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비트겐슈타인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비트겐슈타인⑤
강사 : 김성우(올인고전학당 연구소장)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현대철학은 크게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를 위시한 ‘실천 지향의 철학’과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위시한 ‘해체의 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기성의 사회제도나 기존 고정관념을 해체하여 새로운 사회제도와 인간의 출현을 도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밀접하다.
신플라톤주의를 모토로 주체와 진리의 철학을 주장하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니체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등을 ‘반철학자(antiphilosophe)’라고 규정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체계의 철학은 진리관에 기초하여 이상적 사회나 국가를 이룩하는 견고함을 보여주는데 니체 계열의 학자들은 이 견고함을 부수고 해체하려 한다. 그래서 바디우는 이들을 기존의 철학 개념에 반(反)하는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언어와 분석의 철학자로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이 ‘반철학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통해 철학을 이론적 사유에서 실천적 사유로 전환시켰다. 이런 모습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철학에서 받은 영향이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본격적으로 불교와 인도철학을 수용한 인물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이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행위’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현대철학에서 해체주의는 실체를 비실체화 시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철학을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불교적 사유방식을 흡수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그 계열인 비트겐슈타인은 불교의 방식을 서양의 철학에 구현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인도와 불교의 사유체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다섯 번째 시간, 김성우 교수는 20세기 서구인들이 어떻게 불교나 인도철학을 소화·수용하여 서구문명의 과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그 모습과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이 곧 니체 계열의 철학적 정체를 처음부터 통틀어 확인해보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선불교적 스타일과 상응하여 연결시켜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아울러 김성우 교수는 니체 계열의 철학을 탐구하기 이전에 근대서양철학의 기본 골격을 규명하는 공부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했다.
관념론이 남긴 유산과 헤겔의 지평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주체(자아)’와 ‘객체(세계)’ 양자의 구분을 두고 근거로서 ‘신(神)’을 설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서양철학의 기본적 3자 구도이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명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를 통해 근대적인 사유의 출발점을 열었고 이것은 근대적 자아의식의 출발이 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도 실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철학 제1원리는 ‘내 생각’이 ‘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유아론(唯我論)적 색채를 띤다. 이 유아론적 성격에 대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흄(David Hume, 1711~1776) 같은 경험론자들은 인간(주체)이 외부(객체)로부터 감각을 통해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존재로서 수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이 고립된 실체로서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존재임을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Kant, 1724~1804)는 수용성을 제외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객체는 주체가 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주체에게 포착되어 주체가 구성한 것은 ‘현상‘이고 주체에게 포착되지 않는 순수한 객체는 ‘물자체(Ding an sich)’이다. 칸트가 남긴 것은 바로 이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론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유아론적 사고방식과 경험론자들이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서 수용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칸트는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을 주체 지향적인 방식으로 재편하여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성(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의 형식과 지성(수학처럼 바깥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적이고 분별하는 사고)의 형식으로 나눈다. ‘감성의 형식’은 ‘직관형식’으로 시간과 공간에 관계하고 ‘지성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에 걸리지 않는 선험적인 형식으로서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을 초월한 도덕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의 세계를 ‘도덕의 세계’라 하였고 ‘객체 사물의 세계’를 ‘자연과학적인 세계’라고 하였다. 이 둘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인데 칸트의 의도대로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피히테(Fichte, 1762~1814)는 주체를 ‘절대자아’로 보아 모든 객체를 자신의 앞에 정립시킨다. 헤겔(Hegel, 1770~1831)은 이것을 주체적인 주체·객체라고 보았다. 반면 셸링(Schelling, 1775~1854)은 자연으로부터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만든다. 헤겔이 보기에는 지극히 객체적인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피히테와 셸링이 남겨놓은 주체와 객체의 통일 관계를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정신이 어떻게 발전하여 이 단계에 이르렀는지 밝힌다. 김성우 교수는 이것으로 철학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지평이 완성되었다고 설명한다. 헤겔은 이 지평 위에 철학 체계를 세운다. 주체와 객체가 통일된 존재론적 원리가 논리학이고, 그 원리가 객체인 자연으로 드러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자연철학, 주체의 영역에서 정신철학과 법·사회철학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둘의 결합을 ‘절대정신’이라 하여 절대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으로 발전한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아직 실체가 아니었고 피히테의 ‘절대자아’도 행위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김성우 교수는 헤겔이 자연과 정신의 종합을 과연 이루었는지, 헤겔의 ‘절대정신’이 피히테의 ‘절대자아’를 의미하는 것인지의 문제는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하다고 하면서 관념론의 지평에서 칸트가 말한 ‘선험적 자아’이건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건 모두 ‘보편적인 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보편적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아의 해체와 변혁의 사고
김성우 교수는 현대 철학에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해체하는 세 방향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첫 번째, 이성 대신 육체와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니체 계열의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속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분배 활동을 하는 경제적인 관점과 연결하여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해 보자는 것이 마르크스이고 ‘역사유물론자’의 태도이다.
세 번째, 자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배후’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나의 생각과 나의 여러 모습들을 결정하는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앞의 이 세 인물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맥락이 달라진다. 예컨대 프랑크푸르트(Frankfurt)학파는 마르크스 사상의 지평 위에 프로이트를 받아들여서 독일 나치즘의 권위주의와 대중들이 그 권위에 어떻게 굴복했는지를 분석하려 시도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니체를 통해서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하고 기존과는 다르게 어떻게 선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지젝(Slavoj zizek, 1949~)은 프로이트와 라캉, 마르크스와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점이 있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거나 어떤 존재의 존재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가능성의 지평을 찾아보자고 하는데 그것이 ‘선험성의 지평’이다. 이 출발점 위에서 독일 관념론은 출발하고 헤겔은 ‘절대정신’이라는 차원으로 해명한다. 중요한 것은 헤겔처럼 그 물음을 확대해서 플라톤적인 ‘체계’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칸트처럼 여전히 이율배반적인 비판(고진이나 지젝이 ‘시차’라고 말하는 개념)이 중요한가의 문제이다. –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의 경우는 칸트적 사유(니체화된 칸트)를 통해 다시 변혁적 사고의 기초를 놓으려는 반면, 지젝은 비록 부정성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헤겔처럼 주체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
니체 계열의 비판과 해체주의 철학
오늘날의 서양철학에 있어서 변혁의 두 사고는 이렇다. 중심적인 조직이 필요한가? 아니면 개별적인 분자운동과 분자들의 연합이 더 중요한가? 김성우 교수는 “다시 말하면 사회의 영역에서 집중적인 변혁의 주체를 설정할 것인지, 아니면 분산적인 자유로운 연합을 택할 것인지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니체 계열의 철학이 주장하는 것은 세계의 구성과 체계,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노력들이 경화(硬化)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 내부에서 폭력이란 방식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표지판과 같다.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경화된 사회와 생각들을 어떻게 탈 실체화 할 것인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니체 계열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① 근거가 꼭 필요한가? ② 주체는 왜 그리도 오만한가? ③ 자연과학만이 진리인가?
이것은 주체의 문제이다. 주체가 객체를 보편적인 이성에 의해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수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바로 탈 중심적인 사고와 논리를 지향함으로써 보편적인 형식의 이성이나 주체-객체의 논의를 버리고 ‘구체적인 삶’과 ‘생명력’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편적 정신에 가려진 ‘개체성(원자화된 자연과학적 단독자가 아님)’에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푸코(Foucault, 1926~1984)가 말하는 ‘인간의 죽음’이나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가 말하는 ‘반휴머니즘’은 모두 이 주체가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반역성’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누구와 바꿀 수 없는 유일자로서의 나’의 삶에 대한 철학이 바로 ‘실존’하는 개체로서의 ‘나’를 규명하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들뢰즈나 가타리((F?lix Gattari, 1930~1992), 가라타니 고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등이 이러한 해체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나 지젝은 아마 이 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철학자들일 것이다.
20세기 ‘선사(禪師)’의 측면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니체 계열의 쳘학자들에게 보이는 해체론적 입장에서 근거를 제거하고 실체 없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로서 ‘삶의 철학’을 지향하는 중심에 서 있는 개체인 ‘나’는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존재이다. 이런 생각을 자신의 철학에 수용하여 언어와 수학적 한계를 명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기존 서양의 언어를 해체하여 서양이 지닌 환상을 깨뜨리려는 20세기의 ‘선사(禪師)’로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해체론자를 의미하는 ‘반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불교적인 색채가 많은데 불가의 ‘선사(禪師)’들이 ‘선(禪)’을 중심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은 언어의 ‘매개성’을 극복하려는 태도이다. 언어는 우리를 진리에 이끄는 손가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혹시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선종은 직접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 선종에서는 전통적인 유학과 불교는 물론 부처도 부정한다. 이런 태도는 서양철학에 있어 기존의 전통적 학설관계를 무시하는 면모라고 볼 수 있다.
‘선사’들의 일화에는 극단적인 표현들도 많다. 김성우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삶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유태계 철강의 부호였던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기부한 점이나, 안정된 대학교수의 길을 거부하고, 당시에 저명했던 지도교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자신의 저서에 서설을 써준다는 호의를 내용이 오도될 수 있다는 자기 판단 하에 거절한 점, 그리고 스스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논리철학논고』를 참호 속에서 집필한 점 등. 이 순탄치 않은 그의 인생이 자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그가 죽음에 직면한 삶을 살면서도 ‘인식하는 삶’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1916년 8월 13일 일기에 “인식하는 삶이야말로 세계의 궁핍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쓴다. 그러나 “인식하는 삶은 단순히 과학적 언어의 명료화에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의미에 대한 인식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는 분석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삶과 분리된 언어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세계와 삶은 하나이며 삶이 세계”이기 때문에 ‘세계는 삶의 세계’가 된다고 말했다.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인 『논리철학논고』의 구조는 7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는데 가장 마지막 7번째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를 의미한다.
해체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연구를 통해 그것들의 한계를 목도한 사람들이다. 일례로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는 가장 추상적인 수학적 기초를 탐구하다가 ‘과정철학’이라는 실존철학과 만나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과학과 수학의 언어가 지니는 한계를 극한까지 가보려 한 사람이고 그 안에서 절대적 진리 명제로서 완결된 인간 존재의 삶이 아닌, 삶의 과정으로서의 삶을 발견한다. –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이나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연구를 통해 그 언어의 끝을 가 본 사람들이다. –
형이상학을 뜻하는 ‘metaphysics’는 ‘physics’의 meta이다. 즉 ‘physics’를 이해하지 못하면 ‘metaphysics’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인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존재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世界-內-存在)’라고 표현했다. 주체란 삶의 과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서양적 주체에 대한 해체의 한 방식이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는 이른바 ‘윤리적 metaphysics’라고 할 수 있지만 칸트처럼 보편의 철학이 아닌 과정으로서 삶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physics’의 문제점과 한계들의 극복을 언어의 한계를 명시하는 방식으로 이뤄낸다.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상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사상을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고려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과학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들은 과학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한다. 또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가 중요한 이유는 탐구의 대상이 의식이 아니라 언어라는 점을 강조한다. “20세기의 철학은 19세기와는 다르게 의식을 탐구하지 않고 언어를 탐구한다. 언어는 의식보다 더 객관화되고 보편화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Habermas, 1929~)는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동체의 규범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언어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적인 언어는 없다고 했다. 언어는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도 마지막에 『언어로의 도상에서』라는 책을 썼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면 기존 언어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렇지만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는 없다. 기존의 오류를 극복한 새로운 언어는 불가능하다. 기존 언어에 대한 ‘경고판’들만 있을 뿐이다. 이걸 언어적으로 잘 보여준 사람이 하이데거와 데리다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초기에는 러셀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언어를 구상하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철학적 탐구라는 새로운 작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논증이 아닌 비유의 방법 : 선사의 화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보통 비엔나 학파나 옥스퍼드 언어철학 등의 분석철학적 전통과 연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일면이다. 다른 해석자들은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 데리다, 선불교(禪佛敎), 아방가르드 예술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적 스타일이 대단히 복합적이라 규정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어(Nicholas F. Gier)는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삶의 철학(Lebensphilosophie)’이 ‘언어철학(Sprachsphilosophie)’보다 우선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매우 중요한 평가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언행이 매우 독특함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삶의 세계”나 “언어는 주요한 삶의 형태”처럼 그의 언행은 마치 선사가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또 비트겐슈타인의 ‘인식하는 삶’으로서의 ‘철학적 스타일’은 ‘비유’를 통해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계는 객관적인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위에서 비행하며 바라보는 것이 조망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문장에 논증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창안한 것은 비유”라고 했다. 논증하지 않고 비유한다는 것은 선사들의 어법이다. “좋은 비유는 이해를 신선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말은 비트겐슈타인과 선종의 선사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비유를 통한 의미 전달의 방식은 직접 진리를 상대하고 사유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비유의 방식들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인 쇼펜하우어에게서 유래한다. 기어(Nicholas F. Gier)는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또는 선불교)와의 연관성은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이 즐겨 사용하는 인간과 세계와의 연관성을 상징하는 ‘눈의 비유’나 ‘사다리의 비유’는 바로 쇼펜하우어로부터 차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다리의 비유’는 사다리를 통해 높은 곳에 올라갔으면 자기가 딛고 올라간 사다리에 집착하지 말고 사다리를 걷어 차버려야 한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사다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의미가 전달되고 소통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언어 자체를 두고 논증을 하거나 분석하는 방식은 일종의 집착과 같은 것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 그는 이 세계가 객관적인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의 세계이고 세계를 ‘조망(?bersicht)’하는 것이 바로 ‘인식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유의 길에 “세계도 계속적인 흐름이며 삶도 계속적인 흐름”이라는 이정표를 세우는데 이 말은 니체의 말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스스로를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새로운 사유노선들을 창조한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창안한 것은 비유”라고 한 것이다.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 : 치유의 철학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을 단편이 아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침묵’의 의미”라고 한다. ‘침묵’은 바로 삶을 드러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깨달음이라고 할까. 깨달음이란 지극한 앎이고 삶의 의미를 체득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를 경험한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인간의 삶으로 돌아와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드러내는 데에는 수학과 과학적 언어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혹은 깨달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윤리는 지극히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바뀜이 바로 종교적 깨달음이자 ‘구원(기독교적 구원의 의미는 아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치유, 즉 구원하기를 원한 것이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하는 말이 바로 삶이 변화하여 방향전환된 것이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사회계약론』을 집필할 때 귀족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이런 의미에서 ‘방향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모습이 현대철학에서 마르크스의 경우 새로운 삶에 대한 사회적인 분석으로 나타나고 니체 계열의 경우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과 각오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혼합되어야만 삶의 변화에서 사회의 변화 혹은 사회적 구원이 실현될 가능성이 보일 것이라고 김성우 교수는 지적한다.
이어서 김성우 교수는 강신익 선생의 말을 빌려 “진화의학에서 질병은 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질병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닌 순간 적응해 나가야 할 조건일 뿐”이라고 하였다. 즉 건강을 이상적 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변화의 과정으로 보며 질병을 삶의 문제로서 적응해야할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올바로 사는 사람은 문제를 비애로, 그러니까 문제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느낀다; 말하자면 그의 삶을 둘러싼 빛나는 에테르로 느끼지, 문제성 있는 배경으로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일종의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을 통해 ‘철학적 치유’를 이뤄내는 것으로, ‘철학적 치유’란 삶의 문제로부터 기원한 질병을 사유의 길을 통해 감내하며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삶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로지 언어분석에만 집중한 분석철학의 대표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삶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고 우리의 주체는 언어와 연결되어 생겨난 산물이기에 내가 나를 인식할 때 언어를 통해서 인식하게 됨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과학적 언어에 대한 맹신이 현대에서 인식이나 언어를 삶과 분리시켜 보게 만들어 삶을 왜곡하는 ‘마야(M?y?)’로 기능하며 우리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버리고 삶의 방향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전체 언어를 갈아 일구어야 한다(하이데거의 말)”고 주장한다.
침묵의 이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마법으로부터 치유되면 온전히 드러난 삶의 뜻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침묵’을 말한 이유이다. 언어의 문법적 환상으로부터 생겨난 문제의 덩어리들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치유이기 때문에 치유 후에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만약 다시 말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환상에 사로잡히고 말게 될 것이다.
김성우 교수는 이것을 유리에 비유한다. “유리는 아무리 투명해도 유리이다. 사람이 맨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도 이른바 유리와 같은 수정체를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투명해도 유리는 유리인 것처럼 삶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상언어(본질적 언어, 순수한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침묵해야 마땅하며 또 침묵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삶의 뜻은 스스로 드러나는데 이 직접성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후에 사다리는 필요 없으므로 버려야 하는 ‘직접성’이다. 높은 지붕 위에서 사다리를 지니고 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다리를 버린 이 직접성은 그래서 신비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신비스러운 것’이라 해도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이나 수학도 여전히 맑은 유리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단순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삶의 방향전환’이고 ‘돈오(頓悟)’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과학보다 더 중요한 삶과 가치로 나아가는 길을 탐구했다고 강조했다.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선불교적 스타일
비트겐슈타인은 서구철학의 지적 주류인 본질주의, 유아(唯我)주의, 논리주의(형식주의 및 그 한 형태로서의 실증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지젝이 바디우를 공격할 때 불변의 형식을 지향하는 칸트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플라톤주의의 핵심 또한 논리형식주의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 가지를 문법적 허구에서 오는 질병으로 본다. 기존의 서양철학을 해체한다는 것의 정수가 바로 이런데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상가는 모든 연관들을 묘사하고자 하는 소묘가와 매우 비슷하다”고 언급한다. 김성우 교수는 “언어의 한계를 명료화함으로써 논리, 자아, 신과 같은 본질주의적 신학과 같은 문법적 환상을 없애고 직접적 단순함의 ‘일별(Einsicht)’로 삶의 세계의 전체 연관을 조망하고자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스타일에서 우리는 선사들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말한 ‘짜임관계(constellation;星形)’ 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연기법(緣起法)’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며 삶의 세계와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나는 ‘직접적 단순성’을 추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스타일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선승(주로 화두선을 하는 선승)들의 스타일과 닮아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선승들은 똑같이 ‘우상’의 파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섬광’과도 같은 ‘번득이는 통찰’의 ‘직접성’과 ‘단순성’은 선승을 그대로 빼닮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삶의 문제는 ‘번뇌(煩惱)’라고 할 수 있는데 삶의 뜻이 언어화 하는 순간 그 뜻은 실체화 되어 다시 문제(번뇌)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논리철학논고』에서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김성우 교수는 “여기서 드러난 삶과 그 뜻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이 드러난 진리를 다시 새로운 우상으로 세우지 말라는 경고의 표지판이지 언어의 한계를 초월한 이상적인 영역의 존재가능성을 예고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비’라는 것은 메타가 아니라 ‘심층’이다. 선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일상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현실을 넘어 초월한 다른 영역이 아닌 삶의 깊이에서 나온다. 결국 일상과 깨달음은 같다. 그리고 심층이기에 일상을 긍정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에 머물지 않고 선승과 비트겐슈타인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보수주의자의 일상은 환각에 빠진 일상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선승은 능동적인 자기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엄격한 자기 부정(사다리 버리기)을 요구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의 길이 드러나면 기존의 길로부터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변화가 ‘치유’이다. 이런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침묵이란 그저 철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또는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변화하도록 요구하는 길의 ‘안내판(이정표)’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지극히 선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침묵은 인식하는 삶의 이정표 –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로서 인식하는 삶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서 “철학자들의 언어는 이미, 말하자면 너무 꽉 끼는 구두에 의해 변형된 언어”라고 말했다.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파리통으로 그 출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언어의 마법적 허구가 사라지면 드러난다. 언표 될 수 없는 침묵이 나의 세계를 드러내는 불교적 선수행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일대의 소망인 ‘인식하는 삶’의 이정표”라고 한다. 언어적 질병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삶은 이 질병의 치유 속에서 제대로 된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침묵의 수행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안과 밖으로서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사라진다. 안과 밖에 사라지고 삶, 즉 세계가 드러난다. 안과 밖이 사라지면 본체계와 현상계가 사라지고 선험적 주체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의식’이라는 ‘안’과 ‘감각대상으로서 객관세계’인 ‘밖’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생겨난 문법적 허구로서의 심리주의 실증주의, 논리주의와 선험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본질주의적인 신학적 마법이 사라지면 동시에 생생한 삶의 세계의 흐름이 드러난다. 이로써 기존의 철학적 문제들이 사라지고 치유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삶의 문제가 환상일지라도 이를 해결하는 치유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방편적으로나마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야말로 침묵함으로써 삶의 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식하는 삶’을 겨냥하다가 ‘살아가는 삶’은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이 비록 삶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결국 인식하는 삶에 머물고 만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일종의 비판으로써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성우 교수에 의하면 선불교가 지혜의 측면과 자비의 측면이 결합으로써 그 스타일의 완전성이 추구된다면 이 자비의 측면, 즉 사회적 실천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로서의 선불교와 철학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차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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