는 아니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이라도 해본 사람, 뱃살 대신 초콜릿 복근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 모두 육체의 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전적으로 질이 나쁘고 결코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내 안의 나이다. 내 안에 너는 있을지 몰라도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자리가 없다.
내게서 분리되어야 하는 나는 자본주의와 대단히 친숙하다. 자본주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데도 무척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도 훌륭한 도움을 주고 있다. 스마트폰 앱은 전국의 맛집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깔끔한 시설에 가격마저 저렴한 피트니스 클럽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나보다는 내안의 나를 더 사랑한다. 이제 미디어는 눈부신 배우들만 영상에 담지 않는다. 자기 몸을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담아낸다.
미디어는 거식증에 걸린 해골같은 모델들도 담아내고 어린나이에 뱃살공주가 된 초등학생도 담아내며 20~30킬로그램씩 눈에 띄게 살을 제거할 수 있는 초고도비만의 사람들도 담는다. 왜냐하면 모두 훌륭한 시청률과 광고료를 보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몸무게를 밝히며 카메라 앞에 나선다. 나 역시 오늘도 내 안의 나를 내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휴먼다큐를 찍는다. 물론 감독은 자본주의 선생이다.
강지은(건국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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