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경계에서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3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3

오늘의 서평: 김영식 저,  유가 전통과 과학(예문서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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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와 확장

“단어 그대로 번역하지 말라”verbum pro verbo는 키케로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동양에는 왜 플라톤이나 뉴턴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쉽게 한곤 한다. 반면에 “서양에는 왜 공자나 주희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생소하게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현실에 너무 쉽게 적응되어 자연과학이 형성된 서구의 문화와 사회적 요소들이 판단의 중심기준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철학 혹은 자연이나 종교와 같은 큰 개념조차도 서구문화의 소산물이거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자연과 종교를 주제로 놓고서 서양과 동양을 비교할 경우 과연 비교 자체가 될 것인지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란 결국 한 쪽의 기준을 통해서 다른 쪽을 견주어 보는 일이니만큼 비교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고민은 번역가능성 테제 혹은 과학철학사에서 유명한 토마스 쿤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이라는 주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사상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번역과 통약을 피해갈 수 없다. 현대는 문화적 번역의 시대다. 이미 두 문화는 만났고, 그것이 충돌이 되었건 조화가 되었건 우리는 두 문화의 섞임을 피해갈 수 없다. 12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희랍어와 아랍어 그리고 라틴어 사이에서 이뤄진 상호 번역의 역사적 소산물이다. 르네상스 번역의 역사는 단순히 텍스트 사이의 비교가 아니라 문명적 콘텍스트의 교환이 이루어진 시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상으로 오늘 우리의 문화사는 번역과 통약 그리고 비교와 확장 그 자체이다. 마테오 리치나 정약용에서부터 오늘날 동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의 원천은 두 경계에 사이에 놓여져 있다. “말 그대로 번역하지 말라” 그리고 ‘현대는 번역의 시대다’라는 두 경계 말이다. 이런 생각에 머뭇거리다가 요즘 새로운 책을 한 권 읽었다. 두 경계 사이에서 텍스트의 비교가 콘텍스트의 확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었다. 김영식의 <유가전통과 과학>(2013)이라는 책이다.

2. 다중적이지만 객관적 해석

김영식의 <유가전통과 과학>이라는 책은 동서의 경계만이 아니라 고금의 경계까지 다루었다. 이 책의 저자 김영식은 자신의 다른 책 <주희의 자연철학>(2005)에서 이미 독특한 비교 시선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더 나아가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동양의 지식을 재단하는 일에 대하여 냉정한 비판을 던져주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문명비판의 기운을 앞장세워 나온 신과학운동은 동양고전과 첨단의 서양 과학을 직접 비교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서구 과학과 동양 고전 사이의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동양의 고전을 신비주의로 전락시킨 꼴이었다. 이 책은 그런 신비주의 운동과 거리가 멀다. 그러면 저자는 어떻게 유학과 과학을 서로 소통시키려는 것일까? 그의 방법론은 유교 원전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독서를 중시하는 데 있다. 책에 등장하는 중국의 주자학, 조선의 성리학과 실학의 원전을 객관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서양과학의 사상사적 토대와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다. 또한 텍스트를 접근하는 태도에서 독단적 견해를 버리고, 새롭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격물치지 이론이 서구의 과학적 추론방식을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러면서 그는 직접적이고 단언적인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다중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른 사례로서 조선 실학자들의 지전설(지구회전설)이 자칫 그들만의 고유한 이론으로 평가되기 쉬운 점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실학자들의 지전설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신지식을 수용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창안물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조선유학의 뿌리를 다시 읽는다.

3. 절차적 사유

저자는 우선 주희의 주자학적 방법론에서 과학추론의 하나인 ‘유추’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유추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알지 못한 것을 알게 해주는 추론이다. 저자는 유추 방법론에서 유가전통의 사고방식인 상관적 사고correlative thought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80쪽) 알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 그룹이 알지 못하는 사물이나 현상의 그룹과 같은 종류의 그룹이라는 점을 알게끔 해주는 사고력이 바로 유추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연현상이나 사물이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의 상관적 범주로 나눠지거나 오행이라는 다섯 범주로 나눠지기도 하는 것을 상관적 사고라고 한다. 상관적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이나 서양과학에서 말하는 차이법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에서 한번 분류된 것은 영원히 그 분류에 종속된다. 반면 중국전통의 핵심범주이기도 한 유가의 상관적 분류는 고정된 소속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한때 음이었다가 양이 되기도 한다. 상관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분류의 고정성은 문제가 아니다. 주자학의 유추 방법을 통해 서구의 과학추론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만 유추된 실현물은 과학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유추를 통해 사물과 현상을 끝까지 파악하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에 통하는 공부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주희의 공부하는 자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주희가 말하는 공부는 마음의 지각능력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닿아서(卽物) 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窮理) 각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식을 아는 것은 우선 (i)누구나 인정하는 단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ii)알 때까지 추론하며 (iii)그 사물이나 현상을 관통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이다.(90쪽) 다시 말해서 저자가 지적한 주희의 공부법은 바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공부법과 같은 것이다. 논리적으로 순서를 밟아가야 하며 사고의 도약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주자학이나 서구의 과학에서 동일하다. 나는 저자의 이런 지적이 매우 신선하며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존의 동서철학 비교는 주로 인식의 결과물에 맞춰져 있었다. 예를 들어 서양의 천문학과 동양의 천문학의 비교에서 천문학이라는 학문의 내용이 서로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면서 비교를 했다. 어떤 비교철학자는 동양의 기와 서양의 에너지 개념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동양고전에 이미 현대과학의 맹아가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만용의 종합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비교방식은 (i)자칫 우연을 필연으로 가장하거나 곡해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으며 (ii)비유나 은유를 직적접인 논리적 대비법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 책의 저자 김영식은 그런 외형적 비교에서 탈피하여 사유의 절차 자체를 중시했다. 어떤 역사는 과학을 낳고 어떤 역사는 이슬람을 낳았듯이, 중국역사는 유가전통을 낳은 것이다. 그 낳은 소산물은 다 다르지만 낳게 한 사유구조 사이에는 서로 비교되고 사로 통합될 것이 있다는 이해가 바로 저자의 고유한 생각이라고 본다.

4. 상관적 사유와 격물

주희는 많은 자연학적 지식을 주자어류에 담아 놓았다. 그러나 주희에게 서구식의 과학이라는 별개의 독자적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저자는 강조한다.(98쪽) 당연한 말이지만 주자의 자연철학을 너무 쉽게 과학기술에 비교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이런 강조는 의미있다. 이 책에 의하면 주희의 자연학적 관심은 (i)내단의 경전에 해당하는 참동계(參同契) (ii)예(禮)에 해당하는 음악 (iii)역학의 상수학과 양생론에 몰려 있다. 주희는 이 밖에 농사법, 의학, 점술 등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한다. 그러한 주희의 자연학적 관심을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다. 주희의 자연학은 자연의 운동성을 통하여 결국 도덕이론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사회생물학이다. 굳이 억지표현을 하자면 ‘사회자연학’인 셈이다. 화석에 관한 주희의 설명도 역시 변화의 음양론을 강화하는 유비법에 지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105쪽)

이러한 유비법은 결국 상관적 사고를 조직하는 데 쓰였다. 저자에 의하면 주희에게 자연계와 도덕계는 상관적 사고 안으로 흡수되어 같은 차원에서 범주화되었다. 사물이나 현상도 그렇지만 주희가 관심을 가졌던 음악의 소리도 오성(五聲)이나 12율(律)처럼 상관적 사고 안에 흡수되었다. 자연의 사물이나 자연현상이 오행이나 음양같은 상관적 사고로 범주화되듯이, 주희에게 인간의 성정을 오행으로 범주화시키거나 혹은 덕성을 사덕(四德: 元, 亨, 利, 貞)으로 범주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고 한다. 자연계와 도덕계를 동일한 수준에서 본 것은 주희의 중심적인 관점이면서 동시에 주역 이래 한자문화권 전반에 걸친 사유구조의 특징이다. 상수학이 가능한 이유는 역경에서 말하는 자연의 운동원리가 인간의 운동원리와 동형적이라는 점에서 찾아진다. 주희의 理一分殊를 도덕계와 자연계를 묶어내는 핵심이론으로 본 저자의 시선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주희는 하나의 리를 天理와 동일시했다고 한다. 인간 본연의 性에 仁이나 義같은 윤리적 덕목의 형태로 天理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악한 속성이란 人慾이 天理의 발현을 방해하고 차단하기 때문이라고 본 주희의 생각은 인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런 수양의 방법론이 바로 격물格物이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격물을 통해 天理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道와 理를 똑똑히 볼 수 있다고 한다.(73쪽) 그래서 마음의 리와 사물의 리를 동일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격물에 마음을 다하면 理에 대한 지식 자체가 아니라 理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넓고 깊어진다는 데 있음을 주희가 강조한 것으로 저자는 지적한다.

서구과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는데서 출발한다. 과학은 두 가지 사유의 절차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가설연역적 추론이다, 사고의 조직적 구조에 따라 연역적 가설을 형성하는 추론이다. 또 하나는 관찰을 통한 귀납적 추론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플라톤의 실재론적 사유가 왜 자연과학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첫 번째 가설연역 추론과 연관한다. 관찰된 자료들을 ‘무엇인가를 지향하여 혹은 어디로 초점을 맞추어 묶어내는’ 귀납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인가를 지향하여 혹은 어디로 초점을 맞추는’ 사전의 사유기능은 연역의 마음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실재가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과학사적 의미는 연역사유의 중요성에 있다. 물론 플라톤 식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과학의 경험적 추론과 무관하다. 뭐니뭐니해도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귀납적 추론이다. 앞서 말했듯이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경험자료를 종합하는 귀납추론 말이다. 관찰자료들을 일반화하는 추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주관을 관찰되는 객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적 관찰을 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자연과학의 핵심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주희의 언어로 말하자면 도덕계와 자연계가 분리되어야만 혹은 분리되어 있어야만 과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계와 도덕계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주희의 자연관은 서구과학의 자연관과 이념적으로 충돌된다.

서구과학의 자연관은 통찰력보다 관찰된 결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주희에게서는 통찰력이 더 중시된다. 이점에서 격물의 개념이 찾아질 것이다. 格物이라는 글자에 얽매어서 격물을 마치 서구과학의 관찰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하려했던 서구의 비교학자들이 더러 있었다. 현대의 동아시아 독자들도 사물의 ‘물’ 자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명이 들어온 이후 物은 생명계를 제외한 고정되고 운동없어 죽어있는 대상적 사물이라는 개념으로 변모되었다. 격물의 물은 그런 물이 아니라 생명계를 포함한 모든 자연계를 말한다. 이런 개념의 혼돈으로부터 동아시아 자연학이 오해되곤 한다. 저자 역시 이런 단순한 오해를 하지 말 것을 이 책에서 당부하고 있다.

5. 이성적 사유의 발현

저자는 주희를 조금 벗어난 이황의 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理氣互發論으로서 이황의 이기론은 主理論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황의 기는 생성과 소멸을 하며 선과 더불어 악도 발현될 수 있는 반면, 주희의 생각은 氣가 별개가 아니라 理 안에 들어와 있어서 마음 밖으로 리를 둘 수 없다고 했다. 저자의 책 1장에서 주희의 기 개념에 대한 현대 주석가들의 해석들이 다뤄지고 있다. 저자가 정리한 기를 서평자가 다시 요약한다면, 기는 (i)연속성(心田慶兒) (ii)에너지(Manfred Porkert) (iii) 취산 (iv)자연발생성(J. Needham) (v)생명성 (vi)만물발육력 (vii)비초월성/자연성으로 요약 가능하다.

이 앞의 한 문단만 언뜻 보기에도 이황의 생각은 플라톤과 닮았으며 주희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황과 주희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과학과 관련하여 굳이 말한다면 이황의 주리론은 가설연역적 사고에 연관지을 수 있으며, 주희의 기론은 경험관찰적 귀납추론에 연관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런 추론은 순전히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 생긴 자연적 느낌이라서, 나의 이런 추론에 대한 책임을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도 조금 분담시키고 싶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황이나 주희에게 공통된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적 사유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이 책 2부 3장에서 다루었듯이, 미신을 거부하는 정약용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희가 다룬 많은 자연학에는 과학기술의 측면과 나아가 초자연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자연학을 다룬 주희의 태도는 이성적 기준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주희나 이황이나 서구과학을 접했던 정약용에서조차 모두 점술이나 내단 그리고 귀신같은 범주를 언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의 입장을 오늘날의 과학적 태도와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 만유인력법칙을 통해 땅의 작용력과 천체의 작용력을 하나로 종합한 뉴턴은 세계문명사 통 털어서 가장 과학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런 뉴턴도 소위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매달려 말년을 다 보냈다. 오늘의 편견 그리고 서양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선으로 주희, 이황과 정약용을 볼 수 있다면, 유가의 이성적 사유구조가 과학적 사유구조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김영식의 책 <유가 전통과 과학>, 그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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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동상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

 

최종덕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1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무신론자의 시대 : 이 책 피터 왓슨의 <무신론자의 시대>는 원래 영국판 책 제목을 <무의 시대>로 달고 나왔었다. 그러나 미국판에서 <무신론자의 시대>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이 책을 무신론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단정지면 안 된다. 무신론도 의미가 있겠지만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내재된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음을 은근히 보여주려는 책이다. 하버머스와 네이글로 시작하여 니체와 산타야나마르크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융과 빅터프랑클에 이르기까지 현대 20세기 철학자들을 통하여 종교와 무신론이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라 공존관계임을 보이려고 한 것이 저자 왓슨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예이츠가 본 니체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무신론의 성경이지만, 그런 책도 당시 니체의 책의출판을 맡은 인쇄소에서 니체 책보다는 찬송가집 50만권을 인쇄하는 일정 때문에 니체 책 출간이 한참 뒤로 밀려났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징적으로 종교와 반종교이 당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니체의 초인을 저자 왓슨은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방향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니체의 초인을 설명하기 위하여 니체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예이츠William Buttler Yeats가 본 니체로 대신했다.(1902) 예이츠는 니체를 “가혹한 니체”와 “온화한 니체”로 구분했다고 한다. 가혹한 니체란 “물기없는 눈으로 바라본 세계”와 “무시무시한 인간의 내적 본성”을 강조한 니체이다. 반면 니체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예이츠는 강조하고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더 강조한다. 그런 다른 모습의 니체를 예이츠는 “온화한 니체”라고 했다. 온화한 니체가 바라본 세상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 세계는 혼돈스럽고 모순에 가득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세계라고 한다. 적대자들 사이의 짧은 용서가 존재한다고 한다. 끊임없는 새로운 선택의 자유는 그것 자체로 ‘기꺼이 맞이하는 기쁨’이다. 삶이 비극임을 인정하지만 그짧은 순간순간에도 신성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음을 생각한다. 예이츠는 그런 상태를 황홀한 긍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에이츠를 읽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에이츠의 니체 해석을 지나치게 황홀경의 존재론으로 만든 것 같다. 그 이유로서 예이츠는 나이가 들어 신비과학occult science과 민족주의로 빠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산타야나의 탈속세 : 또 한 명의 미국 현대철학자 산타야나가 있다. 산타야나의 반초월주의 철학은 이미 당시의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산타야나의 논거는 매우 정교했다. 그에게 초자연성은 없으며 따라서 영혼도 없다. 그는 철학적 자유주의자로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실재의 관념을 싫어했다. 그는 관념론의 철학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철학은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관념론도 지나치면 신비주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산타야나는 신비주의를 철학적 논의 자체의 붕괴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 왓슨은 교묘하게도 산타야나에서 신성성을 골라내었다. 산타야나가 삶의 가치를 속세가 아닌 것(unworldiness)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명제를 골라낸 것이다. 즉 탈속의 범주에서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안에서 정신성이 내재된다는 산타야나의 명제를 왓슨은 부각시켰다. 그러나 내가 산타야나를 아는 범위에서 왓슨의 강조점은 초점을 약간 벗어났다. 그가 말하는 정신성이란 미학적 정신성에 국한한다. 학문적 혹은 합리적 정신성은 여전히 세속적 합리성에서 찾아진다.

아방게르 : 1차 세계 대전 직전 프랑스의문화적 풍토를 말한다. 이에는 프랑스혁명의 저항정신이 포함된다. 나는 이 책에 나온 그 저항정신의 질문들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1)성숙한 어른이 아이보다 과연 우월한가? 2)유머와 아이러니(풍자)의 차이가 있을까? 3)꿈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모호하지만 상징적인 그리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중성이 무엇인가? 왓슨은 다중성과 아이의 개념을 이성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유도하려는 글쓰기 전술을 보이지 않게 노출시켰다.

 

마르크스의 혁명 : 저자의 마르크스 해석을 더 보자. 경제학자며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은 아래의 주장을 담았다고 말한다. 1)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부가 많아질수록 더 가난해진다. 2)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어도 더 가난해진다. 즉 인간 존재로서 더 궁핍한 소외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3) 결국 소외는 노동에서 생겨난다. 왓슨은 소외의 기원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1)노동의 댓가는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를 지배한다. 2)생산행위자체가 노동자의 존재론적 본성을 빼앗는다.(소외시킨다) 3)시장이 형성되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외시킨다. 4)결국 노동은 노동자를 노동자가 속한 문화에서 소외시킨다. 나아가 저자 왓슨은 마르크스가 본 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첫째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물리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사회를 지배하는 지식권력의 주류가 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둘째 인간은 오로지 혁명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순화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책 10장) 왓슨이 왜 마르크스를 설명했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 중의 하나가 마르크스의 혁명조차도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적 구원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인데, 왓슨도 마르크스를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 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표제어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세계와 존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잘 맞추어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세계가 우리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나 본질은 무의미하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본래적 삶이란 허구이며 세계 앞에서 우리는 유한한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유한성을 깨닫고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가 세계의 다원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 선택될 수밖에 없는 일을 결단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결단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인정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계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잘 맞추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길을 ‘염려’Sorge라고 표현했다. 세계를 염려하는 울의 하이데거의 태도는 세계를 관조해야 한다는 초연함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한다. 세계라는 말 대신에 사회라는 말을 대입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탈정치화 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귀착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초연함의 종교성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 저자 왓슨의 해석이다. 왓슨의 이런 해석은 아주 명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1927)에서 존재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하나는 변화를 인정하는 미래지향의 존재(Sein-Zu)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Zum-Tode)이다. 여기서 저자 왓슨은 하이데거의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 ‘향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자 왓슨은 추상세계를 거부한 하이데거에서도 종교적 향함의 태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이지만 왓슨은 하이데거의 인간적 태도에 대하여는 아주 부정적이다. 하이데거의 문체가 조악하여 읽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더라도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과 나중에 후설과 아렌트에 대해 비열한 처신을 한 사실을 저자 왓슨은 잘 꼬집어 내었다.

 

, 원형에 숨겨진 종교 감정 : 집단의식 형태의 무의식에는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재된 패턴이 있으며, 그런 패턴을 융은 ‘원형’이라고 했다. 원형을 이해하는 몇몇 개념을 나열한다. 인간에 씌여져 착각과 허상을 일으키는 페르소나가 있다. 남성성은 남성의 것, 여성성은 여성의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은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으며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이 융의 중요한 인간이해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안에 가능한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 안에 가능한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요즘 통속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외향성과 내향성이 구분도 융이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림자 개념은 인간의 이면을 관찰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여기서 왓슨은 융의 자아 개념을 강조한다. 융이 말하는 자아 개념 자체가 바로 신을 믿으려는 존재라고 왓슨은 해석한다. 융은 종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만 사람의 종교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신경심리학적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왓슨이 보기에 융이 말하는 종교 감정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강조하는 듯한데, 저자 왓슨도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기술하였다.

 

듀이, 종교와 종교적 : 실증주의자로서 듀이는 실증 범주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당연한 일이다. 초자연주의를 인식의 방해물로 규정하는 것이 듀이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듀이의 종교이해를 새롭게 관찰한다. 듀이는 초자연적 계시종교를 거부한 것이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종교적 성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종교는 하늘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문제를 풀어야한 한다고 한다. 종교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문제에 직접 닿아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일이 가능하다. 사람 마음속에 더 잘 살기 위해 경험에 내재한 힘과 가치를 보여주는 시적인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적인 상징의 힘이 바로 종교라고 왓슨은 말한다. 결국 왓슨이 보기에 실증주이자 듀이조차도 종교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랑클의 높이심리학 : 빅터 플랑클의 강제수용소 일기는 우리 내면의 반성과 성찰을 가져다 준 생명의 고전이다. 독일 점령 아래 3년간 감금된 경험을 전쟁이 끝나자마자 고향인 빈으로 돌아와 9일 만에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클은 고통의 참상에서 인간의 원형을 보았다. 고통 안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고귀함을 발견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삶의 의미이며, 그 의미란 자기 개인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 통로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존재의 발견이 곧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은 자기 초월이다 자기 초월의 심리학을 높이심리학이라고 표현한다. 융의 깊이심리학에 대비하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그 ‘높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영성을 찾아가는 내면의 에너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빅터프랑클의 심리학은 단순한 행동주의나 유물론적 심리학이 아니라 영성의 심리학임을 저자 왓슨은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내재적 충동 : 하바마스는 종교의 기원을 결여된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했다.(Habamas 2008,”Ein Bewusstsein von dem, was fehlt”) 언어분석철학으로 시작한 현대 영미철학자 네이글은 스스로 무신론자이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충동성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했다. 네이글에게서 생명은 이중적이다. 생명은 물질적 현상이면서도 목적론적 실체라는 것이다. 왓슨은 네이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왓슨은 네이글의 이중성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혹은 편향적으로 해석했다. 분석철학자 네이글이 젊었을 때는 전형적인 유물론자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변했듯이 네이글도 나이들어서 신비주의자로 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네이글은 무신론을 유지하지만 세계 안의 목적을 인정한다. 네이글은 그런 종교적 성향의 목적론을 ‘자연목적론’이라고 했다. 저자 왓슨은 네이글을 통해서 종교와 무신론의 구분에서 벗어나 공존가능의 논리를 세우려 했다. 그의 태도는 무신론과 종교의 공존보다는 애매한 상태의 병립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노년에 들어서 진화론을 부정하면서도도 기독교 창조론의 새로운 버전인 <지적설계론>과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네이글의 <마음과 우주>(Mind and Cosmos, 2012)라는 책이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디스커버리 연구소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서평자가 보기에 노년의 네이글은 무신론의 주장을 포기한 것이다. 어쨌든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한 공포와 동경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진화론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아니면 인류학적으로도 사실인 듯하다.

 

논리와 시 : 저자 왓슨은 시의 성찰적 기능을 크게 강조한다. 시는 일종의 세속적 계시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윤리학자 리처드로티는 유명하다. 그는 불행히도 노년에 췌장암에 결렸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전공분야에서 약간 벗어난 논문 “실용주의와 낭만주의”를 썼다. 그 글에서 로티는 셀리의 시를 언급하며 <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를 다루었다. 로티가 한 말이다.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시이다.” 그는 말년에 들어서 논리에서 시로 전환했다. 왜 나이가 들면 논리를 싫어할까? 이 책은 그런 전환을 찬사했지만 최소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안내] 한철연 회원님들께(웹진 편집위원회 보고)

한철연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한철연 웹진 (e)시대와 철학입니다.

2010년 6월에 창간한 웹진이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 그동안 회원님들과 후원자분들, 원고료도 없이 글을 써주신 여러 필자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두 분의 전임 편집주간(구태환, 이병태)과 무려 4년 동안 무급으로 웹진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이전 편집주간(강지은)의 수고 덕분에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섯 살을 맞이한 <ⓔ시대와 철학>!! ~ 아마 많은 회원분들께서는 기쁨보다는 아쉬움과 걱정의 목소리를 속으로 감추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름의 안정화된 상황에서는 보통 하루 방문객 800여명에 하루 기사 리딩 1500여 건, 한 달 리딩 건수 2만 여건에서 2만5천회를 웃도는 양적인 성장도 한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뉴얼 과정에서 발생했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때때로 접속과 디자인에서도 아쉬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웹진을 담당했던 저희 일꾼들의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어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한철연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중한 글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5기 연구협력위원회와 함께 웹진 4기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면서 초심을 생각하기 위해 잠시 우리 웹진의 창간 선언문을 꺼내 봅니다.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물론)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 잡지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http://ephilosophy.kr/han/49494/

그러나 이 창간 선언문을 되짚어 보면, 과연 우리 한철연과 회원 연구자들은 당시의 절규 섞인 선언만큼이나 실천적으로 그 과제를 수행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상의 자유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웹진을 방문하며 서로의 사상과 의견을 나누어 왔는지? 물론 웹진을 운영해 온 저희 운영진들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전의 선언을 유지하면서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솔직히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해야 할 것인지?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이제 우리 웹진은 나름의 새로운 각오 무언가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회원 여러분의 많은 질책과 조언 속에서 여러 일들을 수행해야겠지만, 우선 이번 웹진 운영진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진 내부에서 보다 자유롭고 활발한 사상의 교류와 의견의 공유 및 불화가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블로그진’ 코너를 개설했습니다.

앞으로 이 코너에서 필자로 활약하실 분들은 월 1만원 이상의 사이트 이용료(정기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좋을 듯)를 자동이체 하면서, 매달 1-2편의 자유로운 글을 본인이 직접 웹진에 게재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재게재하셔도 좋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글을 올리시면 됩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필명을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글에 대한 저작권도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고, 글에 대한 책임도 각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그 어떤 형태의 글도 다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시, 사진 비평 등등 전적으로 개인들이 원하는 어떤 형태라도 무방합니다.

물론 이런 한 가지 시도만으로 현재의 웹진이 급격하게 변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저희 운영진들은 최선을 다해 창간 선언문의 그 선언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 6월 2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위원장 김성우, 편집주간 조은평 올림.


추신) 6월 4일 봄 심포 총회에서 보고드릴 내용도 추가 안내드립니다.

1.  ‘블로그진’이 드디어 출범 했습니다. 현재 두 분이 매월 1만원의 후원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며, 두 개의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평이의 궁시렁]. 앞으로도 관심 있는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 현재 웹진이 다소 안정화되었습니다. 아직 PC버전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더 수정보완과 리뉴얼이 필요하지만, 모바일 버전은 훨씬 산뜻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회원분들은 접속하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댓글 창에 페이스북 계정이나 구글 계정으로 한번 씩만 로그인 하시면 스마트폰에서 계속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3. 지금까지 웹진 운영 프로그램인 워드프레스 리뉴얼과 기술적인 부분을 외부에 용역을 맡겨 거금을 주고 진행해왔지만, 원활하지도 않고 워드프레스의 경우에는 충분히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직접 한철연에서 운영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웹진 편집주간이 직접 워드프레스 강좌를 수강할 예정입니다.

4. 현재 웹진의 경우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외부인들이 접속하고 있지만, 정작 회원들의 접속과 활용도는 저조합니다. 회원 분들의 적극적인 댓글과 의견 공유 부탁드립니다.

5. 블로그진과 더불어 블로그 분과방도 모집할 예정입니다. 각 분과에서 원하는 형태에 따라 블로그진 코너를 각 분과에서 운영할 수도 있고, 따로 분과방을 만들어서 분과 세미나 결과물을 올리거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6. 현재 한철연 회원들의 글 투고 상태는 다소 침체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역량도 물론 키워나가야겠지만, 외부와의 연계도 고려할 생각입니다. 그 일환으로 현재 ‘소문자 에프’라는 20대가 꾸리는 독립출판 잡지와의 연계가 결정되었습니다. 매월 5만원 후원금을 소문자 에프에 지원하고 매달 2꼭지 정도의 페미니즘 관련 글을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럴 경우 20대와의 연계도 훨씬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7. 현재 이전처럼 무급 편집주간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원고료의 경우에는 앞으로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간에 일정한 원고료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회원분들의 많은 투고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8. 웹진의 일을 편집주간이 홀로 결정하고 끌어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현재 회원들 중 편집위원을 선정해서 웹진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나름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웹진편집위원회 명단 : 김우철, 박민미, 한길석, 박종성, 진보성, 한유미, 지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