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배기호
좋은 이름 없을까? 지방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던 필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듯이 이종사촌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라는 말에, 정작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말이다(솔직히 노상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이름이 ‘나라’였다. 당시 우리말 이름이 유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냥 부르기 쉽고 하늘을 나는 새처럼 동생이 자유롭게 꿈을 향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진심을 담은 결과였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동생의 이름은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가 직접 이름을 붙인 아이니(아, 지금은 엄연한 어른이다) 이상할 것은 없다.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은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노래했던가. 그리고 그 노래는 끝없는 돌림노래 형식을 취했는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불리기도 하고 우리 주위에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지라도 그것의 표현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맹점은 간혹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정몽주와 정도전은 우국충정의 대명사다. 다만 어떠한 ‘나라’에 대한 충정이었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졌고,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뉠 뿐이다. 그렇게 4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우국충정의 노래는 아주 강렬하게 울렸다. 열강들의 간섭과 침략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각각의 창법과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개화파(開化派), 동도서기(東道西器), 서도서기(西道西器), 동도변용(東道變容) 등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는 어찌할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음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부강함이 당시 이 땅의 현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으로 이 땅을 유린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한 섬나라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300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서양의 세(勢)를 앞서 배우고 익혀 이 땅을 넘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로 인해 짓밟힌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실히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 반민족행위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2009년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문신, 고위관료, 정치가, 외교관, 언론인, 독립협회 회장, 민족운동가, 종교운동가, 교육운동가 등으로 다양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화를 주장하며 민족의 실력양성을 주도했다는 공과 친일행위를 했다는 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에 국한했을 때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67% 이상이 윤치호를 모른다고 한다(최훈, 「윤치호 연구」, 『慶州史學』 第39·40合輯, 85쪽 참조). 이는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력과 행태를 세세하게 알리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른바 당대를 주름잡던 지식인이라고 소개할 정도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또한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일기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일기는 그에 대한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그를 알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현재 그 일기의 몇몇 내용이 어록이라는 미명아래 인터넷을 떠돌고, 나아가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칭송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윤치호는 일찍이 일본과 청, 미국 등에서 유학했다. 그러면서 서양이 발전하고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오른 건 모두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종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땅도 개화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중심의 사회진화론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런 생각 저변에는 힘의 논리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부강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이 땅은 부강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부강한 자에게 의탁해야 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땅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 축복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본을 같은 황인종이며, 동양이면서도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부강한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은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일본에 의탁해 배우고 익혀 어른이 된 후에 독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3년 만에 출감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을 거치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노골적으로 변했다.
배우고 익힘의 결과는 무섭다.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 믿고 실천한 윤치호 자신이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차원이라면 무서움을 넘어 재앙에 가깝다. 이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지금과 가까운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대어 이 땅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모를까, 교육운동가나 지식인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보기에는 순진하다 못해 가볍고 어설프다.
애국계몽운동가. 윤치호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혀 근대적 사고를 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 든다. 그가 사랑한 ‘나라’는 무엇이고, 새로움은 무엇이며, 근대는 무엇인가?
지금도 애국, 곧 ‘나라’ 사랑의 노래는 곳곳에서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독창, 합창, 제창 등의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 어쨌든 ‘나라’를 사랑한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겉으로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관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럼으로써 이 땅이 다시는 윤치호 같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월감을 가진 이중인격자가 나오지 않는 곳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몇 해 전, ‘나라’의 하나 뿐인 언니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이모의 SNS에는 ‘우리나라 사랑해’라는 문구가 항상 적혀 있다. 밝히기 쑥스럽지만, 필자 역시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더불어 드는 생각… 동생들은 자기 이름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알까? 괜히 미안한 생각에 ‘우리’·‘나라’가 보고 싶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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