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52- 미적분은 정당한가?(1)
1)
헤겔은 양적 무한성 다룬 끝에 주석을 세 개 붙였는데 그 가운데 주석 1은 초판에서 이미 나오지만(내용을 약간 수정했으나 그 수정은 언어적 표현에 그친다), 주석 2와 3은 재판에서 추가한 부분이다. 이 세 주석에서 헤겔이 다룬 것은 소위 미적분의 정당화 문제다.
먼저 주석 1 앞부분에서 헤겔은 자신이 왜 미적분의 정당화에 뛰어들었는가를 설명하는데, 이 부분을 읽어보면, 그의 의도와 그의 목표가 잘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이 부분은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지극히 난해하다. 더구나 헤겔이 수학의 공식을 철학적 개념으로 서술하기에 그의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기도 힘들다. 그 때문인지,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부득이 헤겔이 주석에서 자기의 논지를 전개한 대로 따라가면서 그의 주장을 요약하려 한다.
주석 1을 시작하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미적분의 정당성은 주로 ‘성과’의 ‘올바름’에 기인하지만, 그 증명은 정당화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 자체로 잘못으로 인정된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미적분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비판 없이 사용된다면 “그 적용의 범위를 결정하지 못하거나 그 오용을 막을 수 없는”(논리학 재판, GW21, S. 236-237) 것이 아닐까?
헤겔은 이런 미적분의 정당화를 수학자의 손에 맡겨두지 않고 자기가 직접 다루게 된 이유로 이 미적분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 철학에서 다루는 무한 개념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는 심지어 “수학적 무한[미적분]에 근저에는 진정한 무한 개념이 놓여 있으며” 이것은 기존의 철학에서 논의된 형이상학적 무한 개념(즉 헤겔의 말로 악무한이나 무한 진행)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수학은 자신의 근저에 있는 무한성 개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을 정당화하지도 못한 채, 그런 철학적 정당화는 자기들이 할 바는 아니며, 자기들은 그저 자기가 처한 고유한 지반 위에서 일관적으로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으니, 그 때문에 자기가 개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2)
헤겔은 미적분이 증명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고 했을 때, 그 오류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다. 즉 미적분은 “유한한 크기를 한번은 무한소만큼 증가시키고 이 무한히 작은 크기를 부분적으로는 그다음 계산에 보존하지만, 일부분은 무시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일부를 무시하는 이유는 “그 일부가 영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정량이어서 무시될 만한 것이기”(논리학 재판, GW21, S. 237)때문이라 한다.
예를 들어 y=x² 의 미분 계산에서 도중에 전개한 항 가운데 미분을 포함하는 첫 번째 항 2x*dx/dx는 남기고 두 번째 항 dx²/dx는 제거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일상적 삶에서와 달리 수학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수학은 엄밀하고 정확한 학문이며 더구나 “수학적 인식에서는 증명이 본질적이기에” 조금이라도 잘못된 증명은 수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 주장은 나중에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미적분에 관한 기초만 이해하더라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주장이다.
3)
헤겔은 미적분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이렇게 문제점만 던져놓고는 무한량에 대한 앞에서 설명한 개념으로 다시 돌아간다. 왜냐하면, 미적분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한 개념이 무한소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소 개념은 역사적으로 고대에서(알키메데스나 카발리에, 페르마 등) 등장해 라이프니츠 직전까지 계속됐기 때문인데 이 개념은 미적분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헤겔은 이 논의에서 미적분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이런 무한소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무한성 개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우선 그는 무한히 작은 양은 정량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무한소는 최소치라는 의미인데 즉 “그것을 넘어서 더 적은 것이 없는 크기”(논리학 재판, GW21, S. 239)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정량인 한에서는 항상 증감할 수 있다. 증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량의 본성에 속한다. 따라서 최소치란 즉 더 적어질 수 없는 것은 더는 정량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도 무한소는 하나의 크기로 받아들여지니, 무한소란 개념 자체에 자기모순을 지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량은 무한한 한에서 지양된 것으로 사용되기를 요구하며 즉 정량은 아니면서도 그것의 양적인 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유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39)
헤겔은 이때 즉 무한자가 일정한 크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런 무한에 대해 더 큰 것과 더 적은 것의 구별이 성립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240)라고 하니, 나중에 칸토르가 무한 집합론의 모순으로 설명했던 것을 헤겔은 이미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토르의 모순은 예를 들어 흔히 자연수의 집합은 정수의 집합보다 작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연수와 정수는 둘 다 무한한 원소를 지니고 각 원소는 서로 대응하니, 양자는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고 따라서 크기가 같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연수의 무한은 정수의 무한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상식은 무한을 일정한 값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4)
최소치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칸트는 무한량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라는 일정한 값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 무한량-칸트는 무한한 전체라는 말로 대체한다.-은 끊임없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 중인 것 즉 무한 진행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서는 앞에서 주어진 것을 넘어가는 관계만이 들어 있고 주어진 것에 따라서 그것을 넘어선 무한한 전체는 다른 무한한 전체보다 더 클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게 된다. 무한한 전체의 절대적 크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칸트에서 무한량에서 이처럼 주어진 양을 넘어가는 운동은 주관의 작용에 속한다. 주관은 끝없이 주어진 양을 넘어가는 가운데 전체를 동시에 파악하는 “종합은 결코 완성될 수 없게”(논리학 재판, GW21, S. 240, 이 구절은 칸트 재인용) 된다.
이를 거꾸로 보면 주관이 넘어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대상인 수 자체는 마침내 완성된 최대치라는 일정한 값을 지니게 되니, 여전히 앞에서 모순으로 여겨진 최대치, 최소치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넘어가는 운동은 주관에 속하고 정량이라는 크기는 대상에 속하면서 “모순이 객체와 주관에 나누어 배당될 뿐”(논리학 재판, GW21, S. 240)이다.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 역시 모순을 피할 수 없는데, 이 모순은 미적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든 이차함수의 예에서 항을 전개하면 첫 번째 항은 2x*dx/dx이다. 이때 뒷부분 dx/dx는 결국 1이니, 여기서는 2x만이 남는다. 그러나 만일 dx가 무한소로서 어떤 값을 지니지 않는다면 즉 마침내 0에 도달하고 마는 무한히 작은 양이라면, dx/dx는 곧 0/0이 되면서 판단 불능에 빠지게 된다.
0/0은 1도 되고 100도 되는 무의미한 수다. 이런 판단 불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dx는 최소의 값을 지녀야 하며 그때 비로소 미분 계산에서 첫째 항에서 2x만을 남기는 이유가 이해된다.
5)
헤겔은 마침내 자신의 무한성 개념을 제시한다. 그의 무한성 개념은 이미 앞에서 제시한 대로 비례(또는 관계 Verhaltnisse]의 개념과 연관된다. 그는 앞에서 외연량과 내포량을 설명한 다음, 무한량을 제시했다.
외연량은 단순한 자기 관계다. 이는 추상적이며 개별적인 정량이다. 이 정량이 자기의 임의적인 한 부분을 단위(예를 들어 보폭이나 팔길이)로 측정되면, 일정한 정량이 된다. 예를 들어 길이나, 무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외연량은 ‘배중성[Vielfachheit]’으로 규정된다.
내포량은 여전히 개별적이며 추상적 정량이지만, 타자와 비교된 정량이다. 더 크거나 더 적은 것을 순서대로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등이다.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가 여기에 속한다. 헤겔은 이런 외연량을 ‘다중성[Mehrheit]’이라고 한다.
무한량은 타자를 통해서 측정된 정량이다. 예를 들자면 속도(=거리/시간)나 비중(=무게/부피)다. 이는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가 바탕이 된다. 즉 그 관계를 통해서 어떤 것이 자기를 규정할 때, 그것이 무한량이다.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 무한량은 부정성을 지니고 따라서 질적인 규정성을 지닌다. 그러나 무한량은 독자적으로 하나의 정량이므로 이는 “질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크기 규정”(논리학 재판, GW21, S. 241)이다.
“무한 정량은 계기로서 그 타자와 본질적으로 통일 속에 있으며 다만 그의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즉 무한 정량은 그의 타자 존재와 관계 속에 있는 것과 연관해서만 의미 있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41)
6)
질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빨간색은 꽃의 빨간색일 수도 있고 석양의 빨간색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무한량이 질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그 성격이 일반적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일반성은 비례의 일반성이다. 헤겔은 이 무한량을 ‘비례의 지수[Exponent]’라고 말한다.
즉 어떤 정량의 크기가 다른 정량의 일정한 크기를 단위로 해서 측정된 것이므로, 이 관계 즉 비례 관계는 일정하다. 다른 정량의 단위가 증가하면 그것에 비례해서 어떤 정량의 크기도 변화한다. 예를 들어 속도나 시간당 4키로라면 두 시간에는 8키로 거리를 지나가며 세 시간에는 12키로 거리를 지나간다.
무한량에서 서로 관계하는 두 정량은 독자적으로 보면 하나의 정량이지만, 이 관계에 들어가면 더는 정량이 아니라 전체 정량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정량은 양적인 것으로서 다른 정량에 대해 무차별하겠지만, 전체의 계기로서의 정량은 자신과 관계하는 타자(다른 정량)에 대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 무한량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단위로 측정된다. 그러나 이는 외연량처럼 추상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해서 측정된 자기 관계다. 예를 들어 속도는 거리의 크기를 말한다. 크기는 자의적인 척도를 통해 측정된다면, 단순한 자기 관계다. 그러나 이 크기가 다른 정량인 시간에 관계하여 측정된다면 그것이 속도다.
헤겔은 미적분에서 핵심 개념인 무한은 알키메데스의 무한소도 아니며, 칸트의 무한 진행도 아니고 바로 이런 관계로서의 무한량을 의미한다고 본다.