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트와 천안함[철학적 인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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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과 권력.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성격들 중의 하나가 아마 나르시스트가 아닐까 한다.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트는 그리스 신화에서 처음 주목받은 이후 많은 철학자, 예술가들이 분석하려 했던 대상이었다. 그런 분석 가운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특히 주목받을 만하다.

라캉은 거울 단계(상상계)라는 개념을 통해 나르시시즘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나르시스트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자기 어머니(라캉은 이를 개념화 하여 대타자라 부른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바로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임을 확신한다. 라캉은 욕망의 대상을 ‘팔루스(phallus:남근)’라 지칭하였는데, 나르시스트가 거울 앞에서 희열을 느낄 때 그것은 자신이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라는 확신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나르시스트의 자기 매혹은 단순한 에고이즘과 구분된다. 에고이스트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나르시스트의 자기 매혹은 대타자(곧 어머니)의 욕망을 전제로 하므로, 오히려 나르시스트는 자기 부정성 또는 자기 상실성을 드러낸다.

라캉에게서 나르시스트는 항상 그 분신과 연관된다. 나르시스트는 대타자의 욕망에 구속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대타자의 팔루스라고 확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 대해 의심한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대타자의 팔루스인지 또는 무엇이 대타자의 팔루스가 되는지 의심한다. 나르시스트에게 확신과 의심은 끊임없이 교체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확신과 불신이 교체되는 현상을 라캉은 ‘부정(negation)’이라 하여 이를 도착증의 기본 메카니즘으로 규정한다.

이런 부정의 현상 때문에 나르시스트에게는 필연적으로 분신이 출현한다. 자신의 확신이 불신으로 바뀔 때, 나르시스트는 그것을 자신의 분신이 대타자의 욕망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설명하게 된다. 이 분신은 대타자의 팔루스가 되고, 나르시스트는 그런 분신을 부러운 마음과 질투의 심정으로 흘겨본다. 이런 분신의 역할(대타자와 구분하여 소타자라 불린다)은 대체로 자신과 가까운 형제자매들에게 전가되지만, 때로는 이런 분신은 환상 속에서 창조되기도 한다.

나르시스트의 모습은 예를 들어 의처증 환자에게서도 확인된다. 의처증 환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누가 훔쳐가는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누가 훔쳐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처증 환자는 오히려 자신의 아내(대타자로서의 아내)에 대한 자신의 자리(곧 팔루스로서의 자리)를 누가 대신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아내를 의심하게 된 것은 사실은 자신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자신이 아내의 팔루스가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의심한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가는 소타자 곧 분신은 때로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그 스스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렇게 먼저 자기 아내의 부정(不貞)의 대상인 소타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해서, 그는 그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를 찾는다. 그는 어떤 사소한 사실이라도 아내의 부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아무리 확신할만한 증거라고 할지라도 그의 확신을 밑받침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려 한다. 그의 의심은 너무나도 서투르며 그는 오히려 의심의 서투름을 즐긴다.

따라서 의처증 환자에게서 자신에 대한 확신과 불신이 교체되면서, 자신의 자리를 뺏어가는 소타자의 존재도 부정되거나 긍정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내가 부정을 범했다는 증거도 아직 모자라거나 이미 충분하다. 그러므로 의처증 환자는 의심의 천재이다.

천안함 사건의 변질과정

최근 일어난 천안함 사건은 이런 나르시스트의 모습을 닮았다. 그것은 천암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드러내는 정부 당국의 서투름 때문이다. 천암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주장은 아주 확고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증거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스스로 누설하고 있다.

처음에 발표될 당시만 해도, 그것은 그저 평범한 사건으로 보였다. 처음에 군은 유가족들 앞에서 군함이 얕은 바닷가에 들어가서 좌초되었다고 지도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사건이 나자 처음에는 긴장해서 새떼를 보고도 총질했던 군은 곧 이를 단순한 좌초사건이라고 보고서 경계를 해제했다.

한반도 군사 상황을 책임진 미군도 처음에는 이 사건을 그저 단순한 사건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군은 태연하게 북한군의 특이동향은 없고, 군함의 내부 문제와 관련된 것 이외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없다고 발표했다. 좌초 후 지휘관의 잘못된 대응으로 배가 두 동강 나고 많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희생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도 약간의 태만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보고에 따라 단순하게 규정되었던 사건은 점차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런 왜곡은 사건이 일어난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서 시작되었다. 처음 발표된 사건의 내용이 조금씩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변경되기 시작했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장소, 시간이 춤추기 시작했다. 언론에 갖가지 추측과 가정이 사건 조사 관계자의 이름으로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일찍부터 다만 하나의 가설로 제시되었던 주장 즉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설이 확정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시작했고, 다른 모든 세부사항들은 이런 가설에 맞추어 조정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추측과 가정들 가운데 이 가설과 어긋나는 것은 마치 무의식적으로 억압되는 것처럼 언론의 표면에서 사라져 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비틀거린 이후 사건은 마침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거의 전쟁 포고에 가까운 사건으로 확정되어 버렸다. 이렇게 확정되자 여기서부터 사건은 하나의 가상현실이 되었다. 가상현실이 되어버린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파생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남북 사이에는 전쟁 상황이 벌어졌고,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처음에 태평스러웠던 미국의 태도도 바뀌었고, 그 결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국제적 대결이 전개되었다. 유엔의 안보리가 소집되었다.

드디어 북한의 침투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군에 대한 문책의 소리가 높아졌다. 군에게 사건을 왜곡시킨 책임을 묻던 시민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로 전치되었다.

그러나 군 조사당국이 내미는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물증이라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웠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증거이었지만 정부와 일부언론은 시민들이 그런 증거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터무니없어 했다. 그 결과 국제적으로 보면 천안함 사건은 미아가 되어 버렸다. 안보리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더구나 사건을 왜곡시키는데 기여한 군은 자기 발등에 스스로 도끼를 박았다. 군은 전투에서의 패배보다 더 엄중한 경계에서의 패배라는 치욕을 떠안고 말았다. 그 조작된 치욕은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사실로 인정되고 말 것이다. 치욕이야 참으면 되고, 국제적인 망신은 눈감는다 하더라도 한번 뒤 흔들린 군의 명예는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명예를 먹고 사는 군인이 역사상 유례없는 패배의 치욕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말이다.

나르시스트와 북한 핵

천안함 사건 전체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서투름이다. 사건의 왜곡이 너무나도 서투르며, 군 조사단이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운 것들은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것들이다. 더구나 그 증거는 이미 자신의 서투름을 스스로 누설하고 있다. 어쩌면 그 증거들은 이렇게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기에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서투름은 정부와 군 그리고 언론의 확고부동한 확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수없이 남발되는 보증수표와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대체 이런 기묘한 대조는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이런 기묘한 대조 때문에 필자는 하나의 가설이지만, 천안함 사건의 배후에 있는 정부, 군, 그리고 조중동 언론이라는 소위 군-정-언 복합체 속에서 나르시스트의 증상이 발견된다고 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북한의 침투 공격이라는 군-정-언 복합체의 주장은 자신의 분신에 대한 나르시스트의 증오와 너무나도 닮았다.

이렇게 사건의 본질이 나르시스트 증상이라 규정한다면, 주요한 것은 그렇다면 누가 이런 군-정-언 복합체의 대타자인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나르시스트의 증상은 대타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것이 바로 미국이 아닐까 한다. 미국은 군-정-언 복합체를 보호하면서 양육해 왔으니 군-정-언 복합체의 대타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나르시스트에 대한 라캉의 이론에 따라서 볼 때, 천안함 사건으로 불거진 북한에 대한 군-정-언 복합체의 증오감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그 자신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군-정-언 복합체는 자신들의 대타자인 미국의 욕망 대상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군-정-언 복합체는 그런 믿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군-정-언 복합체의 확신이 무너졌다. 군-정-언 복합체의 마음속에 어떤 자격지심이 생겨났을 것이다. ‘미국이 우리가 좋아서 우리를 지켜주려 하겠어?’ 이제 군-정-언 복합체는 언제라도 동맹국 미국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런 두려움이 군-정-언 복합체의 마음속에 두 가지 환상을 낳는다. 하나는 군-정-언 복합체가 미국이 좋아할 팔루스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온갖 추파가 던져진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온갖 양보가 이루어진다. 그 단적인 예가 광우병 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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