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노신의 글에서 나의 길을 묻다[청춘의 서재]
첫 번째 인연.
내가 처음 노신을 만난 것은 어린이 세계 문학 전집류에서였다. 세계 명작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실어 놓은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노신의 《아Q정전》은 12세 무렵의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위인 이야긴 줄 알고 빼들었다가 바보짓만 일삼는 인물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이내 내팽개쳤다. 고전을 알아보기에는 아직 어렸나 보다. 노신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 이후에도 ‘아Q’와는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강철의 노신’
틀어진 사이가 회복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리영희 교수의 중재로 노신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리영희 교수는 당시 내게 큰 감동을 주고 있었기에 그가 훌륭하다고 추천하는 노신의 책도 당연히 좋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펼쳐든 책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였다. 노신의 잡감문(雜感文)을 엮은 이 책에서 나는 노신을 ‘멍청이의 전기 작가’가 아닌 ‘강철의 작가’로 만나게 되었다. 반어적 독설을 무기로 사회 모순에 꿋꿋한 붓끝을 펼치는 노신의 글에 나는 매료되었다. ‘강철의 정의’를 우선했던 당시의 나에게 노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수세에 몰린 수구 세력들을 ‘물에 빠진 개’에 비유하면서 그런 개는 동정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물지 못하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했다(‘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강철의 노신’이 던진 이 말은 나에게 반민주세력을 뿌리 뽑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의 앞길을 잡아줄 나침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보다 깊은 노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노신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민중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소회도 밝히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희망’의 정체
‘강철의 정의’만으로는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굳건한 도덕’이 미래의 희망을 구현해준다고 주장할수록 사람들은 떠나갔다. 우리는 외로워졌고 절망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옳다고는 했지만, 함께 길을 걷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차츰 그들은 우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어느새 ‘용서와 화합’을 이야기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이 ‘물에 빠진 개’로 보였다. 민중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간다는 것이 과거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중’과 ‘사람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앞에는 ‘개’들만 한 무더기였다. 독재자들만이 ‘암흑’인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암흑’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핍박받던 어린 양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군에게 당하는 선량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남의 고통을 자신의 오락으로 삼으면서(‘폭군의 신민’)’ 타인을 잡아먹는 이들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꿈은 이제 ‘대한민국 1%’였고, 그들의 덕담은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였다. 그들은 독재자를 버리고 CEO를 섬기기 시작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희망은 나를 배반했다. 희망은 절망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몸서리쳤다. 세상이 미웠고, 나는 온종일 화가 나 있었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앞길은 ‘암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희망’의 허망함
사람과 삶이 온통 ‘암흑’이었던 것은 노신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적막이었다. 그 적막감은 하루하루 자라났고, 독사처럼 내 영혼을 감아왔다.”(《외침》중 머리말)
이 ‘적막감’이 당시 내 분노의 정체였다. 그때 문득 펼쳐 본 책이 노신의 ?고향?이었다. 거기서 노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하는 소위 희망이란 것도 또한 내 손으로 친히 만든 우상이 아닌가. …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대지에 난 길과 같은 것이다. 애당초 땅 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섣부른 희망을 지표로 하여 우상으로 삼은 것이 잘못이었다. 애당초 삶은 불인(不仁)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광막한 대지와 같아서 ‘불인’과 ‘선량’이라는 협소한 말로는 도저히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로는 정의롭지만 때로는 추악하다. 그래서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다.
광막한 대지에 ‘희망’이라는 길은 아무데도 없다. 가고 오는 가운데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수많은 길이 갈라져 나가니, 어느 길이 ‘희망’이고 어느 길이 ‘절망’이 될지는 걸어봐야 안다. 길은 길일 뿐 더 이상 ‘희망’도 ‘지표’도 될 수 없다. 오히려 걸어가면서 ‘희망’으로 삼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걷는 ‘현재’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뿐, 신기루 같은 미래의 ‘희망’이 내 걷는 행위의 지주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곧게 뻗은 저 외길을 ‘희망’이라 부르며 걸어오다가, 길 없는 대지와 수많은 갈림길에 절망하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다. 오직 ‘강철의 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오직 ‘희망’일 뿐이라거나, ‘절망’의 얼굴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암흑’의 복잡성
사람들은 단지 두려웠을 뿐이다.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부자’의 주문도 외우고, ‘1%’의 주문도 외우면서 ‘CEO’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것을 나는 ‘절망’이라 하고 ‘배반’이라 몰아세우며 그들의 참모습으로 고정시켰다.
나는 어떠한가? 나도 그들 사이에 ‘살아가고 있었고 살고 있다’. ‘강철의 정의’를 주장했던 나도 그 바닥에서는 ‘성공’하고 싶어 했고, ‘그곳의 1%’가 되고 싶어 했으며, 상징자본을 탐내고 있었다. 사회 비판을 통해 ‘명망의 재력’을 갖추는 것. 이러한 ‘암흑’의 욕구가 나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러한 ‘암흑’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 또한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암흑’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었다. 돌아보니 ‘신념의 곧은 외길’은 굽이굽이 갈라진 길들이었고, 앞도 마찬가지였다. 내 갈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나는 맥이 다 빠져 주저앉았다.
노신은 이렇게 속삭였다. “묵적 선생은 갈림길 앞에서 슬피 울며 돌아섰다고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갈림길 초입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숨 자고 나서 걸어갈 만한 길을 골라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지금은 한숨 자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참호를 파고 들어가 담배도 피우고,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와 미술전도 하면서’(《루쉰의 편지》) 내 안팎에 자리 잡은 ‘암흑’을 곰곰이 숙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전진하다가 또 한 숨 자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두렵기는 하다. 저 아득한 어둠이, 내 안의 이 무한한 암흑이 나를 삼켜버릴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 어둠을 응시하고, ‘암흑’을 ‘애독해 가면서’ 굳건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게 노신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노파심에서의 사족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는 이를 구인(救人)이라고 한다. 노신은 내게 구인이다. 그러나 그가 책 속에만 있었다면 구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삶과 나의 삶이 공명하는 연이 닿았기에 그가 구인일 수 있었다. 모든 이에게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궁하면 통하는지, 자기 삶에 위기가 왔을 때 간혹 영감을 주는 글이나 사람들이 인연을 맺는 경우들이 있다.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질문하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참된 만남을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 노신의 글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반어와 냉소적인 문체,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과문함이 그와의 만남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에서 그의 심정을 짐작해 보는 과정을 조금씩 진행하다 보면, 그의 삶이 나와 공명하면서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였는데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글들도 있다. 허나 인연이 닿으면 글이 절실해진다. 아직 닿지 않았을 뿐이니, 조금 더 기다려주기를. 곁을 주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만나기 마련이다.
단순히 ‘사회적 교제를 위한 교양’을 위해서라거나, 진보적 감흥을 잠시 보조해 주는 ‘진보에세이’로서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좋은 벗이 소모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충북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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