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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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4) 도제(道諦): 방법은 없는가?

 

기억의 전이

 

구제금융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우리는 빈곤의 재림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공포에 직면한 51%들은 무의식적으로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대안으로 떠올렸다. 지금까지 효과를 봤던 익숙한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적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몸과 정신에 깊숙이 각인된 개발주의적 기억은 성장 모델이 효과적이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51%는 필연적 삶의 욕구를 다시 한 번 집단화함으로써 이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업식(業識)에 끌려다니다가 호되게 당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고난은 과거의 어려움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의 겉모습은 실업, 부도, 빈곤 등과 같이 과거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출현한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은 과거와 같이 재화량의 절대 부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화량의 과도한 잉여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공포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고, 과거에 효과를 봤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려다가 재난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하게 해석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빈곤에서 과거의 적빈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기억의 전이는 과거의 독재자를 경제적 영웅으로만 회상하게 하는 기억의 선택을 만들어냈다. 또한 한국의 대중은 이제는 낡아버린 시대의 욕구인 개발주의적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관철해서 그때의 기쁨을 또 다시 맛보고자 했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와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이른바 ‘응답하라 70년대’의 간절한 외침은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추억 놀이를 불러일으켰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정치적 세력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를 교정하고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의 업식을 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것은 필연적 삶의 악순환을 끊고 정치적 삶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취될 수 있다.

 

무임승차를 넘어서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을 끊는 길은 정치적 삶의 양식을 다방면에서 시도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현재 국민 대중의 관심사는 소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거주의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고, 안온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경제 구조 혁신을 통한 질 좋은 일자리 확보와 복지 제도의 확충으로 호응하고자 한다. 성장 일변도의 경제 운영의 방식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흐름은 이미 거스르기 힘든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분화된 계층 및 세력과의 정치적 합의 과정을 요구한다. 과거에는 이 과정이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나 정당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정 정당이나 대통령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써 국민의 요구를 대리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한 추진 방식은 현대 복잡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 사회는 단일한 지도력을 토대로 사회적 갈등을 무마시킬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기 기획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시민들이 경제 활동을 자기 삶의 중심축으로 삼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민주적 참여를 자기 삶의 핵심으로 여기게끔 하는 정치적 삶의 수행을 요구한다.

하지만 국민국가적 규모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대의제적 방식을 채택해야만 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의 선진국들은 의회 민주주의와 거대 행정 체제를 결합하는 국가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 체제는 사실 시민들의 자치적 활동과 그 활동의 역사에서 노출된 단점을 극복하면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의 정치 체제는 시민의 자율적 구성 활동의 오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법적, 행정적 요구에 직면하여 정치 엘리트들의 인위적 구상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짐으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국 국민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오늘날의 정치 공동체를 건립한 주인이라는 의식이 희박하다. 더구나 많은 한국인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폭력적으로 취급당한 상흔을 간직하고 있기에 국민국가라는 근대적 정치 공동체는 개인적 삶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수단으로서의 이해되는 경향성을 띤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군사 정부 는 국민들이 자율적 시민으로서 공적 활동에 임할 수 있는 공간을 아예 봉쇄했기 때문에 필연적 삶 외에 정치적 삶을 경험하는 것은 소수 예외적 인물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 한국인이 필연적 삶의 방식에 익숙할 뿐, 정치적 삶의 양식에는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자료사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분명히 민주적 입헌국가 체제를 자율적으로 수립했던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는 필연적 삶 이외의 공적 시민으로서의 자치의 경험을 끊임없이 늘려나가고 있다. 정치적 삶의 방식이 필연적 삶의 습관을 압도할 수 있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민주적 의사소통과 합의의 절차를 존중하는 삶의 양태는 온갖 꼼수의 방해를 헤쳐 나가고, 구성원 간의 지난한 이해의 과정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민 자치라는 정치적 삶을 중단하고 특정 대리인이나 체계에 임무를 맡기는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민주적 헌정 체제의 수립 이후 한국 국민들이 범한 실수도 바로 이러한 유혹에 빠진 것이었다. 시민적 자치의 발걸음을 이어가지 못하고 대의적 기관과 정치인에게 정치적 업무를 맡겨버리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한국 사회의 복잡한 갈등과 요구는 특정 인물, 정당, 행정 기관 체계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 프로그램과 경제 구조의 혁신을 기획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답과 해결책을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제안하거나 추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한 한국의 대중은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잘 시행되는지 간이나 보려는 무임승차자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 엘리트들은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주도하는 역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노력들이 서로 소통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여건 조성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그들은 시민의 적극적 활동을 통해 제안된 대안들을 정부 정책과 연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의 이념이나 정책 방향과 부딪힌다 해도 정치 엘리트는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대리인 혹은 대리 기관들이 아무리 순정을 다 바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복잡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켜 버릴 것이다.

현대 한국은 숲의 왕을 옹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황금가지적 주술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대통령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고 권력을 몰아주는 수동적 해결책을 고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자 신드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51%의 승리감과 48%의 절망은 결국 100%의 배신감으로 보복할 것이다. 구원자가 추진하던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대중의 좌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하여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움직임을 낳을 수 있다. 이 움직임은 박정희 신드롬 정도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운동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

 

황금가지적 민주주의, 즉 구원자적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치적 삶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 제도의 수혜자로 멈춰 서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들이 공동체적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삶의 대안을 마련하고 기존과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노력을 어려워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야 말로 제도가 기획해주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기획하여 실현시키고 그것의 지속을 제도에게 압박하는 정치적 삶을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영원토록 남한테 얻어먹는 신세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 해먹는 요리가 더 맛나듯이 직접 마련하는 삶의 양식이 더 빛날 수 있다. 제도가 우리가 원하는 일자리도, 교육도, 의료도, 주택도, 문화도 주지 않는다면 직접 만들어 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작고 빈약하며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삶의 대안들은 늘어나기 마련일 게다.

체계의 시선에서 방치된 서민들에게 기존 제도 정치와 경제는 이미 ‘차가운 북쪽’이다. ‘북쪽의 제도’에서 얼어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난 앉아서 죽기 싫다. 어차피 버려진 몸, 자치의 삶을 상상하고 구현해보는 ‘남쪽’으로 튈 테다. 모든 버려진 이들의 동참을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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