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윤지영 [9월 월례발표회]
?[2012년 9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
발표자:?윤지영(서울시립대) 회원
놀리면 상처받는다
후기: 한길석( 한철연 교육부장)
지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에서는 윤지영 (서울 시립대) 선생의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라는 논문을 가지고 월례발표회를 진행했다. 참석자는 7명이었는데 행사 관계자와 비관계자의 비율은 대략 50대 50이었다. 남녀 성비로 따지면 2대 5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따라서 머릿수를 기준으로 볼 때 논전은 이미 남성팀의 필패. 갑자기 가족오락관의 공정한 성비가 부러워지는 상황이다.
윤지영 선생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지 얼마 안 된 분으로 고국에서 자신의 박사논문에 담은 생각을 학문 동지들과 나눌 수 없는 답답증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자리가 한철연 월례 발표회인데, 월례 발표회는 원래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 지 오래라 더 답답해지지나 않았으려나? 이번 자리는 참석율을 높이려고 발표문을 미리 공개했으나 회원들은 여전히 공사다망한 관계로다가 대표 선수들만 입장하게 됐다. 순전히 주관적인 분석이지만 아무래도 제목이 너무 ‘쎄서’ 남성들의 기운이 승한 한철연에서는 초큼 거북살스러웠으려나? 무섭기두 하구. 평자 또한 제목에서부터 야코 죽고 들어갔다.
이 발표문은 기존 철학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읽어내고 해석하는 ‘독후감’류의 논문 형식에서 벗어나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언어로 서양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한국 학계의 경직된 도제식 학문 태도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발표문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윤지영 선생의 글은 서구 전통 철학의 사유 방식에 대한 비판과 개조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춤추는 사유”를 제안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의 주류 전통 철학은 동일성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것을 이분법적 위계 관계로 분류함으로써 전개되었다. 이 글은 주류 철학의 이분법적 위계 관계가 “새로운 개념화” 전략에 의해 비판적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발표자는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blanchitude ?pist?mique), 발기성 로고스(logos erectile), 전 방위적 시점의 무와 빈칸으로서의 팔루스 ( phallus comme vide en surplomb), 전율하는 공허와 무로서의 언어 양식(langage comme vide vibrant), 사건성으로서의 의미화 작업(sens-?v?nement), 유희하는 몸(corps-joueur),얼굴 형상의 탈구(d?visag?isation),주체의 유동화 (fluctuation subjectivante), 이멘Hymen 경제학의 해체 (d?shym?nisation), 하이브리드성(hybridit?)이란 개념 창출 작업” 등으로 나열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용어들은 거의 윤지영 선생 본인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발표자는 서구 철학적 인식 주체가 자랑하는 특유의 객관성 및 보편성이 사실은 “몸으로 상징되는 정념, 충동, 리비도, 정동 에너지들을 지우고 은폐하는 행위”로서의 백색화 작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백색의 이면에는 다양한 색깔의 질적 속성들이 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면적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서구 중심적 인식틀을 깨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발표자는 전망한다.
또한 발표자는 전통 철학에서 강조하는 로고스가 유동적 사유를 제한한다고 비판한다. 유연성이 결여된 사유는 자신의 관점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로고스의 폭력성을 “발기성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발표자는 발기성 로고스의 기운이 여성적인 것과의 비판적 대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여성적인 것은 “여성의 본질성과 실체성을 상정하는 토대주의적 관점에서 발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기성 로고스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일 듯하다.
서구 철학은 자기의 질적 특색을 지우는 백색화 작업을 통해 시점의 내용성을 비움으로써 모든 시점을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내용 없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시점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 시점의 무(vide en surplomb)”의 시점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포섭, 축소, 환원하고자” 한다. 발표자는 이 폭력성으로부터의 구제가 “전율하는 무로서의 언어”를 창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남근 중심적 언어가 질서를 부여하고 판별, 분류하는 판관으로서의 언어였다면, 새로운 언어 형식은 의미의 실험성을 재시도하는 놀이의 장이다.” 구제는 끊임없이 전개되는 비판적 언어 놀이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경험되는 순간이다.
논평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은 동일성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위계적 사유의 폭력이 서구 철학의 전통을 지배하고 있음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서구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나열했다는 데에 있다. 차라리 발표자가 제시한 여러 가지 구제적 개념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해서 논의를 전개했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예를 들어 인식론적 백색화의 맨얼굴을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폭로한다든가, 남근적 사유가 생활세계의 근저에 어떻게 정착되고 내밀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등의 논의 말이다. 물론 이 글이 완성된 단편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장편 저술을 위해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면 평자의 이러한 염려는 괜한 잔소리일 뿐이겠다.
또 하나 해묵은 의문을 들어보겠다. ‘인식이 과연 실천을 담보해주는가’라는 것이다. 분명히 아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지만, 문득 큰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실천적 개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전통적 사유에 대항해 비판적 인식의 유희를 펼치는 것은 사유의 타성을 교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과 해체의 유희는 유희로 끝나버릴 수 있다. 해체놀이의 현장에서는 법열에 전율할 수는 있지만, 놀이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이 깨달음의 기쁨을 지속시키기란 쉽지 않다. 해체적 사유의 유희라는 인식론적 전략은 개인에게는 상당한 혁명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개인적 앎의 혁명을 이웃과 함께하고 사회로 외화시키는 것은 유희적 사유로서의 인식 전략만으로는 힘에 부쳐 보인다. “주류적 인식 틀이 가진 한계를 날카로이 드러내며 이에 저항하는 정치적 인식론”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인식의 정치’를 전개하는 우리는 언제나 ‘인식의 정치’ 너머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이 글이 박사논문을 축약한 것이어서 발표문 자체에는 정밀한 논의 보다는 문제 의식과 기본 입장을 전개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적 상황에서의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가 진행된다면 좋겠다는 제안에 대해 발표자는 긍정적으로 반응해줬다. 말놀이적 해체작업은 인식론적 작업에 기운 것은 아닌가라는 논평자의 비판에 대해 발표자는 말놀이적 해체작업 자체가 이미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에 인식론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논평자는 여전히 이런 입장의 실효성을 미심쩍어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합리적 담론 형식이 지니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말놀이적 해체작업으로 대항하는 것은 토론합리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체 놀이가 기대하는 정치적 효과는 말놀이적 해체 작업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산출될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뭥미’라든가 ‘잘났네,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어리둥절 반 비아냥 반의 반응을 야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앞보다는 뒤의 반응이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 말놀이의 골계가 내적 성찰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비웃음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말놀이라는 해체적 작업이 인식적 차원에서의 남근은 해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지적 차원의 남근은 비합리적이게도 더욱 곤두서게 만들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비관주의가 아니냐고? 하지만 남근중심주의는 단지 생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비관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남근성은 인간의 정신 속에 오래도록 자리하여 사회 제도, 개인의 습벽으로 굳어졌다. 나쁜 습관은 안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 새로운 인식과 그에 걸맞는 대안적 행위의 지속적 실천이 뒤따라야 고쳐질까 말까하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회와 개인의 무의식 속에 속속들이 깃든 저 남근성의 업장이 의식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말놀이로 과연 씻어질까? 정리하자면, 말놀이적 해체 작업이 신선하기는 해도 그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논평자의 바램이다. 오늘의 교훈, 놀리면 상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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