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
1)
앞에서 우리는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하여, 이를 자연의 일반 원리로 이해하려는 엥겔스의 시도가 부딪힌 한계를 소개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더 긴요한 문제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전개 구조에는 칸트가 제시한 12개의 판단형식, 범주가 깔려 있으니, 어떻게 보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평행한다고 하겠다. 이런 평행 관계를 도표화 하자면 다음과 같다.
논리학 |
정신현상학 |
||
질적 |
긍정판단 |
현존 |
감각 |
부정판단 |
유한성 |
지각 |
|
무한판단 |
무한성 |
지성 |
|
양적 |
단칭판단 |
순수양 |
자기의식 |
특칭판단 |
양적 무한성 |
자기의식의 자유 |
|
전칭판단 |
척도 |
불행한 의식 |
|
관계 |
정언판단 |
본질 |
관찰하는 이성 |
가언판단 |
현상 |
자기 자신에 의한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 |
|
선언판단 |
현실 |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 |
|
양상 |
우연판단 |
절대자 |
인륜성 |
개연판단 |
현실 |
자기 소외된 정신 |
|
필연판단 |
절대적 관계 |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
(이상의 도표가 엉성하다는 것은 쉽게 눈에 뜨인다. 논리학에서는 주관논리학이 빠져 있고 정신현상학에서는 절대정신 부분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좀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생략하려 한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12개 판단형식이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의 기본 골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평행을 설명하면서 필자는 투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역사의 시간적 평면에서 일어난 이행이 사유의 논리 평면에 투영되면, 그것이 곧 논리학이고 거꾸로 논리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평면에 다시 투영하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의 논리적 투영을 ‘내면화(Erinnerun: 기억)’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동시에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정신의 역사 속에 투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헤겔은 이를 ‘형태화’라고 규정했는데, 필자는 ‘추체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그런데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평행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행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은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개별적인 지식[직접지]에서 일반적인 지식[매개된 지]으로, 우연적 진리에서 필연적 진리에로 이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이고 필연적 지식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지식의 근거이므로, 이는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필자는 정신현상학의 길을 비유적으로 ‘상승하는 길’로 묘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의식은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육박하면서 최종적 지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점에서 마침내 의식의 현상은 그 본질과 동일하게 되며, 이로써 의식에 관한 서술은 또한 정신에 관한 고유한 학문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과 합일된다.”(정신현상학, 61-.62쪽)
반면 논리학에서 진행은 그와 반대이다. 논리학에서 출발점이 되는 것은 곧 정신현상학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가장 일반적인 것,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가는 논리학의 진행 과정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마침내 가장 개별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다.
이 개별성은 이제 정신현상학에서 출발점이었던 단순히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복잡하게 규정된 개별자, 즉 모든 규정성이 상호 연관된 체계로서 개별자가 된다. 필자는 논리학의 진행과정을 정신현상학의 길과 대비하여 ‘하강의 길’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시원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진행 과정은 시원을 이루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논리학2판, 48쪽)
이상과 같이 정신현상학이 나가는 길과 논리학이 나가는 길은 이처럼 ‘상승’과 ‘하강’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길이니,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전도된 꼴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연구의 길’과 ‘서술의 길’을 구분한 것과 같다. 연구의 길을 개별 대상들에서 가장 일반적인 원리에 이르는 분석의 길(경험과학에서 보듯이)이며, 반대로 서술의 길은 가장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여 개별자를 끌어내는 종합의 길이다.
“물론 서술의 방법은 형식상 연구의 방법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자본론, MEW Bd. 23, 27쪽)
여기서 마르크스는 연구는 (내적 관련의) 분석이며, 서술은 (선험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유사한 표현은 아래서도 발견된다.
“만일 우리가 인구를 출발점으로 취한다면, 그것은 전체에 관한 하나의 혼란한 표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좀더 명확한 규정을 통해 분석적으로 끊임없이 단순한 규정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규정으로부터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인구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구는 앞에서처럼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많은 규정과 관련을 포함한 하나의 풍부한 총체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경제학에 있어서 초기에 취급되었던 역사적인 방법이다. … 두번째 방법에서는 추상적인 제규정이 사고의 길을 통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되어간다.(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서론, MEW Bd. 13, 631-632쪽)
3)
그런데 서로 평행한다면, 그 나가는 길도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에 12개 판단형식이 전제되어 있다면, 양자는 12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과 동일할 것이니, 서로 대립할 수가 없지 않을까? 한편으로 평행하면서 다른 편으로 전도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런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이나 각기 이중적이지만, 다만 각자를 이루는 두 개의 길 가운데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모두에 전제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을 살펴보자.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자. 그것은 곧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질적인 긍정판단인 “이것(사과)이 빨갛다”에서 양적인 개별 판단인 “사과는 빨갛다”라고 할 때, 여기서 ‘빨갛다’라는 술어는 전자에서는 이것에 대해 하나의 우연한 성질에 불과했다. 그것은 외부 주관에 의해 주어에 부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에서는 모든 사과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속성이면서 사과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속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이행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화하면서 동시에 구체화하는 것이다.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거로 복귀하는 것이며, 필연화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 판단형식의 이행을 전제로 하는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도 이중적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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