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4. 욕구, 요구, 욕망
아기의 울음은 처음에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적 욕구(need)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울음에 대해 엄마가 보이는 사랑의 응답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아기의 울음은 이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로 점차 바뀌어간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운다기보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운다는 뜻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욕구의 주체는 이리하여 점차로 요구의 주체로 바뀌어 간다. 특히 언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초보적 수준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아이의 성장과정이 늘 행복한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첫 번째 상실의 아픔은 바로 젖떼기(離乳)이다. 태어나서 매일같이 마음껏 빨아오던 젖가슴이 이제 아무리 울고불며 찾아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만 아기는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가 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젖떼기 시기에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맛보았던 ‘사랑의 만족감’이다. 곧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시선을 마주보며, 젖꼭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달디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느낌을 되돌려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이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욕구야 앞으로도 이러저러하게 충족되겠지만, 한때 경험했던 완전한 사랑의 만족감은 영원히 상실되고 만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젖떼기나 배변 훈련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양육 과정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일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아이가 보기에 엄마가 더 이상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아이에게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엄마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의문에 싸인 아이는 마침내 엄마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찾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엄마의 욕망(desire)을 깨닫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신이 욕망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아이가 무엇을 욕망할지를 엄마로부터 처음 배울 뿐 아니라, 엄마가 아이 자기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엄마의 욕망에 눈을 뜨고, 나아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이는 이제 마침내 엄마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 단계를 가리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5. 욕망하는 주체의 탄생
‘오이디푸스(Oedipus)’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반대 성의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아이 같으면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심리이고, 여자아이 같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는 어떻게 해서 아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걸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원인을 엄마의 욕망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아이가 아버지의 남근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남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근이 바로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믿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남근이 이처럼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그 시기를 남근기(2세~6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아이는 남녀 성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여자 생식기가 남자 생식기와 달리 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심은 그런 해부학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없는 것이 (그래서 엄마가 아이 자신 말고 욕망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결여한 것이 엄마가 늘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바로 남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눈에는 그것 말고 엄마에게 없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남근’은 어른들이 이해하는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성’이 뭔지, ‘성교’나 ‘성기’라는 것이 뭔지 아무 개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남근이 아니라 ‘엄마가 욕망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심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페니스’와 구별되는 ‘팔루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팔루스는 아이의 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남근은 엄마와 아이의 최초의 결합을 분리, 해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가 원하는 남근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엄마의 결여를 자신의 남근으로 메우려고, 그래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예전의 일체감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근친상간 욕망).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거니와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엄마에게서 당장 떨어지라!’ 하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추상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은 비단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대리자 격인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떨어진다. 더구나 그 명령은 거세(castration) 위협까지 동반한다. ‘고추를 떼버리겠다’는 위협은 엄마에게서 거세의 표식을 이미 확인한 아이로서는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합일 그리고 그 합일이 안겨주던 만족감을 영원히 단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과정이다. 아이는 거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정신적으로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 아울러 인간의 세계 곧 도덕과 법의 세계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경험한, 그러나 영원히 상실하여 되찾을 수 없는, 그렇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엄마와의 행복한 일체감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일체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아 평생 헤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인간의 성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몇 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답변해 보자. 먼저 인간의 성적 쾌감의 문제이다. 인간의 경우 성욕 만족에서 오는 쾌감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욕이나 갈증 같은 자연적 욕구의 해소에서 오는 단순한 쾌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법에 의해 강력하게 억압된 상태에서의 성충동의 만족이기에 (라캉이 주이상스, 곧 ‘고통 속의 쾌락(pleasure in pain)’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할 바 없이 자극적이고 외설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렇지 않은 쾌락에 비해 훨씬 더 증폭된다.
성감대의 편재성(遍在性)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식기 말고도 신체 전반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유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의 손길이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당한 뒤에도 신체 곳곳에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감대는 영원히 상실한 어머니와의 일체감의 기억과 소망이 잠들어 있는 신체 부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이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성은 기본적으로 본능적,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되풀이하지만 성 정체성은 아이가 자기 생식기를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앞서 오이디푸스 및 거세 과정을 남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정상적인’ 남자아이라면 거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팔루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먼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즉 남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여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길은 훨씬 더 복잡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인 어머니가 최초의 사랑 대상이다. [* 이런 차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여자에게 동성애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며, 남자 동성애를 도착증으로 보는 반면 여자 동성애는 특수한 병리 현상으로 보지 않다. 심리학적 여성의 심리구조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강하게든 약하게든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지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이미 거세를 경험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경로가 다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이 시기에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선망하게 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근 대신 아기를 소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지법을 수용하고 나서 (즉 최종적 거세가 일어나고 나면) 아버지 대신 아기를 제공해 줄 남자를 기다리게 된다.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여 좌절이나 분노를 겪게 되면 (예컨대 이 시기에 엄마가 아기를 낳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아닌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 여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아버지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이전의 어머니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성적 정체성은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남자가 되지만, 성적 지향성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이 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적 정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되는지를 이해했다면,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성적 지향성, 나아가 갖가지 정신병리적 증상들[*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도착증(새디즘, 매조키즘,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등) 그리고 정신증(편집증, 분열증)]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 해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역도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