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리본-계몽의 진실 [철학적 인간극장]
엄숙한 정적.
이 영화는 일차 세계 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지주의 성관을 교회와 농장 관리인의 집,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가 둘러싸고 있다. 여기는 아직도 중세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사회는 지주인 남작과 엄격한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다. 이 사회는 사람들이 입은 목을 채운 검은 옷처럼 숨 막힐 듯하다. 흑백 화면에 강력한 키 라이트, 고딕적 느낌이 드는 붉은 벽돌 건물들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표면적으로 엄숙한 정적이 흐르는 성관 마을의 이면에서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다 같이 고리를 이루어 지주와 교회의 지배라는 억압적 표면을 뚫고 튀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엄숙한 정적이 마을의 동요를 짓누르고 말았다. 그 결과 사건들은 비현실적인 꿈처럼 보이고, 무의식 속의 모호한 충동처럼 존재한다.
이 사건들은 당시 마을 선생님이었던 화자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나중에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재단사가 되었다. 그는 그때 이 마을 남작 부인의 갓난아이의 보모인 열일곱 살의 처녀를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과 풋풋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남녀 관계에 관해 아직도 엄격했던 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연애는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반조해주는 거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들을 관객에게 서술해 주는 선생님의 시선조차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들 가운데 많은 부분에 아이들이 관련되지만 화자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사건 속에서 아이들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다가오는 사건을 다만 예감하지만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그런 사건을 저지르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화자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암시되는 그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사건은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모호함은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려 의도했던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작농과 목사의 아이들
사건은 세 갈래에서 일어난다. 나머지 두 가지 갈래들은 화자의 이야기에서 중심을 이루는 갈래를 덩굴손처럼 에워싼다. 우선 하나의 갈래는 한 소작농의 부인의 사고로 인한 죽음에서 비롯된다. 남작은 그 부인을 제재소에서 일하게 했는데, 제재소의 마루가 오래되어 함몰되면서 그 부인은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소작농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죽음이 남작의 책임이라 생각하면서 남작에게 분노한다. 반면 아이들의 아버지인 소작농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분노를 억누르려 하지만 아이들의 분노는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남작과 소작농 가족 사이에 긴장상황이 벌어진다.
이 아이들의 분노와 연관하여 몇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작의 아이(이름이 ‘지기’이다)가 밤에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맞고 숲속에 내버려진다. 또한 마을 축제 날 소작농의 장남이 양배추 밭을 낫으로 베어 뭉그러뜨린다. 이어서 남작의 헛간에 누군가 불을 지른다. 영화에서 이 방화사건은 아마도 소작농의 장남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데 소작농은 스스로 그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그의 장례 행렬에 도망갔던 장남이 돌아와 참석한다.
이런 소작농과의 긴장은 남작과 남작 부인 사이의 불화와 교착되어 있다. 약간 바람기를 보이는(가정교사와의 협주 장면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남작 부인은 권태로운 시골생활을 견디지 못한다. 부인은 자신의 아이가 관련되는 이 소작농과의 대립을 핑계로 마을을 떠나 멀리 이태리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남작의 아이 지기가 농장 관리인의 아이들과 놀다가, 관리인의 아이들이 지기가 가지고 노는 피리를 빼앗으려다가 물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한다. 남작 부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마을을 영원히 떠나겠다고 통고한다. 이때 남작 부인은 대담하게도 남작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남작 부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지배자들의 내면적인 공허를 보여준다. 이런 내면적 공허는 소작농 아이들의 이미 억누를 수 없게 된 저항과 맞물려 있다.
또 하나의 갈래는 이 마을 교회 목사의 집안에서 일어난다. 목사는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운다. 그들의 사소한 잘못조차 매로 다스려지고, 한 아이의 잘못은 형제 전체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목사의 정신적으로 엄격한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 햐얀 리본이다. 잘못을 범한 아이는 죄를 용서받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하얀 리본을 매달고 있어야 한다.
목사의 거듭된 처벌에 제일 큰 딸(“첫째 딸”이 적절할 듯.) ‘클라라’가 저항한다. 클라라는 저녁에 늦게 집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이미 한 차례 하얀 리본을 매달았다. 새해가 되어 용서받은 클라라는 이번에는 견진성사를 위한 학습에 모인 아이들이 장난치며 놀았다는 것에 책임을 지고 목사로부터 다시 한 번 처벌받는다. 자신의 무고함을 고집하면서 클라라는 저항한다. 클라라는 학교에서 벌을 서다가 쓰러진다. 병이 나은 뒤 이번에는 아버지 목사가 아끼는 새를 조롱에서 꺼내 가위로 찔러 죽인다. 새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처럼 가위에 꽂힌 채 목사의 책상 위에 놓여진다.
이런 두 갈래 사건들은 남작이나 교회처럼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이 저항은 이미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꿈틀거리는 충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그 힘은 미약하여 압도적인 억압의 힘 아래서 형체를 얻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다.
세속적 유물론자
이 영화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은 성관 마을의 의사와 연관된다. 그는 세속적 유물론자이면서, 인간을 시니컬하게 파악하는 냉혹한 지배자이다. 이 사건은 어쩌면 피비린내 나는 선정적인 사건이다. 나중에 가서야 밝혀지지만(그것조차도 불충분하여 관객의 오랜 추리 끝에서야 비로소 짐작되는데) 그는 그를 돕던 마을의 산파와 정을 통한다. 의사에 대해 그녀는 굴종적이지만, 집착이 강한 여자이다.
그녀는 의사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이를 감추고 낙태시키려다가 잘못하여 장애아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이 ‘칼’이다. 그녀는 이 아이에게 애정을 기울여 키우지만 그녀에게서 아이는 다만 의사를 잡아두는 인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녀는 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애아의 출생의 비밀, 의사 부인의 죽음 등은 영화 속에서 소문으로 취급되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된 관계, 당시 사회에서는 억압된 욕망의 관계는 마침내 수면에 떠오르면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의사가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질러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는 누군가 나무 사이에 매어둔 끈에 걸려 말이 넘어지면서 팔을 다치고 30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자 마을의 산파는 의사의 아이들-큰 딸인 ‘안나’와 작은 아이-을 돌본다는 이유로 의사의 집으로 들어온다. 그날 그녀는 칼을 데리러 학교로 오는데 그녀의 득의의 걸음걸이는 이미 그녀가 바로 범인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그녀는 학교에서 돌아가는 아이들을 인사하지 않는다고 야단치기도 한다.
얼마 지나서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돌아온다. 의사는 그 사이에 훌쩍 커버린 열네 살짜리 큰딸, ‘안나’의 모습에 놀란다. 영화는 의사가 큰딸을 어떻게 범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안나는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오히려 기뻐한다. 안나와 관계하면서 의사는 드디어 산파에게 떠나기를 명령한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이용했던 산파에게 냉혹하게 말한다. 그녀의 추한 모습 때문에 토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한다.
이렇게 모욕 받은 산파의 집착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충분한 단서를 보여주지 않고 그저 암시만 할 뿐이다. 우선 산파는 칼의 눈을 칼로 찌른다. 그것이 그녀 자신의 짓이었다는 사실은 칼의 눈을 치료하는 의사를 지켜보는 산파의 냉정한 모습에서 충분히 암시된다. 더구나 칼의 상처와 더불어 남겨진 편지는 신의 이름으로 경고하고 있다. 거기에는 칼이 대신 처벌 받는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 후에도 의사는 여전히 산파에게 냉혹한데 그것은 그가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파의 집착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바로 일차 세계 대전의 서곡을 알리는 황태자의 저격사건과 같은 날 벌어진다. 영화는 이 사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다만 사건 직후 산파가 당황하면서 영화의 화자인 선생님이 타고 가던 자전거를 빼앗아 타고 떠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어서 영화는 산파의 집이 굳게 잠겨 있고, 이어서 의사의 집도 진료 중단이라는 팻말이 걸린 채 잠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영화는 이틀 후 남작의 지시에 의해 사람들이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간 이후 집안에 가득한 정적만을 소개한다. 감독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감추어 버리고 만다.
계몽의 진실
감독은 영화에서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전쟁이 나자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든다. 마을 농부들 그리고 남작의 가족, 최후로 목사가 등장한다. 관객들로서는 당연히 목사가 이 교회의 앞으로 걸어와서 미사를 집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목사는 앞으로 걸어오다가 다시 신도들이 앉던 연도에 앉고 만다.
목사가 있어야 할 지점에는 아무도 없다. 그 지점에는 관객들이 대신 앉아 있다. 아니면 그 장면은 신의 심판의 장면으로 보아야 할까? 어떻든 이런 엔딩의 처리는 감독이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선언으로 생각된다. 모두들 관객이 되어(아니면 신이 되어) 이 사건들을 판단해 보라. 그런데 비평가로서는 표면적 태도와 달리 은밀하게 암시된 감독의 판단을 관객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독의 은밀한 판단은 무엇인가?
영화의 중심이 된 사건은 가공할만한 사건이다. 여기에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나 도착적 살해라는 선정적 테마가 깔려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사건들을 ‘성애와 스릴의 영화’라는 장르 문법으로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심지어 사건에 대한 약간의 암시조차 감추어버릴 정도이다. 작가는 이 사건을 남작의 사회적 지배와 기독교의 정신적 지배와 고리를 맺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이 사건을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맥락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분석과 모럴의 분석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적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태도는 모럴의 관점으로 보인다.
사건을 보는 작가의 모럴과 연관하여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교회 목사의 태도이다. 그의 엄격한 지배적 태도에 실낱같은 틈이 벌어진다. 아버지인 목사는 클라라가 새를 죽여 책상에 놓아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견진성사를 클라라에게 베푼다. 이어서 목사의 작은 아이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키우던 다친 새를 클라라가 죽인 새의 대신으로 아버지에게 건네준다. 이는 용서와 고해 그리고 신의 은총이라는 기독교적 정신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건을 보는 작가의 모럴이다.
작가의 이런 모럴의 관점에서 볼 때, 의사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오만의 극치이다. 영화 속에서 의사가 산파에게 던지는 독설은 세속적 유물론자의 극단을 보여준다. 세속적 유물론자로서 그에게 인간이란 욕망일 뿐이다. 타인은 이런 욕망의 수단이며, 그 욕망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그는 자유이다.
세속적 유물론자의 이런 모습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서 다루었던 계몽주의자의 모습과 닮았다. 헤겔은 계몽주의의 근본입장을 ‘유용성’이라는 모럴로 파악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자기확실성이며, 다른 모든 것(보편성)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유용성)이라는 것이다. 모든 다른 것은 그 스스로 내재적인 어떤 가치도 없는 것(허무성)이다. 헤겔은 이처럼 계몽주의를 ‘유용성’과 ‘보편성’ 그리고 ‘허무성’을 포괄하는 개념체계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장은 계몽주의를 그저 보편성(동일성)의 원리로 파악하는 데 그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보다 더욱 가까이 계몽의 진실에 다가갔다 하겠다. 헤겔이 말한 계몽의 진실이 바로 이 영화에서 의사의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이병창(동아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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