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23- 생성과 태극[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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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23- 생성과 태극

1)

헤겔 사유의 가장 근본적 특징은 바로 반성적 사유이다. 이 반성적 사유는 어떤 것을 그것과 대립하는 것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반성적 사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곧 어떤 규정성은 부정성이라는 주장이다.

대립적 관계란 곧 차이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곧 어떤 것을 변별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구조주의적 사유와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구조주의 사유나 헤겔이나 다 칸트에서 흘러나오니 헤겔과 구조주의 사이에 이런 공통성을 발견한다고 해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대립적 관계 즉 차이를 중심으로 하는 반성적 사유에서 보면, 존재자와 존재는 아주 간단하게 구분된다. 지금까지 거듭 말해 왔지만, 존재자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그런 존재자들이 맺는 관계다.

존재자의 관계는 구체적 관계에서 추상적 관계로 전개된다. 그 관계 가운데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외면적인 관계가 그러니까 가장 추상적인 관계가 곧 시공간적 관계이다. 헤겔이 말한 순수 존재란 이런 추상적인 시공간성을 말한다.

존재자가 위치하는 시공간 즉 그 관계를 헤겔은 ‘Da’로 표현했다. 존재자 즉 현존[Dasein]은 그런 Da에 위치해서 어떤 규정을 갖는 것이다. 바로 이 ‘Da’ 곧 존재자의 관계가 존재이다.

‘Da’라는 표현을 하이데거와 헤겔이 상반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 흥미로울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존재[Sein]가 어떤 시공간[Da]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반면 헤겔에서는 존재자가 들어서 있는 시공간 ‘Da’가 곧 존재다.

2)

여기서 시공간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시공간은 공허한 것으로 구체적인 존재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구체적 존재자는 마치 공허 속에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헤겔에서 시공간은 한편으로 공허한 무규정자 즉 apeiron이다. 여기서 공허한 무규정자라는 것은 결코 텅 비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들이 관계하지 못하고 서로 분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공간은 자기 관계하면서 연속적이고 충만된 것 즉 일자가 된다. 자기 관계한다는 것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다.

존재자의 관계로서 시공간은 관계하면서도 관계하지 않는 이중성을 지닌다. 관계하는 일자적 측면과 관계하지 않는 무규정적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단적으로 결합해 있다. 시공간에서 양자는 마치 동전의 이면과 같이 결합한다.

공허한 시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듯이 충만한 시공간도 따로 있을 수 없다. 시공간은 공허하면서도 충만한 것이기에 헤겔은 존재와 무는 통일되어 있다고 말한다.

3)

헤겔의 존재란 곧 시공간을 말한다. 시공간이 두 측면 즉 충만성과 공허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을 표상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 표상을 통해 보면 존재와 무의 통일이라는 헤겔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존재와 무의 대립적 통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헤겔은 생성하는 운동의 개념으로 나간다. 헤겔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말한 다음, 생성이라는 개념으로 나간다. 이 생성은 운동하는 것이다. 즉 존재에서 무로 또는 무에서 존재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한 것이다.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존재도 무도 아니며 오히려 존재가 무로 또는 무가 존재로 단지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이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진리는 이 양자의 무구별성이 아니라 이들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구별되지 않고 구별할 수 없고 각자가 자기의 반대물 속에서 직접적으로 소멸되는 데 있다.”(논리학, GW21, 69-70)

헤겔은 이 구절에서 ‘이행’이라는 말만 언급하지 않고 이미 ‘이행된 것’이라는 말도 언급하는데, 전자가 곧 생성의 운동이다. 후자는 생성 이후 출현하는 ‘현존재’를 의미한다. 생성이 다시 현존재로 이행하는 측면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는 우선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으로서 생성 운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 운동을 존재자가 비존재자가 되거나 비존재자가 존재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앞에 누가 있다가 사라지거나 누군가가 내 앞으로 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은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상호 이행이다. 그러나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은 이런 개별적 존재자의 이행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는 일정한 시공간 즉 존재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자의 운동이다.

4)

존재는 일자이며 무는 무규정성 즉 아페이론이다. 전자는 통일적 관계이며 후자는 그 관계의 해체 즉 분열이다.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은 존재자들 사이의 통일과 분열의 양 측면을 말한다. 존재자들은 통일 속에서 분열하며 분열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이 통일로 나가는 측면이 발생이며 분산으로 나가는 측면이 소멸이다. 양자의 통일이 생성이다.

“생성은 이런 방식으로 이중적인 규정을 지닌다. 생성의 한 규정에서 무가 직접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즉 생성 규정은 무로부터 시작하여 이 무가 존재와 관계하므로 존재로 이행한다. 다른 생성 규정에서는 존재가 직접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즉 이 생성 규정은 존재로부터 시작하며 이 존재가 무로 이행한다. 이것이 곧 발생과 소멸이다.”(논리학, GW93, 93)

존재와 무는 개별 존재자의 관계이다. 이 존재와 무가 다시 상호 이행하면서 발생과 소멸 즉 생성이 나오니, 개별 존재자와 존재와 무, 그리고 발생과 소멸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존재자가 일차원에 속한다면 존재와 무는 이차원에 속하고, 발생과 소멸은 다시 삼차원에 속한다.

5)

지금까지 존재와 무를 시공간의 두 측면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여기서 다시 생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니 약간 혼란스럽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존재 즉 시공간이라는 표상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가장 외면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시공간이니 그것에 가장 가까운 표상은 유클리트 기하학적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런 유클리트적 시공간은 마치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시공간은 거기에 담겨 있는 것과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 자신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시공간이 존재자가 맺는 관계라는 헤겔의 생각과는 멀어진다.

시공간을 존재자의 관계로 본다면, 이 관계란 곧 움직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존재자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통일되고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맺는 존재자들은 분열하면서 그 관계는 해체된다.

관계가 존재이고 분열이 무라면, 관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곧 무에서 존재로 그리고 존재에서 무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즉 관계는 다름 아닌 발생하고 소멸하는 운동이다.

이제 관계는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가운데 성립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관계가 곧 시공간이라면 시공간은 이렇게 발생하고 소멸하는 가운데 있으니, 시공간 자체가 무언가 꿈틀거린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처럼 무언가 꿈틀거리는 시공간을 표상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있을 때 그 배가 일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이 배와 함께 흔들리는 것을 생각해 보라. 헤겔의 존재 즉 시공간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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