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웹진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새해다. 그리고 새달이다. 물론 새날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새롭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에게 새 것을, 새로움을 준다. 구보씨는 새해를 맞아 새삼스레 눈을 껌벅대면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낡음이란 무엇인가? 낡음 또는 늙음은 어디서 오는가? 낡음이란 가두어진 시간이다. 새로움이 밖에서 온다면, 낡음은 안에서 쌓여간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다. 생각해 보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떤 경계를 가진 유한한 것이 자신의 밖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닌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무한한 존재에겐 엄밀히 말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한계를 가진 포착에서, 불완전한 포착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한한 시간이라는 발상은 불가피하게 역설을 수반한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죽으면 그뿐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과 똑같이 다시 살아 우리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어차피 무한한 시간 아닌가. 그런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면 된다. 무한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무한과 시간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은 유한함의 소산이다.
어떻든 새로움과 낡음은 안과 밖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존재는 자기 안에 시간을 가두며 그래서 낡아간다. 안에서부터 새록새록 솟아나오는 새로움이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아니, 없다. 엄밀히 말해, 그런 것은 없다.
생각해 보라. 안에서 비롯하는 새로움이라면 이미 안에 있던 것이고, 따라서 진정 새로운 것일 순 없지 않겠는가.
물론 자기동일성의 어떤 원리가 순차적이고 계기적으로 전개될 수 있고, 그래서 그 하나하나의 단계가 새로워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는 변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마저 외부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일어난다. 또 그 변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자기동일성의 원리 전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각 단계에 국한된 입장에서이다. 나뭇잎이 돋는 것은 헐벗은 나무의 견지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지, 나무 자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따분한 얘기를 하다니, 구보씨가 시나브로 이상해진 걸까?
“꼭 그렇진 않아. 넌 원래 좀 이상했다구.”
Y도 달라지진 않았다. 사람이 새로워지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난 니네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무한이라는 말도 그래. 세상이 무한이 어딨니? 그건 그냥 추상일 뿐야. 그냥 생각에 불과한 거라구. 그런 걸 시간에 견줘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뭘하니? 그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 봐. 아님, 차라리 잠을 자든지.”
“허, Y야, 너도 추상이 얼마나 중요한진 잘 알잖아. 0을 생각해 봐. 세상에 0이라는 건 없어. 무(無)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렇지만 0이나 무라는 개념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문명은 불가능했을 거라구. 무한도 그래. 무한이라는 개념이 없이 미적분이 가능했겠어?”
“난 그런 수학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냐. 니들이 쓸데없이 우리 삶에 끌어들여 고생시키는 추상적 개념들을 얘기하는 거라구.”
“그게 뭐가 달라. 수학도 얼핏 보면 이상해 보여. 현대수학은 더 그래. 집합론 같은 걸 보라구. 너도 괴델이니 칸토르니 하는 수학자 얘기는 들어 봤잖아. 무한은 현대 집합론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는 현대 집합론에서 주요 개념들을 빌려와. 안과 밖, 시간 따위의 얘기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구.”
“그렇지만 철학은 수학이 아니잖아. 그렇게 엄밀하지도 않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 니들은 여기저기서 개념을 가져다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대지만 실제로는 괜한 문제를 만들어내거나 오히려 더 엉키게 하고.”
“후.. 그런 건 철학자들도 흔히 하는 얘기야. 철학의 논란거리고 반성거리지. 하지만 Y야, 새해 초부터 그런 걸루 골치 썩이진 말자. 내 얘기의 요지는 새로움이란 항상 밖에서 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거지.”
“거봐. 니들 얘기는 결론이 먼저 나 있잖아. 철학이 이데올로기라는 건 구보 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구.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거기 맞는 얘기들을 꿰맞추는 거잖아.”
“크, Y야,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내 말의 취지는 바로 그런 폐쇄성을 넘어서자는 거거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자고 하는데, 거기다 대놓고 그건 결론이 먼저 나 있는 폐쇄적인 거라고 공격하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잖아.”
“개방성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도 얼마든지 있어. 개방적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한미 FTA를 생각해 봐. 개방성을 내세우는 건 대체로 약한 측을 잡아먹으려는 힘센 놈들의 수법인 거야.”
“하하… 그것두 그렇지. 하지만 Y야, 폐쇄적인 태도로는 힘센 놈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개방해서는 안 되지만, 밖으로 향한 문을 걸어 닫아서는 안 되는 거야. 사실은 걸어 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걸어 닫는다고 생각할 뿐이지.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보여주는 것도, 그걸 원용한 바디우의 철학이 내세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야. 이렇게 바깥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이상, 끝까지 안과 자기만을 고집할 순 없다구. 그런 안과 자기동일성은 낡은 것이 되고 결국 사멸하게 되지. 사멸이라는 방식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야. 어차피 밖과 관계하는 이상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느냐일 뿐이야. 고집스럽게 죽어갈 것이냐, 개방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구.”
“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소련? 북한?”
“뭐, 그렇게 거창한 데까지 갈 필요도 없어. 매사가 그렇다구. 이를테면 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구보야, 착각하지 마. 난 너랑 아무 관계도 아니거든.”
“그런 게 바로 무관계, 즉 규정되지 않은 무한한 관계라는 거야. 이루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관계지, 후훗…”
“얘 좀 봐, 진짜 웃겨…”
“실은 내가 어제 문용식이라는 친구가 쓴 책을 읽었거든. 왜, 나우콤과 아프리카 방송 사장 있지? 촛불시위 때 구속되는 바람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 얼마 전 대기업이 소매업에 뛰어드는 문제로 정용진인가 하는 재벌2세와 트위터에서 논란을 벌였던 그 사람 말이야.
예전에 알던 친군데, 자기가 책을 냈다고 이-메일을 보냈더군. 아니, 사장님이라면서 책도 한 권 보내주면 안 되나,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사 봤지. 그간 어떻게 지냈나 궁금해서 말이야. 이전에 학생운동하다가 감옥살이도 여러 번 했어. 컴퓨터하곤 전혀 무관했던 그런 사람이 인터넷 회사의 사장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잖아.
어떻든 난 흥미롭게 읽었어. 고생도 많이 하고, 또 노력도 많이 했더군. 나 같은 먹물하고는 전혀 다른 삶이라고 할까… 20대의 절반을 감옥살이로 보내곤 선배의 간청과 밥벌이 때문에 이런 쪽에 발을 디디게 됐다는데, 처음엔 전문지식이 부족하고 문화적 배경도 달라 따돌림도 꽤 받았나 봐.
그렇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결국 인정을 받게 되었대. 그러나 IMF를 겪은 데다 인터넷 때문에 pc통신 사업이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지금부터 10년쯤 전엔 나우콤이라는 회사의 한 해 적자가 50억쯤이었다는군. 그때 이 친구가 사장이 되어 처음 한 일이 밖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거야.
우선 조직의 ‘순혈주의’를 깨서 외부에서 경력을 쌓고 들어온 직원을 30%까지 늘려가고, 직원들이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나 외부와 경험을 교환하도록 했다고 해. 물론 이렇게 밖으로 눈을 돌린다고 자기를 완전히 다 내준 건 아니지. pc통신 때부터 쌓아온 기본 기술력을 인터넷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환시켜 인터넷 개인방송인 ‘아프리카’(afreeca)를 시작한 거야. 그리고 이게 성공한 거지.
물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문용식과 나우콤에 있는 건 아니야. 바깥과 새로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지. 밖의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부는 낡고 쇠퇴하기 마련이야. 그걸 우린 보통 늙는다고 하지. 전에도 말했지만, 늙음이란 새로움에 대처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줄어들어가는 걸 가리킨다구.”
“구보야, 잠깐.”
“아, 미안. 내 말이 너무 길었지? 그렇지만 한 마디만 더 할께.”
“꼭 그래야 돼? 나랑 별 상관없는 얘기 같은데…”
“Y야, 이건 너하고도 깊은 관계가 있는 거야. 왜냐구? 이 구보랑 관련된 일이니까. 넌 나랑 무한한 관계 속에 있잖아, ㅎㅎ…
실은 이 웹진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어서 그래. 뭐, 너도 봤으니까 잘 알 거야. 이 웹진은 우리로선 새로운 시도야. 적어도 철학 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새로움이 충분치 못하다 싶어.
그래서 얘긴데, 여기서도 필자를 30% 정도는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이 어떨까. 동호회면 몰라도 웹진에 필자를 한 단체 소속으로 국한시킨다는 것은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아.”
“글쎄, 하지만 지금 상태면 누가 여기에 기꺼이 글 쓰려 할까?”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난 그 성공 여부가 이 웹진이 지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봐. 조로(早老)해서 화석화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렇지만 그거 새로움이나 개방성에 대한 맹신 아냐? 얄팍한 새로움보다는 지조 있는 충실함이 더 중요한 거잖아.”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보단 지조 있는 새로움이 더 좋잖아. 나와 너의 관계처럼 말이야. 어, Y야,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못 보던 표정이지? 거 봐, 구보야. 새로운 게 다 좋은 건 아니라구.”
문성원(부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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