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셰이아’,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심찬희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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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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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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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찬희(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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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한철연 신년회 문화행사로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를 초청 상연하였고, 상연 후 감독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

2008년 이집트 카이로와 아스완 등지를 혼자 여행하던 윤주영 감독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셰이아에 이끌린다.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약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삶의 터전인 만셰이아는 카이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도시 빈민들이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셰이아의 매력에 이끌린 감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아랍어로 적은 종이를 들고 이곳의 거주민들에게 대답을 구하고자 했다. 의사소통 안 되는 외국인의 이런 행동이 거주민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감독에게 아랍어의 벽을 넘어 거주민들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헨드와 제납 자매였다.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그리고 만셰이아의 거주민들에게도 역시 막연한 죽음보다는 매일의 구체적인 생존이 훨씬 절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감독이 얻게 된 답은 죽음에 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감독은 2년 후 캠코더를 들고 혼자서 다시 헨드와 제납 자매를 방문하여 그들과 매일 함께 생활하며 영화를 제작했으며, 다큐의 많은 부분은 출국하기 며칠 전에 겨우 허가를 받아 촬영한 헨드, 제납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상영에 앞서 영화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한철연 회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상영 후 먼저 죽음이라는 큰 주제와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여성주의적인 내용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질문이 있었다. 영화가 이집트 여성들의 척박한 삶을 부분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감독이 선호하는 영화의 제목은 ‘죽은 자들의 도시’보다는 ‘만셰이아’다. 죽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만셰이아에 이끌리게 되었지만,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은 만셰이아라는 장소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겪은 경험들이었다. 감독은 영화와 ‘죽음’의 연결고리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헨드와 제납의 대답에서 찾는다. 자매는 삶의 시작을 결혼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결혼은 또 죽음과 연결된다. 결혼은 이들에게 돈과 발(足), 즉 자유인 것이다. 결혼을 통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같은 삶을 시작하게 해 줄 좋은 결혼이 없다면 죽음을 통해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죽음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삶이 불가능한 곳, 혹은 살만한 삶의 바깥이다. 헨드와 제납의 경우 그것은 결혼 바깥의 삶을 의미한다. 만셰이아에서 두려운 것은 흔히 보는 죽음이 아니라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 그래서 신이 자신들을 돌아 봐 주지 않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Mansheia(죽은 자들의 도시)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

죽음에 대해 물었으나 얻은 것은 죽음에 대한 답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었다. 이렇게 감독의 질문들은 예상하지 않은 답을 얻기도 하고, 혹은 대답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감독은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를 위해 3개월여를 기다렸고,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매는 각자 감독과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삶의 답답한 부분들, 깊은 내면의 이야기들을 자매는 들려주었다고 한다. 겨우 인터뷰 승낙을 받은 것은 귀국을 3일 앞둔 날이었다. 하지만 제납이 비슷한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새벽에 울면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헨드는 카메라 앞에서 침묵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는 감독 스스로 비하인드가 더 많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들게 했다.

자매는 이집트 여성들의 삶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거의 강제적인 여성 할례, 그리고 처녀성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은 결혼 첫날밤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하는 풍습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는 풍습은 30년 전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을 때, 화면 바깥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가 인터뷰를 멈춘다. 촬영은 중단되었고, 얼마 후 인터뷰가 다시 시작된다. 똑같은 인물이 인터뷰를 하고, 방금 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처럼 이집트에서 처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있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웃음?) 감독은 같은 인물의 상반되는 인터뷰 장면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고 평했는데, 이 중단된 인터뷰 장면은 그런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렵게 승낙 받은 인터뷰가 감독의 기대치대로 진행되지 못했을지라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나레이션은 거의 없다. [만셰이아]는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지만,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캐묻거나 들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헨드나 제납이 들려주는 것들 외에는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를 알 수 없다. 상반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공공연한 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공모하는 자의 은밀한 웃음 혹은 비웃음이나 자조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이와 함께 할 때, 웃을 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연기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 헨드와 제납이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지금 카메라 앞에서 들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결혼 바깥의 삶이 죽음과 등치될 만큼 그들에게는 지금의 결혼 제도, 아버지의 법과 웃으며 공모하는 것이 살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감독은 언어의 벽에 부딪치다 헨드와 제납을 만나게 되었고, 만셰이아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 보다는 수도와 전기, 온수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더 친숙하다는 사실은 헨드, 제납 자매와 만셰이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닿게 했다. 그리고 친구로서의 윤주영 감독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영화가 침묵 앞에서 멈추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간극에 이르게 했다. 카메라는 멈췄지만 결코 쿨한 태도로 멈추지 못하고, 서성이는 듯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 침묵 앞에 선다. 윤 감독이 친구로서 헨드와 제납의 삶에 깊이 다가간 것처럼, 앞으로 감독의 카메라도 자신과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들려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