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철학자의 서재]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읽는 스피노자부터 칸트까지,

스포일러 없는 서평 추구

 

 

 

스펙이나 쌓는 저렴한 삶은 살지 않겠다 해놓고 보니, 취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철학 관련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비전공자들은 그래서 철학 서적들을 읽을 땐 2차 문헌이라고 하는 안내서나 입문서들을 통해 읽거나 할 수 밖에는 다른 묘수가 없다. 스피노자니 칸트니 헤겔이니, 다 그렇다. 말하자면 내 방에 과외 선생님이 필요한 건데 이 책은 내게 그 역할을 해주었다.

 

스피노자의 <에타카>는 읽다가 읽다가 버티고 버티다가 그냥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스피노자에 대해 쉽고도 재밌게, 가령 스피노자가 어떻게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쉽다’거나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거미에겐 쉬운 거미집 짓는 일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것이며 인간에게 쉬운 일을 거미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산수를 못하는 거미에게 무능력하다고 하겠지만 그건 인간중심적 사유방식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사실 거미와 인간에게는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자신의 편리대로 사물을, 대상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신까지도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스피노자하면 ‘신 즉 자연’이라는 말부터 떠오르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스피노자의 ‘신의 자연화’는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거나 자연이 오묘한 설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해체하기 위한 말이었다(p. 103).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특별히 도움을 주기 위해 인간 신체의 기관들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자연은 따라서 신의 설계가 아니라 다만 기계적 기술의 결과라는 말이 된다. 오늘날 읽어도 이런 스피노자의 생각들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칸트나 헤겔은 또 어떤가. 물론 그 전에 홉스, 로크, 흄, 루소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한을 국가나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기본적 생각이다. 여기서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바가 곧 군주가 원하는 바’라는 점에서 개인과 군주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건 끝나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 너(지배자)와 내가 하나인 상태, 균열이나 분열 없이 그런 상태가 가능한가. 아주 작은 집단조차 뜻이 안 맞아 분열하고 갈라서는 데 말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폴리스(시민들이 의논하면서 공동으로 실천하던)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과 행복이라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p. 172). 홉스의 사회이론은 이런 시대에 탄생했다. 홉스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했다. 그게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홉스는 왜 자연상태를 상호부조의 상태가 아니라 전쟁상태라고 단정 지은 걸까. 홉스의 자연상태는 하나의 가상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인간에게 자연권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힘을 말한다(p. 174). 따라서 이런 상태의 인간들이 ‘국가’가 없다면 전쟁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이기적이만한 걸까. 최근에는 이기적 성향이 인간 유전자 속에 자연적으로 입력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자연적 증거로 제시되지만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는 자명하지 않다(p. 181). 아마 홉스는 근대의 시작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나면서부터 무한한 이기적 권력욕을 지닌다는 ‘생리학적 본성론’을 가정했을 것이다(같은 곳).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이제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전쟁을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 홉스에게 이성이 이기적이면서 사적인 반면, 로크에게 이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상호 존중하는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p. 206). 둘 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근대 부르주아 정치 이념이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홉스에게 시민사회의 목적이 죽음을 피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로크에게 그것은 ‘재산의 보존’이었다(p. 209). 로크에게 시민은 자유로운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로크는 스스로 공적 이성을 중시했지만 그 이성은 ‘재산을 가진 시민의 이성’이었던 것이다.

 

루소는 로크의 주장과 달리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또 루소는 홉스식으로 자연상태를 전쟁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독립적 존재들의 세계로 묘사한다(p. 276). 이런식으로 루소와 로크, 홉스의 정치, 사회이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건너 뛸 뻔 했다. 루소로 가기 전에 흄이 있었다.

 

흄, 하면 인과론을 비판했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인과론을 왜 비판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이걸 문제 삼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흄에 따르면 그건 우리의 반복적 경험에 따른 믿음이지, 직접 지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p. 251). 막말로 내일 태양이 안 뜰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이런 습관적 인식을 흄은 비판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한 나라고 가정된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나, 함빡 웃고 있는 나, 설레는 나, 떨리는 나, 화난 나, 이런식으로 존재할 뿐 ‘불변하는 나’라는 ‘실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대번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라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대답은 각자 마련해 보시길. 너무 많은 걸 스포일러 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칸트까지만 간략 소개할까 싶다. 헤겔은 소중하니까 남겨두는 걸로. 흄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흄을 넘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철학자 아닌가. 기존에는 객관 대상에 의거하여 주관이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칸트는 주관에 의해서 객관이 성립된다는 인식 방법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p. 308).

 

칸트는 인간의 인식, 주관, 내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면서 여기에서 인간의 해방, 즉 ‘자유’를 발견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경향성을 지닌 인간 존재는 결정론적 인과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경향성, 인간의 자연성을 넘어서 도덕법칙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때 자신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 수 있다.

 

칸트에게는 자연보다 ‘자유’가 우위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저 두 세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칸트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칸트가 거기서 찾아낸 것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의 영역 사이에 중간항(p. 319)으로, 이 판단력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판단력의 영역, 즉 ‘미적 체험’에서 인간은 저 두 세계(자연과 자유)를 통일할 수 있으며 이때 인간은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감(p. 323)이라는 게 있어서 충분히 그런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정리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한번 근대철학사를 훑어보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큰 산의 형태를 한 번 보고 나무를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랄까. 물론 중요한 일은 직접 스피노자를 읽고, 칸트를 헤겔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무턱대고 칸트를 펼쳐들었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 이게 우리가 칸트 입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꼭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전처럼 공부하다가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학 정석이 집합 부분만 새카만 것처럼 모든 책의 서문만 까맣게 된 책들이 많은 건 나 뿐일까. 그래서 요샌 아예 중간이나 뒤에서부터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책은 궁금해서 앞을 볼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니던가. 잘 정리된 서양근대철학사 한권쯤은 읽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원하는가? [피켓2030]

건국대학교 철학과 사회철학반 일동: 이동구, 이윤하, 서동기

2016년 11월 4일

 

2016년 11월 4일의 이른 새벽, 저희 사회철학반은 철학과 학술제를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작성을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학문과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 현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지는 국정농단 사태는 단순히 그들 개인의 도덕성과 판단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가치에 대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사회철학반은 우리 사회를 향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고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 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출판, 1부 <세 변화에 대하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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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희는 질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건에 국민들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핵심적 권한들을 최순실씨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지금 모든 분노는 최순실씨를,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올바르게 향하고 있을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만든 대통령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잘 사는 삶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하였고, 이는 곧 ‘부자가 되는 것=잘 사는 삶’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을 지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또한 ‘부자가 되는 것, 풍요로운 삶=잘 사는 삶’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삶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그 대단한 꿈, 청춘, 행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공무원이 되기를, 안정적 직장을 갖기를 꿈꾸고 우리의 자식들과 친구들에게 성공신화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성공한 자들을 보십시오. 무당의 말을 받아 적고 있던 고시 출신의 청와대 엘리트 행정 관료들을 보십시오. 새파란 아이들 300명이 죽었는데도, 뉴스에 나오는 게 지겹고 노란리본이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혹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누군가는 이 혼란한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결단으로 거국중립내각을, 또 어떤 이는 다음 대선 주자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쩌면 이 혼란을 수습할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오늘의 절망적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좌절과 분노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요?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구원자가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구세주를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훌륭한’ 인물들에게 삶을 맡겨왔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대단한 자유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유란, 어떤 기업에 들어가든지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희망퇴직을 당해 치킨집을 차릴지 고민할 자유거나, 비정규직으로 내일의 불안을 견뎌내며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어떤 스펙을 쌓을지 고민할 자유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는 명분하에, 금전적 성공과 안정적 삶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요? 정작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밖에는 남아 있는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고, 정념에 예속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도 실상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통한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욕망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소한 것들에 분노합니다. 카드를 거절하고 현금지불을 요청하는 업주,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 자꾸만 비싸지는 물가,  성심껏 써낸 자소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기껏해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업주와 알바생, 젊은이, 물가, 면접관들을 향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분노가 과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분노가 생겨난 까닭은 작은 몫이라도 얻어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알바생과 업주, 젊은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바로 그 구세주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땅한 몫은 탐욕스러운 구세주들이 차지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당한 처우를 당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나약한 ‘개, 돼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탐욕스러운 구조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모인 스포츠 경기장을 상상해보십시오. 멋진 경기와 훌륭한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경기는 그런 스타플레이어들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일까요? 경기장을 진정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고 바라보는 관중들입니다. 관중들이 없다면, 경기는 남들보다 조금 특출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몸짓일 뿐입니다. 관중들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선수들은 인정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힘을 통해 구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성장과 성공에 동의했고 그들을 지탱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동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얻어낸 87년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해낸 업적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헌법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그 권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시위를 한다고 해도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허무와 회의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시국을 구원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우리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짐이 실리기를 바라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어떤 자유여야 하는지,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우리가 추구하고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상상합시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의 상상들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합시다.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L’imagination au pouvo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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