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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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글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의 고전적 저작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학적 역사(1947)>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청소년기 아도르노에게 칸트를 가르쳐 주고, 벤야민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준 비판이론 계열의 유대계 문예 비평가다.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문화 비평을 한 저널리스트로 유명하였다. <대중의 장식>, <사무원>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대표적 영화 저작을 발표하는데 <칼라가리…>와 <영화이론>이 그것이다. 이 중 <칼리가리…>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역사적 비평서이자 당대 독일인들의 심태(mentality)를 사회구조적 시각에서 해명한 역작이다. 비판이론적 문화산업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서툰 원고를 쪼개어 올려 본다.

서문

이 책은 독일 영화 그 자체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히틀러 이전의 독일에 대한 지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1918년에서 1933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우세했던 심리학적 경향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당시 독일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논점이다. 이 경향성은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의 추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 이후의 시대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가 미국이나 그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행태에 관한 연구를 확장하는 작업에 유익한 매체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다른 의사소통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문화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완수하게 만들 영화를 기안하는 일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1946년 5월 뉴욕시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도입

1920년 이후 독일 영화는 연합국이 [독일에] 설정한 금수 조치를 무력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독일 영화는 뉴욕, 런던, 파리의 관객들을 매혹시키면서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어떤 예술적 성취로 각인되었다. 1차 대전 후 뒤이은 모든 영화들의 원형이 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열광적인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한 평론가는 “영화 매체를 가지고 창조적 정신을 표현한 최초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했지만, 다른 평론가는 “이 영화는 더러운 음식의 악취를 풍긴다. 입 안에 재를 물고 있는 듯한 뒷맛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1차 대전 이후의 영화들은 독일의 정신을 수수께끼 같은 것 이상의 그 무엇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섬뜩하고 사악하며 병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당시 독일 영화들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자주 사용된 형용사들이었다.

독일 영화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연출 방식과 주제를 바꿨다. 그렇지만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독일 영화는 특유의 충격적 시작이라고 할 만한 어떤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기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간주되던 1924년 이후에도 그러했다. 미국과 유럽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런 특성을 지닌 독일 영화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이견의 여지없이 완전한 만장일치를 이루었다. 그들은 <칼리가리> 이후 독일 영화감독들이 선도했던 시각 영역에 대한 재능에 대해 깊이 탄복하였다. 즉 장엄한 무대장치에 대한 감각을 기탄없이 표현하고, 적절한 조명을 통해 연기의 기교를 발전시키는 독일 감독들을 존경해마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도 독일 영화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성, 즉 독일인들이 최초로 완벽하게 구사한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게다가 조명, 무대장치 그리고 배우의 완벽한 융합만큼이나 뛰어났던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고려하면서 찍은 독일 영화의 조직적 역량을 알아채지 못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가치 덕분에, <마지막 웃음(1924)>과 <버라이어티(1925)>에서 카메라 장치와 스튜디오가 총체적으로 진화한 이후 독일 영화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할리우드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독일의 카메라 워크(이 용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이다.” 할리우드는 [독일 영화에] 특히 탄복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독일 영화감독, 배우 그리고 기술자들을 고용하였다. 프랑스 역시 라인강 건너편의 영화 양식이 수용할 만한 것임을 입증해주었다. 그리고 고전 러시아 영화들은 독일 조명과학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감탄과 모방은 내부까지 파고드는 깊이 있는 이해(intrinsic understanding)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독일 영화에 관한 많은 글들은 기이한 특질에 대한 연이은 분석에 머무르고 있었다. 설사 이를 넘어서는 이해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독일 영화의 실존과 연관되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풀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미학적인 이러한 문헌은 영화를 마치 자율적 구조를 지닌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영화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왜 독일에서 카메라가 최초로 완벽한 움직임을 성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독일 영화가 이룩한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의하지 않았다. 영국의 영화 잡지 『클로즈 업 Close up』의 저자들과 협력하고 있었던 폴 로타(Paul Rotha)는 일찍부터 독일 영화의 예술적 장점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연대기적 틀 속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미국 유성 영화가 등장하는 시기까지의 독일 영화를 살펴본다면, 대략 세 개의 모듬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연극조의 사극 영화고, 두 번째는 스튜디오 예술 영화의 중흥기이며, 세 번째로는 미국적 ‘영화 감각(picture-sense)’에 동조하기 위해 독일 영화가 침체되어버리는 시기다.” 로타는 독일 영화들이 왜 이상의 세 모듬으로 묶여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외적 해석은 규범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식의 여러 해석은 위험한 오해를 낳았다. 1924년에 발생한 독일 영화의 쇠퇴로 인해 독일의 중요한 영화인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이는 독일 영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낳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시기 독일 영화에 대해 “미국화”되거나 “국제화”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를 내놓았다. 이른바 “미국화된” 영화가 사실은 이 시기 독일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줬다는 점이 앞으로 서술될 것이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테크닉, 내용, 진화는 그 나라의 심리학적 유형과 연관될 경우에만 충실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 앞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한 나라의 영화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여타 예술 매체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나라의 심태(mentality)를 반영한다.

첫째, 영화는 개인의 산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영화감독 푸도프킨(Pudovkin)은 영화 제작을 산업적 생산 방식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의 집단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기술 관리자는 십장과 인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만일 모든 협력이 기술 관리자의 기능을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그들의 집단적 노력은 결코 좋은 결과물을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팀워크는 모든 일을, 심지어 가장 하찮은 일이라도, 살아있는 노동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만들며, 분화된 노동 작업을 조직적으로 연결하여 전체적 작업을 이루도록 만든다.” 저명한 독일 감독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면서 그에 따라 행위 하였다. 나는 프랑스 주앵빌 스튜디오에서 G. W. 팝스트(G. W. Pabst)가 연출하는 촬영 현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가 무대 장치와 조명의 배분에 관해 제안된 기술자들의 의견을 기꺼이 따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팝스트는 이것을 영화 제작에 있어서 귀중한 기여로 생각한다고 내게 말하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팀들은 모두 상이한 관심사와 경향성을 융합시키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팀워크는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태도를 배제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성향을 위해 개인의 특질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영화는 익명의 다중에게 말을 걸면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한다. 따라서 대중영화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 영화의 모티프는 대중의 현재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흔히 할리우드는 대중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영화를 그냥저냥 판매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 청중이 지닌 수동성과 압도적인 홍보의 위력을 통해 그들을 우롱하고 잘못된 곳으로 이끈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지닌 왜곡의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날조자들은 질료가 지닌 내재적 성질에 의존하고 있다. 심지어 순수한 선전물로서 제작되었던 나치의 어용 전쟁영화조차도 결코 조작할 수 없었던 어떤 민족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치] 영화들에게 유효한 진리는 경쟁사회의 영화들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할리우드는 청중이 지닌 자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반의 불만은 줄어드는 매표 수입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수익에 극도로 관심을 두는 영화 산업은 가능한 한 [청중의] 변덕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할리우드는 관객들이 무언가를 원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자면 청중의 욕망이 할리우드 영화의 본성이다.

앵무개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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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래전 어딘가에 써놓았다가 처박아 둔 것이다. 세월의 변화를 감안하여 조금 손보았다. 재활용은 좋은 것이다.

 

하루 24시간 동안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말을 입에 올리고 있을까?

말 많은 인간을 내지 않는 집안의 자손인 나는 일상생활에서 되도록이면 입을 많이 놀리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공교롭게도 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전공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화에서 무척 고전한다. 최소한의 대답만 하는 나를 아주 거만하거나 버릇없는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건 터무니없는 오해인데, 왜냐하면 그럴때의 나는 다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중이거나, 상대방과의 화제를 찾기 위해 머릿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의 상황을 백여수 정도 까지 진행시키는 중이거나, 아주 가끔 정말 상대방을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세번째의 경우가 증가세다.-

그래서 친구가 점점 적어진다.

있어도 멀어지는 중이다.

그 결과 말 수는 더 적어지고, 운동부족이 된 내 혀는 점점 뚱뚱해지고 있다.

한번은 내가 하루동안 무슨 말을 했는가 적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게 고작 “밥 줘”, “얼마여요?”, “응”, “아니”, “끊어” 뿐이었다.

 

혹자는 가족과 대화는 안 하는가고 짐짓 의아하게 생각할 테지만,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가 아니고, 내가 밤 늦게 집에 가면 나의 모친께서는 붓글씨 쓰기에 여념이 없으신고로 나는 할 수 없이 가만히 모친의 곁에 앉아 불을 끄고 떡을 썰 운명밖에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떡을 잘 못 썰면 다시 도서관으로 쫓겨가야 한다. 참고로 난 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오늘은 <타임>지에 ‘영향력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황우석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앵무개를 만들어 달라고 얘기해봤다.

나의 불행한 사정을 조용히 오랫동안 귀 기울여 주시던 황교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 황수관입니다.”

 

앵무개란 앵무새와 개의 교접종으로 나의 심각한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들기 어려운 유전자 변형 생물이다.

처음에 나는 나의 심각한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을 치료하는 데에는 애완동물이 제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되도록이면 말하는 동물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현재 애완도 가능하며 말까지 할 수 있는 생물이라면 대표적으로 앵무새가 존재하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새라는 새는 모두 무서워하는 ‘조류 공포증’을 지니고 있으므로 앵무새는 결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앵무새는 무척 크며 발톱도 무지막지하게 굵고 부리는 거대하며 덩치도 꽤 나간다. 섣불리 앵무새를 키웠다가는, 분명 어느 천둥번개 치는 밤 앵무새는 커다란 발톱과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운 부리로 허술한 새장을 찢어발기고는, 더할 나위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잠든 나를 습격하고 말테고, 다음날 난 하의가 벗겨진  변사체로 발견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 하의가 벗겨져 있는지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앵무새를 키우기 위해서는 키다리 존 실버나 플린트 선장 혹은 갈고리 후크 같은 이들의 직군에 있거나, 그것에 걸맞는 몸집과 정신세계를 지녀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나는 그런 직업 세계인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무척 만족하는데다가,  뱃멀미에도 약하고, 카리브해는 커녕 캐리비안 베이에 가 본적도 없으니-생각해 보니 한 번 가봤는데,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추억이 생각나서 가보지 않은 곳으로 선포한다- 앵무새를 애완하기 위한 조건은 아무래도 만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남은 대안은 유전자 변형을 거친 동물의 개발인데, 앵무새와 개를 조합한 앵무개는 분명 말도 할 줄 알테고 재롱까지 솔찮이 부릴 테니 나의 긴 이름의 증후군을 치유하기에는 무척이나 적합한 대안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앵무개만 데리고 다니면 나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될 것이며, 영화와 CF와 앨범 판매와 게임으로 온갖 돈을 움켜쥐게 될 것이고, 앵무개가 수명을 다한다고 해도 미리 들어놓은 보험은 죽음에 의한 손해를 해소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희한한 동물에 의한 성공은 미국의 콜로라도주에 실재했던 머리 없는 닭 마이크에서 이미 증명되었으니 앵무개의 개발은 분명 대박이다. 그러니 난 생계를 위해 공부를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앵무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바티칸의 아르헨티나인 교황을 제거해야 하고,

황수관 박사의 방해를 따돌리고 황우석교수에게 소대신 개와 앵무새를 연구하도록 설득해야 하며, 그렇잖아도 희귀한 앵무새를 잡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물론 앵무새 보호 단체와의 전쟁은 필수다.

 

특히 마지막 조건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와 뉴기니아 등지의 지방 군벌들과 친분을 쌓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사업에도 관여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홍콩과 상해의 삼합회와 충돌을 일으킬 것이며, 중국에서의 조직간의 충돌은 어느덧 나비 날개에 실려 미국 해안가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것이고, 미국 전역은 재해로 인해 온갖 난동과 범죄에 휩싸일 것이고, 이를 본 미대통령은 ‘기왕지사 또 전쟁하자’며 ‘불량국가들’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이런 고난을 뚫고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설적인 킬러 카를로스와 검은 9월단과 붉은 여단과 알카에다와 블랙팬더단과 벵갈의 호랑이단, BF단, 스펙터, 닥터이블, 아수라백작, 파란해골 13호, 친구, 양은이파 등등의 비동맹세력과 광범위하고도 집중적인 연대가 필요할 텐데…

 

문제는 이 많은 사업을 하려면 수 많은 사람들과 오만가지 언어로 수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므로-또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말 없는 의사소통행위이론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채식주의자 조스가 있다-, 나의 일명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은 앵무개를 만들기도 전에 자연 치유될 것이며,

 

일단 치료가 된 마당이니 이제는 앵무개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위의 무지막지한 집단들에게 알리면,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오백만번쯤 후회하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이고, 흥분한 황수우석 교수팀은 앵무개를 만들다가 우연히 발견한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려 워킹데드의 세상으로 만들 것이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쳇, 앵무개 하나 만들기 되게 힘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