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노라면 동분서주도 모자라 남분북주를 해야할 판이다. 고교시절 방영된 국경일 기념 드라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당시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의 필통 데코레이션을 담당한 인물이었지만 3.1운동과 님의 침묵에 관한 잔상 이외에 그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기 그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불충분하다. 어떤 운명인지 충청도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강원도와 인연을 맺은 뒤 우연한 기회에 인제의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찾아 오래전 추억을 떠올렸다. 만해마을 전시실에서 한용운이 한 세기 전에 지금 내가 보는 음빙실문집을 보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총으로 주권자를 학살하고 권좌를 누리고 지금도 호위호식하는 사람의 흔적만 백담사에 남아있었음은 충격이었다. 이미 8년 전 일이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
홍성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 산사에서 출가했으며 배움을 찾아 러시아로 길을 떠났고 불교 인사로서 남도의 여러 사찰을 돌며 강연하고 조선의 독립적 종단 건설을 위해 승려들을 설득했으며 경성에서는 신문 잡지를 내며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생을 마쳤다. 한용운은 이렇듯 여러 지역에 족적을 남겼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한 두군 데 공간만 찾는 것으론 역부족이다. 5개 지자체가 손을 잡고 대학의 만해연구소가 협조하여 선양사업의 의지를 보인 것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없지 않다. 게다가 불교 개혁을 주장하고 불교 대전을 펴내서 불교 이론을 심화하고, 조선 독립의 서로 억압의 역사에 저항하는 족적을 남기고 만년에는 시와 소설로 문학인으로서의 면모(본인은 문학으로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지만)도 남겼기에 한용운의 내면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려면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동북아시아를 주유하며 몸소 겪은 일들은 공간적으로도 활동 영역으로도 다채로운 그의 역정을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로 그리며 영웅적 행적이라고 기리고만 끝낼 수 없게 만든다. 승려가 된 후 그는 세계를 관심대상으로 품었고 세계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그의 길은 고단한 투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첫 출타부터 고난을 겪었다. 출가 초기 중국에서 들어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음빙실문집을 읽고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꿈을 품은 한용운은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듯 일본에서 떠나 조선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를 거쳐 미주까지 가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좌절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지 조선인이 그를 일진회로 오인해서 죽이려고 했다. 일단 풀려난 뒤에도 다시 조선인에게 봉변을 당하던 도중 현지 경찰에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생을 마칠 뻔한 경험에 한용운은 세계일주의 결심을 접게 된다.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 그의 길에서 위협을 준 이들은 역사의 현실이 만들어낸 동포의 배타심과 경계심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운 경력이 있지만 불교 종단을 총독부가 통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시기 그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총독부 권력을 이용해서 종단 내 본인의 권력을 굳히려던 친일 승려였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식민지 권력이 준 주지라는 자리에 취한 승려들의 비협조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용운도 당시 종단의 유력인사도 은둔의 수도승이 아니었지만 세간에 대한 처신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는 식민지 권력이었다.
식민지 권력에 맞서는 일에서도 그가 겪은 것은 결코 동지적 단결만이 아니었다. 임제종 운동이 끝난 후 고국의 현실을 알리려 만주에 갔지만 그곳에서 블라티보스토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정탐으로 오인한 그곳 조선인이 한용운을 총으로 쏘았던 것이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총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이 훗날 조선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이를 오인사살할 뻔한 일화다. 한용운은 이 일화를 「죽다살아난 이야기」로 남기기도 했다. 훗날 독립에 뜻을 같이 한 이들과의 불화, 불일치도 한용운의 역정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벗이었고 3.1독립선언을 주도한 최린과 여러 인사들이 훗날 변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서정주의 입으로 전해진 한용운에 대한 현상윤의 첫인상은 “껌정 두루마기에 껌정 고무신에 얼굴은 가무잡잡 불그레하고 키는 나지막한 청년”이었고 현상윤은 그를 “꼭 무슨 첩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용운은 “처음 우리 판에 와서부터 어떻게나 열심히 한몫 끼워 달라고 조르던”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선언도 ‘우리 판’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한용운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권력과 멀었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던 비주류였다. 신간회가 출범한 후에도 한용운을 찾아온 기자가 한용운의 입장을 민족주의에 끼워맞추려고 취재하려다 크게 혼쭐이 나서 돌아간 일화도 전해진다. 독립을 당연시 하는 후세의 시각에서는 당시의 민족운동을 단순하게 보기 십상이지만 상황이 빚어낸 오해든, 생각의 변화든, 퇴행적 네트워크 문화의 발로에서든 한용운은 갖가지 불화를 겪었다. 이러한 불화에 그는 “훼예를 무시하는 호담이 있어야 만인의 이상을 초월하는 쾌사를 창조할 수 있다.”(「훼예毁譽」)라며 결연히 응답했다.
심우장에 동상으로 남아있는 한용운의 인상은 매우 고단해보인다. 2017년에는 심우장에서 그를 기리는 뮤지컬도 상연되었고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이다. 이렇듯 그에 대한 기억은 지속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의 삶은 고달팠고 병을 얻어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민적을 거부해서 인권 없이 살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출가 이후 불교개혁을 위해 조선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 못지 않게 그가 겪은 ‘조선인’들과의 불화도 그를 힘들게 한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친딸에 의해 정치가로 회고되고 불교에 투신한 것이 정치활동에 대한 갈망이라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시대를 불철저하게 인식하거나 지배권력과 타협하며 그와는 다른 ‘정치’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그의 삶을 더욱 핍진하게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스스로도 고단했다고 회고하는 삶의 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그 흔적을 그의 열정적인 활동의 자산으로 남은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이 유명세를 탄 것은 3.1 독립선언 이후 투옥된 후 발표한 「조선독립의 서」이지만 그 생각의 연원은 불교사상이었다. 그는 고려대장경의 문구를 발췌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로운 차원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편찬 의도를 밝혔다. 그는 불경을 통해 현실의 사악함을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불교의 교지(敎旨)는 평등”이고 불교의 사업은 “박애(博愛)요, 호제(互濟)”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善)은 “죽어 지내는 소극성이 아니라 우자가 되고 승자가 되어 뭇 사람들을 보호하고 만물을 애육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대등하고 평등한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사랍답게 사는 일”이다. 악은 “열자와 패자가 되어 남들에게 동정받는 자가 되고 사물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 “차등과 불평등을 자초하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억압과 차등의 제국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일천하게 만해의 삶을 엿보는 동안 종교를 혁명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삼자던, 장타이옌, 동시에 지식인과 수많은 불화를 겪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루쉰, 그리고 루쉰이 그려낸 끝없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나그네가 떠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는 만해가 기념사업도 하고 공연도 열리며 기려지지만 권력의 자장 안에서 위선적 정치인, 나약하고 허위적인 지식인, 기레기, 그들의 네트워크가 공고한 오늘의 현실에서 만해가 살아있다면 비난받지 않고 불화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기고자: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중국현대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실험과 시련, 행운을 불균등하게 겪으면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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