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루빈(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3. <일탈>, 게일 루빈 (上)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두 번의 커밍아웃

 

게일 루빈(1949 ~ )은 두 번의 커밍아웃을 통해 삶의 커다란 전환을 이뤘다. 첫 번째는 루빈이 미시건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즈음인 1971년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나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보다 두 번째 커밍아웃이 루빈에게는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 때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 담론들이 깨져나가던 시기였기에 루빈은 새내기 레즈비언으로서 도덕적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커밍아웃 때에는 S/M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 구체화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이미지가 하루하루 추해지는 걸 지켜보고, 체포를 두려워하고, 앞으로 얼마나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안해” 했다. 특히 자신이 한때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S/M을 가부장제의 사악한 산물로 여기는 바람에,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배제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게일 루빈이 1971년에 발표한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를 첫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1982년에 발표한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를 두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와 변화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두 텍스트 사이에는 게일 루빈이 놓여 있었던 정치적 상황 및 루빈 자신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공간적 이동과 연구 주제 및 연구 방법론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텍스트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라는 관점을 공통적으로 견지하지만, 「여성 거래」에서 주요 개념으로 제시한 ‘섹스/젠더 체계’를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철회하는 식으로 게일 루빈 이론의 내용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게일 루빈의 주요 저작인 「여성 거래」와 「성을 사유하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각 텍스트가 갖는 의의와 함께 어떻게 게일 루빈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면서, 여성주의의 주요 논제에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여성억압의 기원으로서 여성 거래

 

여성억압의 기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과 계획을 취할 것인지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레비스트로스(1908.11.28 ~ 2009.10.31)의 구조주의와 프로이트(1856.5.6 ~ 1939.9.23)의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응답한다. 루빈 역시 그 당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기능하는 여성 억압의 기제를 상정한다. “생물학적인 여자를 억압받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억압 기제를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왜 “도무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조차 여성들은 억압받고 있”으며, 왜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이 글에서 시도한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시작을 친족의 기원에서부터 탐색한다. 이때 친족은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여한 것”으로 근친상간 금기라는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가 발생한 장소이다. 이 통제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하여 “허용된 성적 파트너와 금지된 성적 파트너라는 범주들로 성적 선택의 세계를 분할”하는 기능을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근친상간 금기의 비밀은 어머니, 여자 형제, 딸들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도록, 즉 여성을 선물로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이다. 이처럼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는 여성 교환을 기반으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친족의 기원으로 여성이 거래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첫째, 여성은 물건처럼 교환의 대상인 반면, 남성은 거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상정된다. 둘째, 남성들 간의 여성 거래는 결국 남성들 간의 연대와 호혜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남성중심적 사회는 여성 거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애초에 생물학적으로는 위계가 없던 성에 구별을 두기 위해서는 여성이 여성으로 길러지게 되고, 남성이 남성으로 길러지게 되는 특수한 가족 내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거래가 일어나도록 하는 특수한 조건들의 체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 섹스/젠더 체계

 

‘섹스/젠더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원자재가 인간의 사회적 개입으로 빚어지고, 아무리 기괴한 관습일지라도 그런 관습적인 방식으로 충족되는 일련의 제도들”로 규정된다. 즉 인간의 몸과 성적 욕망이라는 자연적 재료를 ‘젠더’라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 및 관습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섹스/젠더 체계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젠더 정체성의 형성 및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정하는데, 특히 여성의 몸에 이 섹슈얼리티 통제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거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수동적인 형태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게일 루빈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가족 서사를 ‘여성 거래’와 여성의 섹슈얼리티 억압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 오이디푸스 서사에 대한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갖는 강력한 이점은 인간의 정신 형성 과정을 가족 서사, 즉 오이디푸스 서사를 통해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엄마, 아빠, 아이의 관계를 들어다보면,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욕망과 질투와 좌절로 가득 차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성숙한 아이는 이 과정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견디고 겪어내야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상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정상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성 역할이 무엇인지를 완벽히 체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정상적’ 인간이 되기까지 아이가 겪는 고된 역경의 과정을 신화적인 표현을 빌려 ‘오이디푸스’ 서사라 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라캉을 따라 ‘남근 선망’이 아닌 ‘팔루스 교환’을 오이디푸스 서사의 중심에 놓으면서 팔루스를 잠재적 여성 교환을 위한 징표로 해석하여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거래’ 개념과의 접점을 찾는다. 이에 의하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과정을 통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어머니를 포기한다. 이때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긍정하는 대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팔루스를 확증해주며, 이 팔루스는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를 교환할 수 있게끔 하는 상징적 증표가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거부당하면서 근친상간 금기뿐만 아니라 동성애 금기까지 경험한다. 그리고 팔루스를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고 팔루스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향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자아이게 주었던 팔루스를 여자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결국 남성에게서 받는 선물(성교와 어린아이)을 통해서만 팔루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게 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단계가 여자아이에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여자아이의 에고는 수동적이고 마조히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석한다면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자아이에게 억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서사와 이 서사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깨버려야 정신적인 해방까지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로 팔루스와 팔루스가 함의하는 여성 교환을 깨버려야 한다. 두 번째로, 애초에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에게로만 향하는 양육방식을 깨버려야 한다. 세 번째로, 가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깨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가족관계의 구성을 깨버려야 오이디푸스 서사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 젠더가 없는 사회

 

여성억압의 기원이 ‘여성거래’라면 여성해방의 기획은 자연스럽게 여성거래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은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친족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스스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경험하고, 레즈비언 아빠나 게이 엄마처럼 여러 형태로 가족이 구성된다면, 고통스러웠던 젠더 정체성의 형성 과정도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미 친족의 구속력은 약화되어 “가장 최소한의 뼈대인 섹스/젠더 체계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는 가능한 해방 전략이 될 수 있다.

게일 루빈은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통해 젠더 젠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보았다. 비록 해부학적‧생물학적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양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상을 전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