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여전히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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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벌써 11월이다. 세월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다더니, 구보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심장의 박동이 늦어지고 몸이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라 한다.

포유동물의 평생에 걸친 심장 박동 수는 생쥐건 코끼리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코끼리가 생쥐보다 오래 살지만, 생쥐의 생체 리듬이 코끼리에 비해 빠르고, 그런 만큼 생쥐의 하루는 코끼리의 하루에 비해 길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해는 뉘엿뉘엿 한참이나 서쪽 산에 걸려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보다는 기억할 만한 새로움이 별로 없는 것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이유겠다. 큰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은 지낼 때에는 지루하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어디 기억이 멈출 이정표나 매듭도 없이 초라하게 접혀 버린다. 반면에, 낯선 곳에서 긴장하여 지낸 나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탄한 삶과 충일(充溢)한 삶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새로움과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늙음이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보려 하다가도, 에이, 뭐 다 마찬가지겠지, 별 다른 게 있겠어, 하고 돌아서버리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 그게 늙는다는 징표가 아닐까. 그것은 내부의 힘이 쇠잔(衰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얘, 구보야. 너 또 혼자 청승이구나. 웬 일이니, 이 좋은 곳에까지 와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던 구보씨의 어깨를 Y가 탁 친다. 그러고 보니 Y는 확실히 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너는 내가 무슨 생각 좀 할라치면 꼭 방해더라. 이래서야 어떻게 괜찮은 생각이 나오겠니. Y, 넌 한국의 철학을 훼방 놓고 있는 거야.”

“풋, 그런 철학은 백번 훼방 놔도 괜찮아. 철학이 무슨 사진틀 같은 거니? 폼 잡고 인상 쓰고 있으면 나오게?”

“그래도 Y야, 궁리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 운문사(雲門寺)의 마당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뜨락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 단풍 한 잎사귀, 낙엽 한 장에도 한 해의 햇살과 나무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구보야, 그러니까 하는 얘기라구. 이렇게 멋진 가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 바엔 한 해의 햇살이 다 무슨 소용이니?”

 

“누가 아니래? 나두 충분히 즐기고 있다구. 다만 그 즐기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야. 넌 사색의 즐거움이라는 것두 모르냐? 주변의 정경(情景)에 어우러지는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리듬, 여기에 스스로를 맡기는 거야. 그게 바로 사유(思遊), 곧 사유(思惟)의 즐김이라구.”

“후훗, 그러시구나. 그럼, 어디 그 즐김에 나도 좀 동참시켜 줘 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혼자만 즐기면 무슨 재민겨.”

“헤… 막상 그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군. 사실은 별 생각 안 했어. 늙음과 벌거벗음에 대해 막 생각하려던 참이었거든.”

“윽, 또 벌거벗음이야? 넌 질리지도 않니? 여름에야 더워서 그랬다 쳐. 하지만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벌거벗는 타령이니? 쯔쯧…”

“Y야,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즘이야말로 벌거벗음의 계절이거든. 저 떨어지는 낙엽들을 좀 봐. 저게 벌거벗는 게 아니면 또 무엇이겠어? 저 벌거벗음은 말이야, 이를테면 미련 없는 털어냄이고 버림이야. 그것을 통한 일종의 초월이지. 다른 단계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에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한 잎들의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운 걸 거야. 그건 이제 다가올 벌거벗음이라는 겉보기의 부정성(否定性)에 바쳐진 자연의 경의(敬意)가 아닐까 해.”

 

“하여튼 너네는 참 갖다 붙이긴 잘 한다. 거기 초월이 왜 나오니?”

“사실, 그 초월이란 게 중요한 거야. 벌거벗음과 초월은 직결되니까 말이야. 옷을 입거나 감싸는 건 현재의 차원을 지키고 확충하는 거잖아. 반면에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건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되는 거야. 벌거벗음은 단지 옷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잎사귀들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을 생각해 봐. 그 벌거벗음이 잎사귀의 결핍에 불과한 걸까?”

“봄이 되면 잎사귀가 또 나잖아. 옷을 벗은 사람들은 옷을 또 입을 거고. 대체 거기 무슨 초월이 있다는 거야?”

“Y야, 그게 똑 같은 잎사귀는 아니잖아.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닌 벌거벗음을 당한 사람들이나 벌거벗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후에 똑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도 아닐 테고. 내 말은, 벌거벗음이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그건 현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 밖을 지시한다는 거지. 잎을 떨궈낸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 나무는 이제 나이테의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거야.”

“피이, 그게 무슨 초월이야. 그냥 다음 단계지.”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管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

“에로틱? 초월에다 에로틱까지? 에구, 구보야,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 뭐가 이상해? 원래 벌거벗음은 에로틱한 거잖아. 중요한 건 에로틱에 초월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이야. 근데 이것도 좀 살펴보면 진부한 얘기거든. 플라톤 시절부터 에로스는 현실을 넘어감을 뜻했잖아. 게다가 바타이유를 생각해 봐. 바타이유에게서 에로스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걸 가리켜. 애당초 성(性)이라는 게 개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개체를 창출하는 행위와 관련되는 거 아냐? 그럴려면 벌거벗어야 한다구. 옷 입은 채, 즉 자기를 단단하게 감싸고 고수한 채 새로움을 창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얼씨구, 점점…”

“그리구 말이야, Y야, 에로틱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움에 있는 거야.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 위험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거든. 매혹은 그 위험의 반대급부야. 우리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사랑이 매혹이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매혹적이지 않으면 위험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랑에는 매혹의 향기가 있는 것이란 말이지.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야. 벌거벗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거든.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매혹적일 수 있는 거야.”

“아서라, 구보야. 네가 벗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늙음의 문제거든. 늙음은 이제 위험의 감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구. 벌거벗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접게 된다는 뜻이야. 늙음이 보수(保守)와 또는 수구(守舊)와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정도의 문제야. 정말로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건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까지는 새로움의 추구를, 벌거벗음과 마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자기 강제의 고려가 있었던 거라구.”

“….”

“Y야, 너 드디어 내 말에 감복했구나. 이제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니…”

“응? 뭐라구? 아, 미안,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네 말을 못 들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 길이네. 맞아, 여기가 유명한 운문사의 소나무 길이구나. 예전에 유홍준이 아낙네의 늘씬한 벗은 다리랑 견주었던 그 소나무 길이지, 아마. 그러나저러나 어쩌냐, 구보야. 이 소나무들은 잎을 떨구지 않으니 말이야. 벌거벗질 않으니 초월하군 무관한 나무겠네. 그런데, 왜 유홍준은 이 나무들을 에로틱하다고 하면서 그 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까. 하여튼 오징어는 말려도 사내들은 못 말린다니까.”

 

문성원(부산대,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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