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6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507b-509b]
*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이면서 우선
‘보이기는 하지만 사유되는 것은 아닌’ 가시적(可視的)인 영역과 ‘사유νοεῖσθαι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 가시적인 세계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πολλὰ καλά과 ‘많은 좋은 것들’πολλὰ ἀγαθὰ이 있으며 그렇게 ‘각각의 것들’ἕκαστα은 ‘많은 것들’πολλὰ로 있다.
2) 지성적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αὐτὸ καλὸν와 ‘좋은 것 자체’αὐτὸ ἀγαθόν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형상(이데아)ἰδέα 하나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τιθέντες, 그 하나의 ‘형상’에 따라 각각을 ‘그것으로 있는 것’ὃ ἔστιν이라고 부른다.(507b)
* 그런 연후 우선 가시적인 세계에서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을 시각ὄψις과 비교하면서 ‘보는ὁρᾶν 힘δύναμις‘’과 ‘보이는ὁρᾶσθαι 것의 힘’이 다른 감각과 달리 뭔가 제3의 종류의 더 필요하다는 논의를 아래와 같이 전개한 후 그 제3의 종류의 것으로 빛φάος과 그 빛의 주체로서 태양ἥλιος을 끌어들인다.
1) 감각들을 만든 자δημιουργός는 다른 감각 능력에 비해 ‘보는 힘‘과 ‘보이는 힘‘을 만드는 데 비싼 값을 치렀다.(507c) 이를테면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은 듣고 지각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 없지만 ‘시각ὄψις의 힘’과 ‘보이는 것의 힘’은 뭔가를 더 필요로 한다.(507d)
2) 그 뭔가 제3의 종류의 것γένος τρίτον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ὄμμα 속에 있는 시각ὄψις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ἐν αὐτοῖς 색χρῶμα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507d) 빛은 ‘보는 감각’ἡ τοῦ ὁρᾶν αἴσθησις과 ‘보이는 힘’ ἡ τοῦ ὁρᾶσθαι δύναμις을 묶어놓은 멍에ζυγός로 다른 것들을 묶는 멍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507e-508a)
3) 하늘의 신들θεῶν 중에서 빛을 주관하여 시각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해 주고 보이는 것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태양ἥλιος이다.(508a)
4) 태양과 눈의 관계 : 시각은 태양이 아니고, 시각이 들어 있는 눈ὄμμα도 태양이 아니지만, 감각과 관련된 기관 중에서 눈은 가장 태양과 비슷하다.
5) 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치 태양에서 흘러넘친ἐπίρρυτος 것처럼 태양으로부터 분배 받아ταμιευομένην 가지는 것이다.
6) 그런데 태양은 시각의 원인αἴτια이면서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 요컨대 태양이 좋음τἀγαθὸν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좋음이 낳은 태양은 좋음 자신과 유비ἀνάλογος를 이룬다.(508b) 그러므로 ‘가지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νοητῷ τόπῳ 좋음이 지성νόος 및 사유되는 것들τὰ νοούμενα과 맺는 관계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ὁρατῷ τόπῳ 태양이 시각 및 보이는 것들τὰ ὁρώμενα과 맺는 관계와 같다(508c).
*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더 해서 위 두 영역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508c-e)
* 결국 ‘대낮의 빛’은 ‘진리와 실재’ἀλήθειά τε καὶ τὸ ὄν와 대응되면서 사물을 비추는 대낮의 빛의 주체로 ‘태양’이 제시되고, 그에 상응하여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주체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태양의 비유가 완성된다.
*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태양의 비유를 들어 가시적인 영역에서 대낮의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게 해 주듯이 좋음의 이데아(좋음의 형상, 선(善)의 이데아) 역시 ‘아는 자’(영혼)에게τῷ γιγνώσκοντι ‘아는 힘’(지성)을 부여하고ἀποδιδὸν ‘알려지는 것들’에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진리’ἀλήθεια를 제공한다.παρέχον (508e)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인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기도 하다.(508e)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빛과 시각이 ‘태양과 비슷한 것’ἡλιοειδῆ이나 태양이 아니듯이 앎과 진리 모두 ‘좋음과 비슷한 것’ἀγαθοειδῆ이지만 좋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좋음은 앎과 진리보다 한층 더 크게 ‘존중받아야 마땅한’τιμητέος 것이라 말한다.(508e-509a)
* 글라우콘은 이 말을 듣고 ‘앎과 진리를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아름다움에서 이들을 ’넘어선다‘ὑπὲρ ἐστίν니 정말 ’엄청난 아름다움‘ἀμήχανος κάλλος을 말씀하고 있다고 놀라워하며 그것이 즐거움ἡδονὴ은 아닐 거라 여기는지를 되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는(그것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505b-c에서 이미 논박되었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닮은 점(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εἰκών 유사점)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서 고찰한다.(509a)
* 즉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태양은 그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γένεσις과 성장αὔξησις과 양육τροφή도 제공하듯이, 알려지는 것들의 경우도 그것들이 ‘알려짐’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것’τὸ εἶναί, 즉 그것들의 ‘있음’οὐσία 모두 ‘좋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 받는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좋음은 ‘지위πρεσβεία와 능력δύναμις’에서 ‘있음(본질)’οὐσία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ὑπερέχοντος 것임도 확인한다.(509b)
* 그러자 글라우콘은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익살스레 ‘신령스러운 넘어섬’(신적인 우월성)δαιμονίας ὑπερβολῆς이라 대꾸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된 탓을 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강요한 대화 상대자들에게 돌린다. 그래도 글라우콘은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게속 해 주기를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현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상정했던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 지성에 의해 알려지는 가지적인 것의 영역을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킨 후 이제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5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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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d ‘빛이 없으면 눈 속에 있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en autois 색chrōma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 이 문장에서 문법상 ‘거기에’가 가리키는 것은 눈이다. 색이 사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각론에 따르면 시각과 대상 각각에 동류의 것(syngenes)이 있고 그 동류의 것이 서로 닮아 있어 교합이 이루어질 때 시각이 성립한다. 오늘날처럼 색이 눈의 망막에 비칠 때 시각이 발생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눈에도 색이 있어 그 색이 사물을 향해 나가고 동시에 사물에 있는 같은 색이 그 시선 상에서 만날 때 특정 색에 대한 지각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가시계와 가지계와 관련한 플라톤의 인식론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동류의 것과 동류의 것’, ‘닮은 것(ho homoios)과 닮은 것’끼리의 교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서 490b에서도 플라톤은 가시계의 시각이 그러하듯이 가지계에서도 “‘영혼의 이성 부분’이 대상 쪽에 ‘참으로 있는 것’(to on ontos, 이데아)에 ‘접근’하여plēsiasas 그것과 ‘교합’하여migeis ‘지성’nous과 ‘진리’alētheia를 ‘낳고’ ‘앎’epstēmē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선 플라톤에게 인식 내지 존재 세계는 크게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인 세계로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청각이나 미각 같은 경우 소리와 맛이 각각 귀와 혀에 주어지면 바로 청각과 미각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유독 시각의 경우에는 아무리 색깔이 눈앞에 주어져도 빛이 없으면 시각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각은 빛이라는 제3의 것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은 이처럼 시각 세계에서 빛이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듯이 가지적인 세계에서도 그 빛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지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무언가 제3의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가시 세계에서 빛 내지 태양이 하는 역할로부터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추론해 낸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서로 유비 관계(analogon)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소산 내지 이자 같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508b-c)
* 그러므로 가시계와 가지계에서 각기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상호 대응하여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
1) 우선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가시적 세계에는 ‘태양’과 시각 능력으로서 ‘눈’ 그리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많은 것들’이 있다면 가지적 세계에는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와 지성적 인식 능력으로서 ‘영혼’과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각기 하나인 ‘형상(이데아)들’이 있다.
2) 가시적 세계에서 태양은 인식 주관과 대상 쪽 모두에 각각 빛을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즉 눈에는 맑은 시각 능력 ‘보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사물에는 사물의 빛깔을 비추어 그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태양의 빛은 그 양쪽의 힘들을 마치 멍에처럼 서로 연결하여 눈에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즉 눈은 태양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빛을 받아 함께 그 빛으로 사물에서 생긴 보이는 힘과 연결하여 맑은 시각을 성립시킨다.
3)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주관인 영혼과 그 지성적 인식 대상인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마치 태양이 빛을 부여하듯 ‘진리와 실재’를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영혼은 그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지성적 인식 대상을 대뜸 알아차리는 인식(앎) 능력 즉 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이데아들 역시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각기 이데아로 드러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즉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부여받은 영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지성적인 대상들에 자연스레 고착함(머무름apereisētai)으로써 지성의 힘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epistēmē)을 즉각적으로 성립시킨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란 영혼과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진리와 실재라는 빛을 비추어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508e) 다시 말해 좋음의 이데아는 영혼에는 앎을 이데아들에는 진리성을 부여하여 가지적인 세계에서의 지성적 인식 가능성을 완결시키는 근거 즉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눈이 부셔 오랫동안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듯이(508b) 좋음의 이데아도 쉽지는 않지만, 불가지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508e)
4) 그러나 가시적인 영역에서건 가지적인 영역에서건 낮은 단계의 인식 또한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인 세계의 경우 대낮의 태양 빛이 아닌 밤의 어두운 빛이 펴져 있을 때는 눈 속에 맑은 시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침침해서 거의 눈먼 것과 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의 경우도 영혼이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 소멸하는 것에 고착할 때는 영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의견doxa만을 갖게 된다.(508d) 이와 같은 양쪽 세계에서 각기 열등한 인식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면서 각 비유들의 인식 단계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 대응되는지도 논란 거리가 된다.
5) 그런데 이제 더욱 주목할 것은 이후(508e)의 논의에 접어들면서 좋음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근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고 이 인식과 진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식과 진리와도 다르며 그것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이다.(508e) 그것은 마치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과 시각이 태양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태양 자체는 아니듯이 가지적인 영역에서도 인식과 진리가 좋음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좋음 자체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아닌 것과 같다. 좋음의 상태는 그보다 한 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509a)
*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있음’(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그저 단순한 ‘있음’ 정도가 아니라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ousia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이라는 것이다.(509b) 글라우콘이 놀라 익살을 떨며 말하듯 그것은 ‘신적인 우월성’, ‘신령스러운 넘어섬’daimonias hyperbolē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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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수행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앞서도 누누이 밝혔듯이 그 설명 자체가 비유에 기반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의 핵심 부분마저 자신의 말임에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것인 양 설정할 정도로(509b) 자신조차 처음부터 확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이자(利子) 내지 소생(506e-507a) 정도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해석은 비유가 갖는 애매성 만큼이나 학자마다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 어느 것도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플라톤의 대작 중 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의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 철학적 중요성과 체계 내 위상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난망하기는 할지라도 플라톤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에 대한 해명이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탐문이 오늘날까지도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지금부터 필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해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함에 첫 번째 부딪치는 난관은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임에도 다른 대화편에서는 좋음 자체라는 일반적인 형상 차원의 것으로만 다루어질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단초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에서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자 왕’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그곳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나라와 시민들에게 재앙이 그칠 날이 없다’(501e)는 종국의 관점에서 철학자 왕의 등장을 그 자신의 정치철학의 최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좋음의 이데아는 바로 그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인 앎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근본적으로 정치철학의 최상의 원리로서 일단 정치적 앎 내지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은 놀랍게도 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이데아들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차별의 정도에서 그 이데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월적 우월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말 그대로 이데아 가운데 하나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데아들의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로서 지위와 능력에서 다른 이데아들을 훨씬 넘어서는 가히 이데아 중 이데아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좋음의 이데아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좋음의 이데아 또한 자체적 존재로서 다른 이데아들과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초월적 우월성의 내용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질상 다른 이데아들과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서 우리는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좋음의 이데아가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재앙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주어지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회, 우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앎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앎은 존재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철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역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 간의 유기적인 내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수행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이자 정치가는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통해 우주 자연 및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제반 요인들을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정치 지도자 내지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다.
* 사실 ‘좋음’to agathon은 실천철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善)’의 의미와 적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면서 각자의 욕망을 최선으로 추구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화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절제의 덕을 통해 온전하게 확인한다. 사실 ousia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존재나 실체 또는 재산의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구성체에서 개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 또는 ‘됨됨이’로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 이데아들에게 부여하는 이른바 본질(ousia)이란 앎과 덕 등 제반 가치 존재들을 포함하여 ‘알려지는 것들’로서 이데아들이 각기 본질로 지니는 고유한 내적 됨됨이, 제 고유한 값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럿polla’으로 구성된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그 ousia란 다양한 계층들과 개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연관 하에서 각자 갖고 있어야 할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등 제반 덕목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에게 그런 ousia를 제공하고 개별 이데아는 그 총체적 연관에 대한 앎을 토대로 고유의 ousia를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개별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지위와 힘에서 그것보다 한결 넘어서는 초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고유한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고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통치자로 하여금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에게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최상의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궁극의 앎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최선의 유익함을 담보해주는 총체적 앎과 실천의 궁극적 지표로서 특별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그러한 우월성을 플라톤 말기의 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론을 우주의 생성과 기원 차원에서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티마이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여럿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을 위해 ‘좋음’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오직 그것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선한 우주를 제작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제작 목표와 그 원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철학자 왕의 국가 건설 목표와 그 원리로 그대로 이어진다. 즉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은 ‘좋음’은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이상 국가를 세우면서 철학적 앎의 본으로 삼고 있는 좋음의 이데아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것은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 제작과정에서 우주적 조화와 공존을 구현한 그대로 철학자 왕의 정치철학적 목표 또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며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에 있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다. 곧 좋음의 이데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데아들의 위상을 정해주고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또 다른 이데아인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좋음의 이데아 또한 이데아인 한, 타자와 관계 맺음이 불가한 자체적인 존재인데 그러한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이데아들의 조화와 공존에 관계할 수 있는가? 그 관계 맺음의 성질 자체가 자체적 존재로서 이데아의 근본 성격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사실은 이데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한 논의는 이데아들의 상호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있는 <소피스트>,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유적 정의(定義)를 얻기 위한 분할법과 직조술을 다루는 <정치가>의 논점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형상들의 나눔(454a)과 상호간의 결합(476a)은 <국가>에서도 일단 언급은 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는 <국가> 이후 후기 작품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여럿의 조화를 규정하고 관장하는 성질이 이데아로서 자체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까닭도 따로 없다. 왜냐하면 관계 맺음이나 조화라는 성질 자체는 마치 수적 비례가 내포하는 객관적 성질처럼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 채 자체적 존재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이데아도 3개의 직선들이 직선의 이데아로서 각기 자체성을 보전한 채 결합된 하나의 이데아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변화나 관계 맺음 내지 타자성은 그 이데아가 물질적 무규정성과 섞이거나 분여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내포 상 다른 이데아들에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고 그 이데아들의 총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나 이데아 세계에서는 다만 홀로 무(無)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자체적 존재로 있을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성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데아적 자체성을 갖는 이데아로 각기 그 자체로 있다가 다만 그 이데아들이 각기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물질적 타자성을 매개로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그 위계 관계는 현실화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각기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와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신체로 결합되면서 같은 신체 부위의 하나인 두뇌의 지배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총체적인 유기적 안정성과 조화를 보전하는 이치와 같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지휘자와 개별 연주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휘자의 이데아와 개별 연주자들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는 각기 하나의 이데아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즉 동등하게 서로 자체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그대로 있다가 오케스트라라는 관계 맺음의 장에 들어서면 비로소 타자성을 통해 역할과 위계성을 드러내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함께 생산하게 되는 격이다.
* 이렇듯 이데아들은 이데아 세계에서 서로 관계 맺음 없이 각기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 이데아들은 서로 다른 고유 성질을 각기 내포하면서 데미우르고스의 제작행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우주 자연의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그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하나이되 다른 이데아들과의 총체적 연관성과 규정성을 자체성으로 갖고 있는 또 다른 성질의 이데아인 것이다.
*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좁혀 보면 사회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의 내적 관계를 그 고유 욕망에 따라 조화롭게 공존케 하되 그것을 통해 나라 전체의 좋음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이데아인 것이다. 여럿의 세계가 상호 의존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한,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고려는 코스모스로서 우주 자연을 비롯해 인간 사회 나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 해결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련된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그것들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나라와 시민들의 유익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이면서 다른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우월성을 갖는 근본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앎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는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개별 이데아들의 고유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상호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고의 철학적 앎인 것이다. 철학자 왕에게 요구되는 변증술의 궁극 목표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과 그것에 대한 전면적인 답변을 간취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망의 극치에 형이상학적 탐문이 자리하고 있다면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사에서 그 형이상학적 탐문의 총체성과 영원성을 기초 지우는 지고의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상학이 말 그대로 지적 욕망의 극치에서 성립하고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또한 그 욕망의 소산인 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합리주의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의심과 탐문 하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비주의 내지 비합리주의까지 포괄하는, 말 그대로 ‘신령스러울 정도의 넘어섬’으로서 거대 담론과 세계관 철학의 시원적 토대라 할 것이다.
* 끝으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는 플라톤의 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태양이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는 생물학적 표현과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와 본질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표현이 내용적으로 상호 등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490b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표현들을 상기하면 왜 그것들이 서로 상호 등치가 되는지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의 빛이 그리하듯 영혼과 이데아 양쪽에 진리성과 실재성을 제공하여 영혼에게는 지성nous을 이데아들에게는 본질ousia을 갖추게 하고 그들을 서로 동류의 것들로 만나게 하여 앎(인식)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490b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은 이와 동일한 내용을 이곳 태양의 비유에서 그런 것처럼 생물학적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영혼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데아)이 서로 ‘동류의 것’임을 ‘사랑’으로 포착하여 서로 ‘접근’하고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고’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되게 ‘살며’ 그것을 ‘양육’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영혼과 이데아에 미치는 이러한 과정은 플라톤 스스로 태양이 시각과 사물에 미치는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그대로 지성과 진리와 앎을 생성과 성장, 양육시키는 것과 자연스럽게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인 한 자체성을 가진 부동자임에도 어떻게 태양의 빛처럼 무언가를 제공하는 작용력을 갖는 운동자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의 빛과 같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 대상에 비춘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 빛의 작용력이 그러하듯 좋음의 이데아 또한 분명 뭔가 이데아들에 작용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가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을 ‘한층 넘어서’hyperchontos 이처럼 빛과도 같은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말은 마치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차별을 넘어 능동자로서 신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과 난점들은 철학사를 통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에 급기야 신비주의 내지 신학적 성격까지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사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능동자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유출하는 일자와 연계지어 논의되었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의 선성을 해명하는 근거로까지 인용되었다.
*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능동적 작용력과 관련한 의문 역시 그것이 갖고 있는 내적 관계성과 총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해명될 수 있다. 앞서 누차 살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다른 개별 이데아들과 달리 그 개별 이데아들로 구성되는 우주 자연의 총체적인 진상 및 그 내적 연관과 관련한 지고의 앎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로 하여금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이데아들 전체와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고유한 위상을 갖고 그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지 즉 개별 이데아로서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앎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개별 이데아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존재하되 선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연관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같은 이데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총체성과 개별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데아들과 다르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 양육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 주관과 대상 모두에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여 능동적인 지성을 통해 앎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 점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을 본으로 삼아 지성을 통해 영원하고 선한 우주를 제작한 것처럼, 나라에서 철학 통치자들도 그러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앎을 토대로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시민들에게 본성에 맞는 고유 위상을 부여하고 모두의 유익함을 관철한다. 데미우르고스가 신으로 불리듯 철학자 왕 또한 말 그대로 지위와 능력에서 위계상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지성의 결합의 극치를 규정하고 그 실현을 담보하는 신령스러운daimonias 원리인 것이다.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존재 세계를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들로 크게 구분한 후 가시적인 영역에서 태양의 역할에 주목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지적인 영역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역할을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좋음의 이데아는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존재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위상을 갖는 존재로서 확립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 좋음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앎의 체계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어떤 인식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선분의 비유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가시계와 가지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지성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 선분의 비유(509c-51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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